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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04.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11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3)

문재환이 등기이사로 선임되고, 태선화학주식회사가 증시에 상장되었다. 태선화학주식회사임직원들이 경사스러운 분위속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기뻐하였다. 특히 숙원이었던 일을 이룬 박동후회장이 쏟아지는 정관계의 축하인사를 받고 희색만연했다. 박옥춘도 큰오빠회사의 상장소식에 즐거워하였다. 반면 문재환은 등기이사로 선임됐음에도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문승협은 증시상장과 등기이사선임의 의미를 몰라 아무 감응이 없었지만, 집안경사라며 들뜬 할머니박옥춘과 평상시처럼 무덤덤한 할아버지문재환의 모습이 대비되어 의아했다. 작은 외삼촌 이우철이 해양대학교졸업과 동시에 외항선을 타게 되었다는 소식만큼은 무척 반가웠다.


정부가 종래 3해리를 12해리로 확장하는 영해법제정 두 달여지나고 한일대륙붕협정을 발효하였다.

박정희가 9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유신체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동네 강아지도 예상한 일이었다. 10 유신 이후 대한민국대통령선거는 단일 후보만 출마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관제간접선거였기 때문에 선거의 의미는 없었다. 지난 5 치른  대의원선거에서 2,581명의 2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들이 선출되고, 7  대통령선거를 위한 대의원회의가 소집되었다. 닷새동안 후보등록을 받은 결과 507명의 대의원추천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단독으로 등록했다. 1야당 신민당 김영삼, 이민우 등이 후보를 내야 한다며 대통령후보선출전당대회개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철승  대표  당권파는 어차피 입후보요건인 대의원 200명의 추천받기가 불가능하며, 기적적으로 후보 등록에 성공한다더라도 필패인데 괜히 간접선거를 인정하는 꼴만 된다고 반대했다. 결국 신민당은   연속으로 대통령선거를 원천 보이콧하였다. 7 6 장충체육관에서 재적의원 2,581  2,578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선거를 시행했다. 박정희 2,577, 무효 1표가 나와 99.9% 득표율이었다.

영국령 홍콩에서 유명감독 신상옥이 아내 최은희에 이어 북한공작원에 납북당해 충격을 주었다.

지난달 출간된 조세희의 소설집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주목받았다.

제1회 TBC동양방송해변가요제가 열렸다. 최우수상에 한양대학교2학년 왕영은이 소속된 ‘징검다리의 여름’, 우수상은 구창모가 보컬인 홍익대학교밴드‘블랙테트라의 구름과 나’, 인기상에 배철수가 주축인 한국항공대학교밴드 ‘활주로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와 ‘Fevers의 그대로 그렇게, 벗님들의 그 바닷가’가 수상하였다. 그 외에도 TBC신인개그맨 주병진이 친누나와 함께 ‘속삭여 주세요’라는 곡으로 참가하여 눈길을 끌었다.


중학교 첫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문승협은 학교보이스카우트단원들과 덕유산무주구천동계곡으로 3박 4일 캠핑을 갔다. 계곡에 A텐트를 치고 야전삽으로 도랑을 파 배수로를 만들었다. 옹기종기 모여 자면서 지독한 야생모기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새벽같이 일어나 심호흡을 하니 자연내음과 신선한 공기가 온몸에 퍼져 새롭게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항고라는 반합에 지은 설익은 밥과 어설픈 꽁치김치찌개를 끓여 먹었다. 귀찮게만 생각했던 설거지도 공평하게 조별로 당번을 짜서 하니 재미있었다.

다 같이 얼음장 같은 무주구천동 계곡물에 들어가 물놀이를 했다. 남강주도로 2∙3학년선배들이 짜고 문승협의 수영복을 벗기며 사진 찍었다.

문승협은 장난이어도 남자로서 치욕스러웠다. 그럼에도 추억이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생겼다. 저녁에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그동안 복잡했던 심정도 점차 평온을 찾아갔다.


캠핑을 다녀온 후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물가물 들리던 방역차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심심하던 차에 밖으로 나가보았다. 방역차가 하얀 소독연기를 내뿜으며 아이들을 달고 온 동네를 누볐다. ‘방구차다’라고 외치며 열심히 따라가는 아이들이 철없어 보였다. 대한민국어린이들이 소독차에서 나는 소리와 연기 뿜는 모습에 착안해 ‘방귀차’라 명명하였다. 소독차에서 내뿜은 연기를 마시면 몸속해충을 없앤다는 속설을 믿었다. 그래서 재미있어하면서도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다. 가끔 출몰해서인지 나타날 때마다 무척 반가워했다. 방역차가 여름철전염병예방임무를 수행하고 멀리 사라지자, 떠들썩하던 동네가 다시 조용해졌다.

집에 들어와 따분함을 달래려고 TV를 켰다.

바티칸시티교황청과 성베드로광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조명하는 장면이 나왔다. 바오로 6세 262대 교황서거 공식발표와 이를 알리는 조종이 울렸다. 철야순례객과 방문객들이 애도를 표하며 추도미사를 했다는 뉴스였다. 제1차 한미군사위원회가 개최되고, 영국에서 세계최초로 시험관아기가 탄생했다는 소식도 이어졌다.

문승협이 채널을 돌리려고 TV에 다가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생각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유선동입니다.”

“…….”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스 승협아.”

“서 선경이니? 선경아.”

“잘 있었어?”

“목소리가 왜 그래, 많이 아픈 거야?”

“아 아냐, 괜찮아, 자다 일어났더니 목이 좀 잠겨서 그래.”

“지금 어디야, 병원?”

“아니, 집이야. 잘 있었어?”

“응, 잘 있지,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네 생각도 별로 안 하고, 학교생활도 즐겁게 하고.”

“잘했어, 훌륭해.”

문승협은 최선경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둘러댔다. 최선경도 문승협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눈물을 흘렸다.

“3개월 만에 통화니까, 말할 일기도 그만큼 많아, 통화 오래 할 수 있지?”

“미 미안해, 너무 길게는 못해.”

문승협이 진정하려 애쓰며 말문을 열었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하였다. 최선경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아쉽다, 난 밤새 말할 수 있는데.”

“승협아, 할 말이 있어.”

“선경아, 그 말 다음에 하면 안 돼? 오늘은 내 말만 들어주라, 응?”

“…….”

문승협은 최선경의 할 말을 이미 짐작했다. 제갈민주가 동창회 때 말해준 미국이민이라고 생각하였다. 최선경과 연결이 끊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한 번이라도 더 통화할 기회를 만드려고 했다. 최선경은 냉정하여야 했다.

“미안하다는 말 하지 않을게, 네가 싫어하니까.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

“왜 그래, 무섭단 말이야. 다음에 해라, 응?”

“…….”

두 사람은 흐르는 눈물에 목이 메어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승 승협아, 나 미국으로 대학 가려고 이민 가.”

“아, 그거야? 나 알고 있었어, 언제 가는데?”

“이번 토요일에.”

문승협은 태연하려 애썼으나 며칠남지 않은 토요일이라는 말에 무너졌다. 수화기를 막고 오열했다.

최선경도 슬퍼하는 문승협의 감정을 수화기너머 그대로 느끼며 입을 막고 울었다.

“내가 또 미안하다는 말 해야겠어? 바보같이 울지만 말고, 내 말 잘 들어.”

“그 그럼, 이 상황에서 웃을까? 선경아, 난 그렇게 마음이 넓지도 강하지도 않아.”

“승협아, 내 말 명심해. 넌 있는 그대로 훌륭한 아이야,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한 거고, 내 마음에 담은 거야. 그러니까, 네 스스로 너를 괴롭히지 마, 너의 맑은 미소에 숨어있는 아픔이 날 슬프게 해. 약속해 줘, 부탁이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마지막처럼 이야기하지 마. 약속할게, 그러니까 계속 지켜봐 줘.”

문승협은 어떻게 해서라도 최선경과의 마지막 순간을 피하려고 하였다.

최선경은 목소리를 최대한 밝게 하려고 애썼으나, 몸이 힘들어서 점점 안 좋아졌다.

“그래, 알았어, 얼마나 잘하는지 꼭 지켜볼 거야.”

“응, 잘하고 있을게.”

“미국서 텔레파시 보낼 테니 즉각 응답해, 알았지?”

“응. 그런데, 텔레파시보다 편지를 먼저 보내주라.”

“호호, 그래, 알았어.”

최선경은 끝내 심장병치료 때문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끓었다. 그래서 문승협은 더 마음 아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슬픔이 배가되어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울다 지쳐갈 무렵, 박옥춘과 문현아가 들어왔다. 문승협은 슬픈 감정을 빠르게 수습해야 했다.

저녁식사를 마칠 즈음, 서울잠실에 신혼집을 꾸민 큰고모 문희숙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 박옥춘이 통화하다 갑자기 수화기를 문승협에게 건넸다.

“으나, 받아봐라, 큰고모가 바꿔달란다.”

“여보세요, 큰고모 잘 계셨어요?”

“잉, 잘 있다. 너는 잘 지내냐 으짜냐? ”

“그냥저냥 지내요.”

“중학교생활은 으짜냐?”

“그냥 그래요.”

“젊은이가 그렇게 매가리 없어갖고 으짜까. 방학인디 뭐 하냐? 할 일 없으믄 서울에 놀러 와.”

“진짜요? 내일 당장 갈게요.”

문승협은 전화를 끓고 자기 방으로 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큰고모에게 조금만 일찍 전화 왔다면 최선경과 약속해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최대한 빨리 최선경연락처를 알아야 했다. 제갈민주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려다, 혹시나 할머니가 옆에서 듣고 서울에 못 가게 할까 봐 겁이 났다.

그 길로 제갈민주집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제갈민주가 모른다고 하였다. 문승협은 적어온 큰고모연락처를 건네며 최선경에게 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장담 못하지만 알아보겠다는 제갈민주의 대답을 듣고서야 걸음을 돌렸다.

사실 제갈민주는 최선경연락처를 알았다. 병원에 있는 최선경과 통화가 어려울 뿐 아니라, 아픈 사실을 말하기 싫다는 최선경부탁이 있었다. 더욱이 최선경엄마가 최선경치료에 심리안정이 필요하다며 신신당부하였기에 문승협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 문승협이 찾아오기 바로 전에도 최선경과 통화했었다.

제갈민주는 간절한 문승협표정을 보고 뿌리칠 수 없었다. 최선경과 문승협 둘 다 너무 불쌍하였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서로 영영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최선경에게 연락했다.


문승협은 다음날 혼자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온통 최선경생각뿐이었다.

마중 나온 큰고모를 만나자마자 자기 찾는 전화가 없었는지 물었다. 역시나 없었다는 대답에 시무룩하였다.

이튿날, 큰고모 문희숙이 어린이대공원을 가자고 했다. 문승협은 최선경전화 생각에 탐탁지 않았지만 마땅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 따라나섰다. 머릿속은 전화로 가득 찼다.

셋째 날은 남산과 창경원 동물원을 구경하였다. 손에 풍선을 들고 엄마치맛자락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들, 솜사탕을 먹으며 한복 입은 엄마손을 잡고 구경하는 아이들이 부러웠으나, 전화에 사로잡힌 건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성북동 박동후회장집에서 저녁 먹을 때도 전화에 눈이 갔다. 배부른데도 거절하지 못하고 아롱사태를 구워주는 대로 꾸역꾸역 먹다가 소화제까지 먹었다. 서울에 있는 동안 박동후회장집에서 머물라는 말에 당혹스러웠지만, 갖가지 변명을 대며 한사코 큰고모집에 있겠다고 했다.

첫날부터 큰고모와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는 최선경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민주에게 시외전화를 하여 최선경과 통화됐는지 물었다.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두리뭉실한 대답이 이상하면서도 독촉하지 못하였다. 하는 수없이 사정을 설명하고 최선경과 연락되면 아침 일찍이나 저녁 늦게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선경은 제갈민주의 첫 번째 전화를 받았을 때 문승협에게 연락할 엄두를 못 냈다. 두 번째 전화를 받고서는 문승협을 보고픈 마음에 흔들려 고심하였다.

최선경의 미국출국날이 다가오자, 문승협은 안절부절못했다. 문희숙이 여름휴가가 끝나 출근해야 한다며, 이틀 동안은 혼자서라도 어디든 다녀오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기쁜 마음으로 알아서 할 테니 전혀 신경 쓰지 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틀 동안 집에서 전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 걸려온 전화조차 없었다.

토요일 아침에도 문승협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어김없이 전화 주변을 맴돌았다. 분명 같은 서울하늘아래에 최선경이 있는데,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이 억울하기까지 하였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체념했다.

오전근무를 마치고 퇴근한 문희숙이 시무룩한 문승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심심해서 그러나 싶어 영화 보러 가자고 하였다.

문승협이 영화‘스타워즈 에피소드 4-새로운 희망’을 보려고 표를 사는 시각, 최선경은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최선경이 마지막 전화라며 엄마에게 허락받고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문희숙이 매점으로 가 문승협에게 먹고 싶은 음료를 고르라고 했다. 문승협은 단박에 최선경이 좋아하는 오란씨를 선택하였다.

최선경이 받지 않는 전화를 세 번째 걸었으나 신호만 갈 뿐이었다. 이제 출발하자는 엄마재촉에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혼잣말로 ‘안녕’이라고 문승협에게 고별인사를 했다.

문승협은 영화상영시간을 기다리며 오란씨를 마시다 쏟았다. 얼결에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최선경을 만나면 전해주려던 고하도하이킹 때 최선경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아팠다. 가슴이 너무 시큰거려 눈물이 울컥하였다. 큰고모시선을 피해 화장실로 뛰어갔다. 최선경의 손수건을 꼭 쥐며 눈물을 흘렸다.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관을 나오면서도 어떻게 영화를 봤는지 무슨 내용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문승협은 곧 개학하고 방학숙제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핑계로 다음날 목포에 내려갔다. 어둑해진 목포역에 내려 지체 없이 라이카사진관으로 갔다. 최선경의 교복모델사진을 바라보며 눈물 맺힌 미소로 최선경을 배웅했다. 마치 의식처럼 비어있는 최선경집 앞으로 갔다. 불 꺼진 창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안녕’이라고 최선경에게 송별인사를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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