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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05.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13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5)

얼어붙은 문승협마음처럼 유독 싸늘하게 느껴지는 겨울이 찾아왔다. 추운 날씨에도 동복 위에 외투착용을 금지하였다. 등교 때마다 두꺼운 외투를 벗어 가방에 쑤셔 넣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완공되었다. 서울과 지방을 자주 오가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버스업체마다 자체적으로 터미널을 운영하였기에 서울 안에서도 승객이 타고 내리는 곳이 달랐다. 서울역, 동대문역 등 서울도심곳곳에 산재해 있던 고속버스터미널을 통합한 데다, 일부노선이긴 하지만 시외버스와도 연계되어 서울교통을 책임지는 핵심 관문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특히 고속도로에 다니는 차가 많지 않아 기차보다 빠르고 고속버스운행 편과 횟수도 다양해 편리하였다.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신민당이 여당공화당을 1.1% 앞지른 승리로 유신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한미군전투부대 1진 219명이 오산기지에서 철수하면서 안보위협으로 정국이 소용돌이쳤다. 박정희대통령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11개 부처장관을 경질하는 개각을 단행했지만 최규하국무총리를 유임시켰다.

중화인민공화국실권을 잡은 등소평(덩샤오핑)이 중국경제발전개혁개방을 천명해 세계주목을 받았다.

겨울방학시작과 크리스마스연휴가 이어졌다. 세상은 만유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탄생을 축하하며 떠들썩했으나, 문승협의 크리스마스는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였다. 큰고모가 있었다면 교회라도 따라갔을 텐데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TV에서 방영되는 만화영화와 특집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낙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이틀뒤, 유신체제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힌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5번째 취임했다. 진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대중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하여 가택연금시켰다.

김대중은 문승협이 국민학교 5학년이던 1976년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함석헌·문익환·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등을 주장하는 ‘3·1 민주구국선언’, 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었다. 이듬해 3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확정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투옥에 대한 국내외 비판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정부는 통신 상용화로 시민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전국 92개 지역에 장거리자동공중전화(DDD) 5백여 대를 설치하였다. 많은 사회비판과 우려를 산 소식도 있었다. 1972년부터 1978년까지 일본인기생관광수입이 700억 원에 달하며, 정부가 애국행위라고 장려하기까지 했다는 ‘일본인기생관광’ 보도가 터져 연말뉴스를 달궜다.  


복잡다단한 정국과 사회불안을 품은 1979년 새해가 수평선 위로 떠올랐다. 현대사에 비극으로 기록될 사건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의지와 땀으로 보람찬 미래를 창조하자고 강조했음에도, 내재된 국내정치불안과 중동지역분쟁으로 널뛰는 유가에 경제조차 암울한 상황이었다.

미국이 대만과 국교단절을 감수하면서까지 30년 만에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동북아정세가 안정되리라는 소식만큼은 새해벽두뉴스 중 그나마 희망이었다.

이란혁명이 새 국면을 맞이했다. 20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시위가 있은지 한 달여 만에 이란제국 팔레비 2세가 이집트로 탈출해 사실상 망명하였다.


문승협은 온 가족과 함께 보내는 설명절이 얼마만인지 어느 명절 때보다 행복했다. 아쉬운 점은 피할 수 없는 친척들과 만남에서 아버지모습이었다. 사업실패와 이런저런 나쁜 평판으로 아버지 문경준이 의기소침하여 말수까지 줄었다. 비록 친척들에게 장남이자 가장으로서 무책임하다며 비난받고, 때론 불 같은 성질에 폭력적인 아버지언행이 두려웠지만, 당당한 아버지이길 바라며 마음속으로나마 응원하였다. 자신에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부족한 뭔가가 채워진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보호받을 수 있다는 안정감이 좋았다. 문승협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정신적 지주였으며 사랑받고 싶은 갈망이었다. 그럼에도 거의 3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다 보니 무척 낯설고 어색하였다.

설명절이 끝나자, 문경준은 혼자서 근무지인 도안광산으로 갔다. 문승협은 막냇동생 문윤아의 국민학교입학으로 엄마 이항리와 함께 생활하게 되어 기뻤다. 아버지 없는 반쪽짜리 가족생활이어도 큰 활력을 주었다.


1977년판 세계인구연감에 한국인구가 3,644만 명에 세계 22위, 서울이 세계 6위로 보고되었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나아 잘 기르자’는 정부의 산아제한정책이 더욱 탄력 받았다.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빙상선수권대회에서 스피드스케이팅선수 이영하의 500m 동메달획득은 대한민국국민들에게 위로와 자긍심을 주었다.


이항리가 문승협을 앞세우고 유선국민학교에 들러 문윤아취학서류를 제출했다. 일을 마친 뒤 선생들과 이야기 나누는 문승협을 남겨두고 집으로 갔다.

문승협은 마침 출근해 있는 엄정한선생과 오성희선생을 만났다. 엄정한선생이 중학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오성희선생은 방송부를 화제로 이야기했다. 문승협의 동기들보다 지금 방송부후배들이 못하다는 푸념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반갑게 맞아준 두 선생과 국민학교시절을 즐겁게 회상하였다. 문승협과 뗄 수 없는 최선경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서로 근황을 알지 못한 안타까움에 잠시 숙연했지만, 오성희선생과 엄정한선생이 곧 결혼한다는 깜짝 소식에 자연스레 넘어갔다.

문승협은 교무실을 나오다 여기저기 남아있는 최선경의 흔적을 느꼈다. 추억을 더듬으며 교정을 둘러보았다.

함께했던 동산벤치에 앉아 최선경을 맞이하려고 눈을 감았다. 최선경얼굴이 어슴푸레 떠오르다 쌀쌀한 바람에 흩어져버렸다. 집중에 집중을 더해 떠올렸으나, 최선경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적극 대화해 보려는 찰나, 빨리 가라고 떠미는 것처럼 싸늘한 돌풍이 불어왔다. 쫓겨나듯 동산을 내려와 쓸쓸히 교정을 빠져나갔다.

학교 앞 여기저기에도 최선경의 흔적이 남아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어이 눈물이 나와버렸다. 텔레파시대화를 나눴던 길목에서 주저앉았다. ‘죽어도 텔레파시가 있을까?’라는 최선경말이 생각났다. 지금과 달라질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모든 걸 바꿔놓고 싶었다. 두 손을 모아 텔레파시를 보내고 최선경이 받기를 기도했다. 최선경이 건강하기를 눈물로써 진심을 다하여 빌었다.

문승협은 마음을 수습하고 검도도장으로 향했다. 지난 1년간 배웠던 합기도를 그만두고 검도도장에 새로 등록하였다. 태권도에 이어 합기도도 검은띠를 따려고 했으나, 예의범절을 중시하면서 순발력과 집중력을 높이는 검도에 관심이 갔다. 생각이 많은 문승협에게 묵상시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문승협이 검도입단을 마치고 받은 죽도를 챙겨 집에 왔다. 막냇동생 문윤아가 죽도를 뺏어 들고 힘겹게 휘둘러보았다. 문승협을 쫄쫄 따라다니며 며칠째 계속 도안광산생활을 추억 삼아 자랑하였다. 주로 도안광산에서 광산소장딸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주대접을 받았기에 오빠도 잘해달라는 뜻이었다.

문윤아는 또랑또랑 말을 잘하고 낯가림이 별로 없었다. 인형처럼 예뻐서 어딜 가도 관심받았다.

문승협은 그런 막냇동생을 예뻐했을 뿐 아니라, 자주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서 많이 애착하였다. 어린 시절 같이 있을 때는 동생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동네아주머니가 장난 삼아 갓난아기 문윤아를 데려가 키우겠다고 해서, 문승협이 울며불며 안 된다고 자지러지거나, 데려간다는 사람을 때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의사표현이 분명한 문윤아를 가끔 얄미워한 적도 있었지만, 좀 더 애틋한 문현아와 마찬가지로 동생을 보호하고 사랑해 주려고 노력했다. 자란 환경이 만들어 논 오빠로서 책임감만큼은 남달랐다.


사하라사막일대에 눈이 내려 적설량 30cm를 기록하였다. 소식을 전한 프랑스앵커의 위트 있는 멘트가 웃음을 주었다. ‘다행히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사막여우는 무사하다’고 했다.

상업운전 1년도 안된 고리원전 1호기가 냉각수방사능오염으로 가동중단되어 전력난우려를 키웠다.

3∙1절에 주한미군철수를 빌미로 북한의 무력남침가능성을 감안하여 ‘팀스피릿 79 한미합동군사훈련’이 개시되었다. 팀스피릿한미합동군사훈련은 1969년부터 한반도 군사적 돌발사태에 대비해 연례적으로 실시하였다.

김대중은 가택연금 속에서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함석헌 등과 공동의장으로 재야활동을 넓혀갔다.


문승협이 국민학교에 첫 등교하는 문윤아의 왼쪽가슴에 손수건과 명찰을 옷핀으로 달아줬다. 창피하다며 손수건은 때 달라는 것을 겨우 달래 등교시켰다. 콧물을 닦도록 한 학교규칙이라는 엄포에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문윤아표정이 귀여웠다.

덕일중 못난이5형제는 2학년에 올라가면서 반이 갈렸다. ‘순딩이’ 문승협, ‘수다리’ 이정훈, ‘버텅니’ 안광호는 셋이 같은 반이었지만, ‘황눈이’ 황민과 ‘송사리’ 송귀남은 다른 반이 되었다. 문승협은 아쉬우면서도, 좋아하는 서수연선생이 담임이어서 행복한 중학생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가정생활이 암초였다.

엄마 이항리와 할머니 박옥춘 간 고부갈등이 다시 문승협을 괴롭혔다. 속옷빨래를 계기로 예상보다 시한폭탄이 빨리 터졌다. 함께 살다 보니 식사와 청소에 생활비와 식품구입 문제까지 수면으로 부상하였다. 예전보다 심각하고 빈번해졌다. 숨 쉬는 것조차 문제 될 정도로 거의 매일 갈등이었다. 두 사람은 손주와 자식들의 감정은 아랑곳없이 매사 치열하게 자기감정에 몰두했다. 지뢰밭을 걷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문승협 3남매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고부갈등이 있는 날마다, 이항리가 하교하여 집에 온 문승협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할머니 박옥춘이 손주들에게 날카롭게 눈치 주는 신경질도 예전보다 그 강도와 횟수가 날로 늘어갔다. 가족과 생활에 행복한 기대를 품은 문승협에게 가혹한 형벌이었다.

문승협은 학교가 빨리 끝나고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면 곤혹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방과 후 다녔던 과외가 없어져 눈앞이 캄캄하였다. 때마침 학교의 야간자율학습시행이 구세주로 등장했다.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져 힘들어도 감내할 이유였다.

덕일중은 고교평준화와 과외금지를 예고한 문교부시책을 고려하면서도, 만일을 대비해 야간자율학습을 전격시행하였다. 1학년교실을 사용하는 야간학교학생들이 있어서 1학년은 제외하고 2∙3학년만 시행했다.

서수연선생이 종례시간에 야간자율학습시행을 알리자, 반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월요일부터 시행하니까 잘 준비하도록, 알았니?”

“선상님, 그라믄 다음 주부터는 벤또를 두 개씩 싸와야 하까요?”

“그래야겠지, 점심과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

“선생님, 국수처럼 간단히 식사할 수 있는 교내식당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 좋은 생각이네. 내일 교무회의 때 재단에 건의해 달라고 할게.”

“선상님, 야간자율학습시간에는 뭔 공부하까요?”

“당분간은 선생님이 지정해 주는 과목을 공부한다, 곧 별도 지침이 있을 거야.”

“아따 공부하다 죽었다는 귀신은 듣도 보도 못했는디, 지가 그 귀신이 될란갑서라우.”

“호호, 제발 그럴 정도로 공부해 주라. 그리고, 언제 어디로 수학여행 가는 게 좋을지, 다들 생각해 봐.”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고 했은께, 서울로 가야제라. 롯데호텔이랑, 롯데쇼핑센턴가 뭐신가 1호 점도 열었다던디요?”

“아야 말대가리, 너는 제주로 가야겄다잉.”

“하하하.”

“그래도 역사가 있는 천년수도 경주로 가야지라. 190만 평짜리 보문관광단지인가 뭔가 개장했답디다.”

“아야, 190만평이믄 얼마나 넓은 것이어?”

“우리 집 똥깐이 딱 고만하제.”

“염병, 느그집서 똥 싸다가는 가랑구 찢어지겄다.”

“큭큭큭.”

“그래, 잘 생각해 놨다가, 다음 주 월요일 종례시간에 의견을 내도록 해.”

문승협의 담임 서수연선생은 단아하면서 연약한 체형인데 반해, 말에는 힘과 단호함이 있었다. 매사 학생들 입장에서 판단하려 하고 현명한 재치와 유머로 인기가 많았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첫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도시락준비가 미비하거나, 그동안 수동적인 공부습관 때문에 야간자율학습시간을 힘겨워하였다. 학교도 청소 후 저녁식사에서 저녁식사 후 청소로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밤늦은 시간에 하교하는 문제 등 하나씩 해결해 갔다. 그러나 학생들이 야간자율학습시간을 ‘야자’라고 줄여서 부를 정도로 적응할 무렵, 공부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이 일탈했다. 선생들도 관리감독하느라 퇴근시간이 늦어져 불만이었다. 여기저기 잠복해 있던 큰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문승협은 곧 있을 전국합창대회를 준비하느라 야자시간에는 합창연습을 하였다.

서수연선생이 교무실에서 시험문제출제를 준비하려고 교실을 비운 사이, 중학교야간학생들과 반아이들이 싸워 경찰까지 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2학년이 되면서 문승협과 같은 반이 된 강모세가 사고 쳤다.

야간자습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야간학교1학년에게 선배를 꼬나본다는 이유로 욕을 하여 시비가 붙었다. 야간학교1학년이 비록 1학년이었지만, 두 살이나 많은 나이에 욕설을 들으니 자존심 상하였다. 화장실 앞에서 앙심품고 기다렸다가 나오는 강모세를 폭행했다. 그때 화장실 주변에 있던 주간학교2학년들이 1학년 배지를 단 아이가 2학년을 폭행하자, 다 같이 합세해 야간학교1학년에게 몰매를 때렸다. 설상가상 야간학교1학년들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였다. 다음 쉬는 시간에 강모세의 교실로 몰려가 난장판을 쳤고, 이를 본 경비아저씨가 경찰서에 신고했다.

주간학교2학년과 야간학교1학년 사이에 벌어진 폭력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당직교사와 각 담임에게 지휘책임을 물을 뿐 아니라, 싸운 당사자는 물론 적극 가담자와 단순가담자를 구분하여 징계가 검토되었다. 사회공헌목적으로 시작한 야간학교수업이 재정에 도움은커녕 문제만 일으킨다는 이유로, 야간학교폐지까지 거론되며 일파만파 커졌다. 아무 죄 없는 경비아저씨마저 경찰서신고 전에 상황실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해서 재단으로부터 처벌받을 곤경에 처하였다. 학교재단 측에서 보면 학생끼리 단순 싸움이 아닌, 하마터면 주간학교와 야간학교 간에 단체패싸움으로 번질뻔한 사건이라 심각하게 여겼다.

그러나 서수연선생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면서 사건이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본인이 교실에 있었다면 애당초 발생되지 않았을 일이라며, 잘 수습한 후 어떤 징계도 감수하겠다고 했다.

서수연선생은 먼저 사건재발방지책을 강구하였다. 야간학교화장실을 주간학교1학년화장실로만 사용을 제한하여 야자시간에 서로 부딪히지 않게 분리했다. 사건사고발생 시 대응매뉴얼과 경비매뉴얼을 구비하였다.

그렇게 잘 해결되는듯하더니 다시 문제가 생겼다. 야간학교학생들이 화장실이용제한을 야간학생이라 무시하는 차별이라며 반발했다. 이에 서수연선생이 직접 설득하기에 이르렀고, 문승협은 반장이라는 명목으로 동참하였다. 사실 반장이라서 참여한다기보다 서수연선생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함께했다.

야간학교학생들은 대부분 집안형편이 어려워 주경야독하는 착한 학생들이었지만, 일반주간학교를 다니다 사건사고를 일으켜 야간학교에 다니는 문제학생들도 많았다.

“차별이라고 느꼈다니 미안해요, 하지만 야간학교를 차별할 의도는 전혀 없어요. 실질적인 재발방지는 안 싸우는 방법밖에 없는데, 여러분이 책임지고 장담할 수 있겠어요?”

“큭큭, 책임? 장담? 우린 못하제.”

“학교와 재단에서는 명찰색상으로 구분하자고 했어요. 주간과 야간의 수업이 다르고 학생들 나이도 다른데, 서로 구별이 안되니 선후배관계를 오인해 싸웠다는 거죠. 이것은 진짜 차별이라, 제가 안 된다고 막았습니다.”

“그라믄 다른 것은 냅두고, 학년뺏지만 아라비아숫자로 다르게 하믄 될 거 같은디?”

“저기요,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 선생님은 존대하는데 왜 반말하세요?”

“승협아, 괜찮아, 가만있어.”

“옴마, 저 싸가지없는 새끼 눈깔 봐라잉. 째깐한 새끼가 어따 대고 눈알을 부라려?”

“야, 너 싸우려고 여기 왔냐, 너야말로 어따 대고 욕질이야?”

“…….”

“내 제자에게 함부로 말하면 가만 안 둔다, 알았어?”

“…….”

“서선생님 미안하요, 제가 주의 주께라우.”

문승협이 불손한태도로 반말을 일삼는 야간학교학생에게 예의를 갖춰달라고 하였으나, 도리어 욕을 하며 겁을 줬다. 이를 목도한 서수연선생이 큰소리로 단호하게 호통쳤다. 야간학교학생들이 예상치 못한 태도에 놀라 주섬주섬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야간학교선생이 대신 사과했다.

문승협은 카리스마 넘친 서수연선생모습에 놀랐지만 순간 반해버렸다.

서수연선생이 냉정을 찾아 다시 설명하였다. 야간학교학생들은 대답이 없었다. 문승협이 정적을 깼다.

“지금 야간학교학생들이 화장실이용구분을 차별이라고 반대하는 이유는, 주간학생과 야간학생이 구별되는 게 싫어서 아닌가요?”

“그라제, 칙간이 주간생 따로 야간생 따로 있가니?”

“하지만 화장실은 학년별 이용화장실이 정해진 것처럼, 주간과 야간을 떠나 지금도 구분되어 있어요. 학교 내에서만 서로 편의에 따라 사용하자는 건데, 그걸 차별이라니 이해가 어렵네요. 그런데 학교와 재단의 말대로 명찰색상을 구분하면 곧 외부에 소문날 것이고, 그러면 학교 밖에서 주간학생인지 야간학생인지 다 알 텐데요? 학년뺏지를 아라비아숫자로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진짜 차별이고 구별 아닌가요?”

“…….”

“그리고 솔직히 학년뺏지에 의미를 두는 지도 궁금하네요. 야간학교학생들은 방과 후에 창피하다면서 학년뺏지를 다 떼고 다니잖아요, 안 그래요?”

“…….”

“우리 선생님은 외부시선에 차별받는 야간학교학생을 많이 걱정했어요. 그래서 외관상 구분이 안 되게 하고, 화장실만 따로 사용하여 서로 부딪히지 않게 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야간학교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수연선생의견에 따르겠다며 불손했던 자신들의 행동을 사과하였다. 비로소 서수연선생과 문승협은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나왔다.

“승협이 제법인데?”

“제가요? 뭐 한 게 없는데요?”

“호호, 순한 줄로만 알았더니 제법 화도 내줄 알고, 침착하게 설명도 잘했어.”

“하하, 아녜요, 저는 선생님이 진짜 멋있었어요.”

“승협아, 나 엄청 청순가련한 여자야. 오늘 본 것은 잊어, 알았지?”

“하하하, 원더우먼이나 소머즈 같았어요.”

“야, 내가 좀 더 예쁘지 않냐?”

“네?”

“호호호, 너 그렇게 놀라기 있어?”

서수연선생이 야간학교학생들 의견과 면담내용을 학교와 재단에 보고했다. 학교와 재단은 화장실구분사용과 야간학교학생들 요구대로 학년배지를 바꾸라고 지시하였다. 야간학교학생들은 서수연선생말을 무시한 자업자득이라며 뒤늦게 후회했지만, 학교와 재단이 결정한 사항을 바꿀 순 없었다.

서수연선생은 이와 별개로 학교재단이 검토 중인 야간학교폐지를 무마하려고 나섰다. 한동은행 목포은행장인 아버지에게 은행의 사회적 책임과 공헌을 명목으로 야간학교 장학사업과 재정기부를 설득했다. 야간학교학생들에게 배움의 권리가 이어지도록 각계에 성원을 요청해 달라고 하였다. 아울러 사건을 학교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경찰서장에게 힘써달라는 부탁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는 학생들 징계를 최대한 경감시켜 보려는 고육지책이었다. 강모세와 야간학교1학년은 퇴학 수준, 적극가담자는 정학 3개월 이상, 단순가담자도 정학 1개월 정도로 중징계가 예상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근신처분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데다 정학기간이 수업일수 1/3 이상이면 유급될 위기였다. 학생들을 최대한 구제하려면 아무래도 학교내부적인 논의여야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서수연선생의 아버지는 평소 배려 깊은 사랑스러운 외동딸의 부탁이기도 하였지만, 합리합당한 일을 생각해 낸 딸이 기특하여 발 벗고 나섰다. 다행히 각계각층으로부터 응답받아 곧 큰 성과로 이어졌다. 경찰서장에게도 선처해 달라고도 요청하였다.

야간학교학생들도 서수연선생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반성과 재발방지에 노력하겠다는 연판장에 서명하여 학교와 재단에 제출했다.

학교와 재단은 고심 끝에 강모세와 야간학교1학년은 정학 1개월, 적극가담자는 근신 2주, 단순가담자는 근신 1주, 당직교사는 경고, 두 담임은 1개월 감봉처분을 내렸고, 야간학교는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징계가 약하진 않았으나, 경중을 떠나 재단 내 4개 학교뿐 아니라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져 경각심을 주었다.

덕분에 청소와 작업을 하거나 복도 책상에 앉아 근신처분받은 학생들이 친구들 놀림에도 경건하게 수행했다.

이 사건으로 주간학교와 야간학교 학생들 간에 위화감이 줄어드는 계기가 되었고, 서수연선생이 더욱 많은 학생들에게 존경받았다.


강모세가 징계를 마치고 등교한 날 야자시간이었다. 서수연선생이 매점에서 사 온 바나나우유와 단팥빵을 반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한마디 하였다.

“우리가 늘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주 작은 사소한 이유로도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서다. 특히 남에게는 더욱 그래, 남의 인생까지 흔들면 곤란하지. 그렇다고 혼자만 잘해서는 성공할 수 없어, 그래서 인생이 힘들다. 혼자만 잘해서 성공한다면, 이 세상은 온통 성공한 사람들일 거야.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바르게 살면서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맛있게 먹으면서 한번 생각해 봐. 강모세, 다시 등교한 거 축하한다.”

서수연선생이 말을 마치자마자 빵봉지 뜯는 소리가 요란했다. 반아이들이 빵을 눈앞에 두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왜 하냐는 듯 허겁지겁 먹었다. 문승협도 다를 바 없었다.

서수연선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문승협과 반아이들은 빵을 먹으면서도 바르게 살면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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