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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04.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12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4)

2학기 개학을 앞두고 세탁한 하복과 다리미를 꺼냈다. 겨울철 동복보다 얇아 다림질이 쉬웠다. 하복상의 등과 앞가슴에 칼 줄을 잡아 멋 내는 재미가 있었고, 손이 가는 귀찮음은 덤이었다. 칼 줄을 잡는 데도 선배들이 만든 불문율이 있었다. 3학년은 몇 줄을 잡아도 상관없지만, 1학년은 한 줄, 2학년은 두 줄을 잡았다. 1학년이 두 줄이나 세 줄을 잡으면 선배들에게 불려 가 건방지다고 혼났다.

원래 하복을 입을 때도 검은색동복모자를 썼으나, 올해부터 하복상의와 같은 파란색하복모자를 새로이 착용하게 되었다. 하복모자는 통풍이 잘되어 시원한 데다 동복모자에 비할 바 없이 가벼워 좋았다. 동복모자와 다르게 하복모자는 모자윗부분을 다림질이나 손으로 각을 잡았다. 2∙3학년은 모자차양을 둥그렇게 구부려 멋을 부렸다. 1학년이 각을 잡거나 차양을 구부리면 이 또한 불문율로 선배들에게 호되게 야단맞았다.


중동에서 이란혁명이 본격화되었다. 5월 중순 이란제국 테헤란 대학교학생들 중심의 반정부시위가 시작이었다. 8월에는 테헤란에서 군경이 대규모로 발포해 477명이 숨졌다. 이를 계기로 시위대와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9월 8일 테헤란동부에서 대규모시위가 일어났다. 이란군이 테헤란에서 시위대에 재차 발포하여 122명이 죽고 4,000명 여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검은 금요일로 불렸다. 군경의 유혈진압은 시위대의 분노만 샀다. 팔라비 2세 국왕이 여러 가지 개혁안을 발표하였지만, 이미 민심이반으로 불만이 터질 때로 터진 국민들과 왕당파를 제외한 이슬람주의파와 공화주의파 등 각 정파세력들은 국왕의 개혁안에 찬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라비 2세 국왕의 즉각 퇴진과 왕정폐지를 주장했다. 이외에도 민주적 다당제에 입각한 새총선실시와 국왕권력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로 개헌, 언론자유허용, 정치범사면, 세금감면, 사바크해체, 실업자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 등을 요구하였다. 세계정치전문가들은 팔레비 2세 국왕을 이란제국 마지막왕조로 예상하고 머지않아 돈, 보석, 금을 챙겨 이집트로의 망명을 점쳤다.

요한바오로 1세가 263대 교황으로 즉위한 지 33일 만에 서거했다. 그가 사망한 채 발견됐을 때 교황방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사인은 침대에서 개인적인 원고를 읽던 중 심장마비였다. 갑작스럽게 서거한 데다, 바티칸은행정리와 교황청유력인사들을 좌천시켜 ‘인간생명’을 개정하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독살되었다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입증되진 않았다. 겸손한 그는 허세와 허례허식을 철저히 배격하여 화려한 전통적 교황대관식을 생략했고, 성베드로광장에서 팔리움을 받아 최고목자로서 시작하였다. 명백한 노동자계급출신 첫 교황으로 현실적이고 상식적이면서 친근한 미소로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했던 그가 오랫동안 살았다면 어떤 정책들을 추구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10월 연휴가 낀 가을날, 덕일중보이스카우트와 인혜여중걸스카우트가 연합하여 영산강하구언으로 하이킹을 다녀왔다. 문승협은 환절기감기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다.

얼마 후 매듭법과 독도법 등 실내연합교육에서 홍지아를 만났다. 홍지아는 말괄량이 기질에 직선적이었고, 선배남녀 가림 없이 편하게 대하며 감정표현 또한 솔직하였다.

“야, 문승협.”

“어, 홍지아.”

“잘 있었냐?”

“응, 너는?”

“나야 항시 씩씩하제. 근디, 너 서예는 그만뒀냐?”

“응, 큰고모가 결혼하고 그만두면서 해방됐어. 넌?”

“나는 아직 다니기는 한디, 언제 그만둘란가 몰라.”

“왜?”

“재밌기는 한디, 니가 없은께 흥미가 떨어지드라.”

“하하, 근데 너 인혜여중 다녔어?”

“아따 섭하다. 나는 오다가다 너를 무자게 많이 봤는디, 너는 나를 못 봤는갑다잉.”

“그래?”

“그람, 매점서도 보고, 학교 앞 교통정리 때도 보고.”

“매점에서?”

“느그 여선상님 하고 빵 묵으로 왔던 날, 그 선경이 본 날 말이어, 그때 나도 있었어야.”

“아, 그랬구나.”

“그라고, 선경이 집 앞서도 몇 번 봤제.”

“선경이 집?”

“잉, 선경이네 집 건너 건너가 우리 집이잖애.”

홍지아가 최선경집 앞을 말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알고 있지만 비밀로 해주겠다는 듯 입을 실룩거리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스카우트연합교육이 시작되면서 따로따로 앉았다. 홍지아가 쉬는 시간에 문승협에게 다가갔다.

“최선경이 미국 갔다던디, 맞냐?”

“…….”

“대답 없는 거 본께 맞그만. 그라믄, 너 인자 임자 없겄다잉?”

“임자라니?”

“호호호, 아니어. 혹시, 남자가 수절하거나 그러진 않겄제?”

“수절?”

“호호, 인자 우리 자주보자잉.”

문승협은 홍지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최선경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교육이 다 끝나고, 선배들이 예쁜 외모에 활달한 홍지아에게 관심을 보였다. 문승협에게 소개해달라고 하자, 홍지아가 멀리서 듣고는 폭탄발언을 하였다.

“오빠들, 나 임자 있은께 껄떡대지 마쑈. 그라고 언니들, 저그 문승협 있지라, 내 깍진께 눈길도 주지마쑈잉.”

“호호호, 아야, 또래도 아니고 아그를 뭐 한다고야.”

“그라요? 그라믄 다행이고라. 친구들아, 느그도 마찬가지다잉.”

“야 홍지아, 너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

“으짠대? 나도 지키고 선경이도 지킨 것인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건께,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들어.”

문승협은 졸지에 홍지아와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소문이 날개를 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민주가 지나가는 문승협에게 ‘썩을 시끼’라며 째려보고 갔다. 문승협이 해명하려 쫓아갔으나, 제갈민주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난감한 상황이지만 사실과 다르기에 곧 오해가 해소되리라 믿었다.


며칠 뒤 점심시간에 양자경음악선생이 못난이5형제를 음악실로 불렀다.

“승협아, 너 인혜여중1학년 홍지아랑 뭔 사이냐?”

“아, 저희 큰고모랑 홍지아고모랑 아는 사이예요, 작년겨울에 서예학원에서 처음 봤어요. 왜요?”

“느그 둘이 집안끼리 혼약했다고 하드라? 매점에서 들었는디, 인혜여중에 소문이 파다하대.”

“네? 하하하, 아직 결혼한다는 소문은 안 났으니 다행이네요.”

“결혼?”

문승협은 정색하면 더 오해받을까 봐 헛소문이라는 듯 웃었으나, 양자경선생과 못난이형제들 4명까지 5명이 동시에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멋쩍었다.

“아야, 제수씨가 우리 같은 천방지축 서방님이 네 명이나 있는 줄은 아냐?”

“긍께 말이어, 당장 약혼파토 내자고 방방 뜨는 거 아니어? 큭큭큭.”

“킥킥킥, 승협이 으짜스까잉, 우리 땜시 약혼이고 뭐고 다 조져 부렀네.”

“이 철딱서니 없는 아그들아, 선상님 계신께 가정사는 이따가 논하자잉.”

“호호호, 느그들 승협이 놀란 거 봤냐? 승협아, 그런 소문은 항시 거짓갈로 판명난께, 신경 꺼 부러. 본시, 가시나들이 남 말하기 좋아한께 그런 것이어.”

“네 선생님, 선생님 그거 진짜 헛소문이에요.”

“알았어, 알았단께. 오늘 선상님이 느그들 부른 것은, 중대한 공지가 있어서여.”

못난이형제가 농담조로 한 마디씩 했고, 양자경선생이 소문에 신경 쓰지 마라며 본론을 이야기하였다.

목포시주최 합창대회가 예정되었다. 11월 9일 예선을 거쳐 다음날 본선이고, 동요와 가곡만 가능했다. 못난이5형제를 포함한 1학년 30명 정도를 주축으로 덕일중학교합창단을 조직하여 참가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수상한 합창단에게는 전국대회참가자격을 준다면서, 오디션도 하고 추천도 받으니 적극적 홍보를 당부했다. 무엇보다 어떤 곡을 할지 잘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양자경선생이 못난이5형제에게 합창단을 주동하라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1학기 초 음악시간에 가르쳐준 가곡‘봄처녀’를 교단 앞에 세워 합창시켰다. 다섯이서 스스로 만들어 부르는 화음이 상상이상이었다.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수준급이어서 깜짝 놀랐다. 반아이들마저도 감탄했었다. 실기뿐 아니라 필기시험에서도 다 100점을 받아서 예뻐했다.

서수연국어선생이 못난이5형제라는 애칭을 붙여준 발단도 비슷하였다. 빡빡머리에 까만 교복을 입고 고만고만한 키의 다섯 학생이 멋들어지게 합창하는 것을 우연찮게 보고 감동했다. 반친구들도 꼬마5형제라며 놀리던 것을 못난이5형제로 부르면서 두루통용되었다. 못난이5형제끼리 친해진 계기였다.

수달을 닮고 말이 많아서 별명이 ‘수다리’인 이정훈, 소처럼 눈이 커서 ‘황눈이’인 황민, 버드렁니가 있어 ‘버텅니’인 안광호, 조용히 재빨리 움직여서 ‘송사리’인 송귀남,  순둥순둥하다 해서 ‘순딩이 또는 서울놈’인 문승협까지 다섯 명이었다.


양자경선생이 한 달 내에 3곡을 연습해 완성하려면 서둘러야 한다며, 대회까지 매일 점심시간에 모이라고 하였다. 보름 뒤에 인혜여중고합창단과 평가시간이 있다는 계획도 알려줬다.

“아야, 제수씨랑 우리 언제 상견례하냐?”

“하하하, 큭큭큭.”

“못난이들이 시간 잡아라, 우리 색시 바쁘다.”

양자경선생의 설명을 끝으로 모두 일어나는데, 이정훈이 다시 홍지아이야기를 꺼냈다. 나머지아이들이 웃음으로 동조했고, 문승협도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다음날 점심시간에는 선곡하느라 바빴다. 동요는 ‘오빠 생각, 금강산, 푸르다’, 가곡은 ‘별, 비목, 그리운 금강산’으로 압축되었다. 방과 후 시간에는 오디션을 치르느라 바빴다.

최종 오디션이 끝나고, 세 가지 음역대로 34명을 뽑았으며, 상황에 따라 27명으로 줄이기로 하였다. 문승협은 변성기가 오지 않은 미성으로 테너를 담당했고, 황민과 안광호는 바리톤을, 이정훈과 송귀남은 변성기에 굵직한 목소리로 베이스를 맡았다.

대회합창곡도 몇 번씩 불러본 뒤 동요‘오빠 생각, 금강산’과 가곡‘별’을 선정하였다. 매일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본격적인 합창연습이 시작되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방과 후 연습 때는 교장교감과 학생주임 등 선생들이 돌아가며 위문삼아 빵과 우유를 사 왔다. 서수연선생도 먹거리를 사 와 연습이 끝나는 늦은 시간까지 함께해 주었다.


올해만 세 번째 바뀐 264대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즉위한 날, 인혜여중고와 합동평가시간을 갖었다.

재단 4개 학교 중에 합창단이 없는 덕일고를 제외한 3개 학교가 참여하였다. 재단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대강당이 아닌 재단소유의 교회에서 열렸다.

3개 학교 합창단이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이성간접촉을 엄격히 제한해 남녀학교가 거리를 두고 따로 앉았다. 여기저기서 음정을 잡거나 목소리를 가다듬느라 웅성거렸다.

인혜여중합창단에 홍지아가 있었다. 몇 명이 홍지아를 중심으로 이야기 나누면서 문승협 쪽을 쳐다보았다. 간혹 손으로 가리키거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못난이형제 4명은 누가 홍지아인지 몰라 조용했다.

4개 학교 교장교감과 음악선생들이 들어오고, 재단 이사장과 간부들이 착석하면서 합창단평가가 시작되었다. 합창발표순서는 인혜여중, 덕일중, 인혜여고 순이었다.

인혜여중에 이어 덕일중합창발표가 끝났다. 여학생합창은 익숙하게 들어온 반면 남학생합창을 처음 접하는 내빈들이 많아서 장내가 술렁였다. 고음은 오히려 더 여성스러우면서도 힘 있는 화음이 훌륭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인혜여고합창이 준비되면서 다시 정숙하였다.

문승협은 화장실에 가려고 살며시 나왔다.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문을 여는데, 옆 여자화장실에서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홍지아와 제갈민주의 목소리였다. 둘 사이에서 문승협이름이 오르내렸다. 무슨 말인지 궁금해 양쪽 화장실문 중간 벽에 기대어 귀 기울였다.

“니가 승협이 짝지라고 했다믄서 뭔 딴소리여?”

“내가 한 건 맞은디, 그것이 아니란께.”

“그란께 뭐시 그것이 아니냐고.”

“아따 환장하겄네, 들리는 것만 듣지 말고, 생각 좀 해라 쫌.”

“염불 하네 진짜, 느그 둘, 내가 가만 안 둘 것이어.”

“민주야, 니가 선경이 친한 친군께 내가 참는다잉.”

“참지 말어, 니가 뭔디?”

“내가 한 가지만 말하께. 승협이를 내 짝지라고 한 것은 사실 이어, 근디, 그라고 난 후로 선경이 나쁜 소문은 으짜디? 싹 다 사라져부렀어, 안 그냐? 실은 나도 승협이 좋아해, 그란디, 승협이는 여전히 선경이만 생각하드라. 승협이가 울믄서 선경이네 집 앞에 있는 것을, 내가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봤어.”

“…….”

“아따 내가 말 안 할라고 했는디. 내 짝지란 말이 돌믄, 승협이가 선경이 생각을 좀 덜하지 않으까 싶었다. 선경이는 미국 가부렀는디, 맨날 선경이만 붙잡고 있으믄 쓰겄냐?”

“…….”

“참말로 선경이가 부럽다야, 너랑 승협이랑 좋은 친구를 둘이나 둬서, 허벌나게 부럽단께.”

“지아야, 내가 시방 망치로 뒤통수 맞은 멩키로 얼떨떨하다야. 미안한디, 사과는 나중에 하께.”

“사과는 너나 묵어, 나는 사과 안 좋아 한께. 쓸데없이 사과할 필요 없단 말이어.”

문승협은 홍지아말을 듣고 생각했다. 보육원에서 이진구가 말한 소문뿐 아니라, 최선경에 대한 나쁜 소문들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것도 홍지아가 짝지라고 선포한 이후였다. 소문을 소문으로 덮은 홍지아가 달리 보였다. 문승협이 소문걱정에 짝지라는 말을 하면 어떡하냐고 따졌을 때, 홍지아가 반문했던 말도 기억났다.

‘으짠대? 나도 지키고 선경이도 지킨 것인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건께,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들어.’

제갈민주와 홍지아가 화장실을 나오다 문승협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홍지아는 얼굴이 빨개졌고, 제갈민주는 무안해서 몸 둘 바 몰라하였다.

“아따 승협이 너, 아까 독창 부른디 멋져불드라잉.”

“지아야, 주제넘지 마라고 말할뻔했는데, 네 마음이 그런 줄 몰랐어. 고마워.”

“뭔 소리여, 나는 국어를 잘해서 주제파악 잘한께, 그런 말은 넣어둬.”

“민주야, 넌 여기 어떻게 온 거야?”

“아, 니가 합창단이라고 해서 궁금해갖고. 승협아, 으짜까 미안해서.”

“뭐가?”

“저번에 썩을 시끼라고 욕한 것이 맘에 걸린다야.”

“지난 일인데 뭐. 다음부턴 그런 일 있으면, 내 말 끝까지 들어줘.”

“잉, 그라께.”

문승협이 합창평가 중인 예배당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인혜여고합창이 끝나가고 있었다.

인혜여중고는 전통 있는 정상급합창단으로 기대 수준이 높아 많은 칭찬을 듣지 못했지만, 신생합창단인 덕일중은 의외의 격찬으로 많은 지원약속과 큰 기대를 받았다.


1974년 제1땅굴과 1975년 제2땅굴에 이은 제3땅굴을 발견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전해졌다.

제3땅굴은 북한귀순자의 땅굴공사 첩보를 근거로 탐색하던 중, 땅굴징후를 보고받은 전두환 제1보병사단장이 주변지역에서 역갱도굴착공사를 실시해 발견하였다. DMZ 남쪽 400m, 판문점 남방 4km 지점이었고, 너비와 높이 2m 아치형 구조로 길이 1.6km에 깊이 73m, 1시간에 3만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서울에서 44km 지점에 발견된 가장 가까운 땅굴로, 규모 면에서는 다른 땅굴과 비슷하나, 서울을 침투하는 데 있어 훨씬 위협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라전체가 국가안보위협에 잔뜩 긴장한 상황에서 합창대회마지막점검시간을 갖었다.

문승협은 최종점검연습 전 매점을 다녀왔다. 그런데 연습이 시작됐음에도 생각에 빠져 집중하지 못했다.

매점 가는 길에 마주친 제갈민주가 홍지아를 괜찮은 아이라며 최선경을 잊으라고 하였다. 뜬금없는 말에 무슨 뜻인지 곱씹어 봤지만 잘 납득되지 않았다.

인혜여중합창단이 합창점검에 들어갔다. 문승협은 합창에 열중하는 해맑은 홍지아모습이 이전과 다르게 눈에 띄었다. 의외의 내면세계를 갖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지아가 합창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다 문승협에게 윙크를 했다. 주위시선을 피해 손을 흔드는 여유도 있었다. 당황하는 문승협을 보고 즐겼다. 문승협은 상상할 수 없는 대범함이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최초 발족된 이틀 뒤, 목포시립문화회관은 합창대회예선에 참가하려는 학생과 관계자로 붐볐다. 문승협은 국민학교 동창이자 같은 방송부였던 김진철을 만났다.

“승협아, 오랜만이다.”

“진철아, 잘 있었어? 진짜 오랜만이다.”

“합창대회에 참가하러 온 거야?”

“응, 어쩌다 그렇게 됐네. 너는?”

“우리도 이번에 합창단을 급조해서 참가하게 됐어.”

“아마, 남자중고등학교는 다 마찬가질 걸? 시에서 압력 넣고, 교육청지시도 있었다더라.”

“어쩐지, 학교에서 참가가 목적이라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네.”

“참, 철종이는 잘 있니?”

“응, 나랑 다른 반이라 가끔 지나가다가 봐. 둘이 단짝이었는데, 잘 안 만나?”

“그러게, 학교가 다르니까 만나기 쉽지 않네. 철종이 만나면, 보고 싶어 하더라고 전해줘.”

“알았어. 근데, 너 저 여자애 알아? 아까부터 자꾸 이쪽을 쳐다보네.”

“아, 홍지아라고 있잖아, 국민학교가 달라 모르나?”

“너는 쟤 알아?”

“응, 인혜여중이잖아, 우리 학교하고 같은 재단.”

“아, 뺏지 보니까 그러네. 어, 손을 흔드는데?”

홍지아가 시립문화회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문승협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먼발치에서 문승협과 김진철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문승협과 시선이 마주치자 다가갔다.

“승협아, 이거 마셔, 오란씨여. 생 달걀 갖고 올라다 참았다잉, 응원하께.”

“고 고마워, 너도 잘해라.”

문승협이 총총히 가는 홍지아를 바라보았다. 김진철이 갑자기 최선경에 대해 물었다.

“참, 최선경은 요즘 어때? 연락해?”

“진철아, 선생님이 부르셔서 가야겠다, 또 보자.”

문승협이 선뜻 대답을 못하는 차에, 양자경선생이 문승협을 부르며 빨리 오라고 손짓하였다. 문승협은 핑계 삼아 얼른 뛰어갔으나 손에 든 오란씨가 신경 쓰였다.

다음 두 번째가 덕일중의 합창예선순서였다. 양자경선생이 인솔하여 대기실로 이동했다. 문승협이 오란씨를 자꾸 탐내는 이정훈에게 마시라고 주었다. 문득 홍지아가 다른 음료도 아닌 최선경이 좋아하는 오란씨를 준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된 선택인지 궁금해졌다.

하루종일 치러진 합창예선이 다 끝난 후, 문화회관 앞 게시판에 본선진출 10개 학교명단이 붙었다. 덕일중을 비롯한 인혜여중고까지 본선에 진출하였다. 덕일학원재단은 소속 3개 학교 모두 본선진출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본선경연순서는 혹시 하는 의심이 있어 무작위추첨으로 정했다.

다음 날 본선 마지막순서인 덕일중합창이 끝나자, 관객들이 뜨거운 호응과 박수를 보냈다. 이어진 심사평에서 문승협독창이 포함된 가곡‘별’은 잔잔한 감동을, 가벼운 율동과 함께 부른 동요‘금강산’은 재미를, 동요‘오빠 생각’은 환상적 화음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덕일중합창단 모두 기쁜 마음으로 줄 서서 무대를 퇴장하였다.

합창경연 내내 꽃다발을 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홍지아가 단상으로 올라와 문승협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문승협은 줄줄이 뒤따라 퇴장하다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주목받는 것이 창피하여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최종심사결과 금상은 인혜여고가, 은상은 인혜여중과 목화여중이, 동상은 덕일중과 중앙여중, 제원여고가 받았다. 본선진출 발표 때부터 심사에 의심을 품었던 사람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호평으로 파란을 일으킨 덕일중이 동상을 받자 조용해졌다. 덕일학원재단은 인혜여중고에 이어 남자학교로는 유일하게 덕일중이 수상하는 경사를 맞았다. 덕일학원재단에서 참가한 3개 학교가 모두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또한 내년 서울에서 개최예정인 문교부주최 전국합창대회에는 인혜여고와 덕일중이 참가키로 결정되었다. 각 시를 대표하여 남녀 각각 1개 학교만 참가토록 한 규정 때문이었다. 모든 시상식이 끝나고 뿔뿔이 해산하였다.

문승협이 꽃다발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검은색세단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홍지아가 내렸다.

“뭔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대답이 없으까.”

“못 들었어.”

“호호, 문화회관에서 한참 찾았다야.”

“왜?”

“왜는 왜여, 집방향이 같은께 같이 차 타고 갈라고 그랬제. 일로 와바, 우리 엄마한테 인사해. 어머니, 저의 서방님이신 문승협이어라, 인사 올리께요.”

“지아야, 그게 뭐야, 말 좀 조신하게 해.”

“아따 이보다 얼만큼 더 잘하라고 그라요. 뭐더냐, 빨리 인사드리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문승협입니다.”

“응 그래, 네가 승협이구나? 지아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공부도 노래도 잘한다면서?”

“아녜요, 다 그만그만해요.”

“호호, 겸손하기는. 언제든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와, 집도 가까운데.”

“네?”

“아따 머시마가 놀라기는. 엄마 먼저 가쑈, 나는 싸목싸목 승협이랑 걸어 갈란께.”

“지아가 좀 말괄량이여도, 남자한테 관심은 네가 처음이야.”

“네?”

“아 아니어. 아따 엄마, 언능 가란께요. 아저씨, 빨리 오라이.”

“지아야, 제발 사투리 좀 그만 써라, 그렇게 입이 닿도록 말해도 그러냐.”

“네 어머니, 잘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세요, 소녀는 곧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래, 승협인 다음에 또 보자.”

“안녕히 가세요.”

홍지아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 유리창을 올리자, 운전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나나 우리 엄마가 아까침에 한 말은 염두하지 말어라잉, 그 정도로 소심하진 않제?”

“무슨 말?”

“모르믄 됐어. 근디 모른단께 으째 이리 서운하까.”

“하하, 지아야, 너만의 언어를 사용하면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

“뭐시어, 내가 시방 쏘련 말해서 모른단 말이여?”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라믄, 선경이는 첨부터 너랑 같은 서울말을 써서 그랬냐?”

“어?”

“미 미안, 나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와부렀다야. 미안해, 선경이 말은 취소할란다.”

“…….”

“첨부터 맘이 통한 사람이 어딨다냐, 대화하믄서 알아가는 것이제.”

“오란씨 말이야. 합창대회 예선 때, 오란씨는 어떻게 사 온 거야? 다른 음료도 많은데, 왜 하필.”

“…….”

“대답 없는 이유는 있겠지?”

“잉, 이유야 있제. 제갈민주한테 선경이가 좋아한다고 들었어, 나도 선경이처럼 오란씨 좋아하고.”

“…….”

“아따, 오늘따라 내가 으째 이리 예민하까잉.”

“아냐, 내가 예민한 거 같다, 미안. 나도 오란씨 좋아해, 이 꽃다발도 고맙고.”

“그렇게 말해준께 내가 다 고맙다야, 설사 희망고문이어도 기분은 좋다.”

옥신각신 이야기를 나누다 홍지아집에 다다랐다. 서로 잘 가라는 인사로 헤어졌다.

홍지아는 집에 들어가 대문을 닫고 문에 기대어 섰다. 움직이는 문승협의 발걸음소리에 귀 기울였다. 혹시나 했던 최선경집 방향이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문승협은 자신도 모르게 최선경집 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바라봤다. 허전한 마음처럼 여전히 비워져 있는 집을 확인하였다. 다음 주 일요일이 최선경생일임을 떠올렸다.

문승협이 최선경집을 떠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홍지아는 그제야 집안으로 들어갔다.

동생 문현아가 오빠만 오길 목 빼고 있었다. 문승협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들기 무섭게 합창대회 이모저모를 꼬치꼬치 물었다. 문승협은 귀찮았지만 하나하나 대답해 줬다. 문현아의 숙제를 봐주고 나서야 잠자리에 누웠다. 창문을 통해 방바닥에 드리워진 달빛을 만지다 잠들었다.

‘선경아! 난 언제나 도망쳤지만, 이제 도망치지 않고 지켜야 할 게 생겼어, 바로 너야!’

‘승협아! 누구도 운명을 바꿀 순 없으나, 운명을 기다리느냐 맞서느냐는 선택할 수 있어!’

한동안 출연하지 않았던 최선경꿈이었다. 문승협은 꿈속에서라도 오래 보려는 욕심에 억지로 계속 참을 청했다. 그럴수록 의식은 또렷해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사라져 버린 최선경얼굴을 기억해 내려했지만 꿈조차 무슨 내용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미국으로 떠난 지 3개월이 넘었는데, 최선경에게서 편지는 오지 않았다. 어떤 소식도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저녁을 먹은 후 최선경집 앞으로 갔다. 문승협을 반기는 것은 변함없이 불 꺼진 창뿐이었다. 함께 보냈던 지난날의 최선경생일을 떠올리며, 그렇게 혼자 최선경생일을 기념했다. 어디선가 최선경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협아! 웃어봐, 웃으면 두려움도 사라져. 넌 있는 그대로 훌륭한 아이야, 잊지 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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