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잔머리는 대륙과 땅을 가리지 않나 보다.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해 입국 심사 대기선에 들어선 순간 술수를 써야 할 때라는 직감이 왔다. 에버랜드 인기 어트랙션인 사파리 대기 줄처럼 높은 인구밀도를 보자 나를 건져줄 사람을 찾아 재빨리 스캔했다. 그때 마침 전방 6미터에서 다가오는 여직원. 그에게 지체 없이 다가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하이즈 파 샤오. (아이가 열이 나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둘째 녀석이 약간의 열과 함께 몸살 증세로 약을 먹었고, 단지 당장이라도 빠져나가지 않으면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을 뿐.
자연스러운 중국어 덕분에 1시간 대기를 1분 컷으로 줄인 나는 럭키드로우를 폭망하고 나서야 잔머리로 운발을 날렸구나 싶었다. 자고로 운이란 것은 '될 일은 된다'라는 믿음과 여유롭고 충만한 마음의 집에 드나드는 법인데, 불안과 초조함에 떠밀려 모든 걸 서둘러 처리하려 했으니, 어쩌면 가졌을 수도 있는 최대치의 행복(60만 원)을 놓쳤다 한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3명 모두 꽝일 수 있어? 럭키드로우 실패 후,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실망감에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진공 상태가 지속되었다.
'일단 환전부터 하자!'
실망을 딛고 현실로 복귀한 건 마냥 시간을 흘려보내지 못하는 기질 덕분이렸다. 몇 년 전 치앙마이 공항에서 200 달러를 환전했다가 시세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을 수령했던 경험이 있기에 '공항 환전 = 호구'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남들 다 만들고 온다는 트레블 월렛 카드는 말할 것도 없고 여행자 보험 하나 가입하지 않은 나이니까. 여행 준비하는 과정이 귀찮고 번거로우면 돈을 더 쓰면 된다. 가심비, 가성비 따위는 한국으로 돌아갈 때나 챙기고.
본격적인 위기는 동면 역 인근 숙소에 도착할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문밖에 두었다는 열쇠는 얼굴을 처박고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고, 힘겹게 올라간 숙소는 사진에서 본 포근함과는 다른 적막함, 썰렁함이 더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예쁘게 보일 수 있는 곳을 실제보다 초과한 예쁨으로 포장했구나 싶은. 게다가 추가로 깔기로 한 매트리스는 도무지 침구라 부를 수 없는 상태라 머릿속은 온통 돈, 돈, 돈, 돈으로 가득했다. '내가 지금 이따위 옵션에 25만 원을 더 내야 해?'하는 분노가 방문한 순간 또 한 번의 버퍼링이 온 것이었다.
호스트와 연락이 닿기까지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침구 상태를 지적하는 정공법으로 갈 것인지, 충분한 현금을 준비하지 못한, 실은 럭키드로우에 실패해 씁쓸한 마음으로 가득한 여행자 모드로 갈 것인지 고민하느라 짐을 들여놓고도 불편한 휴식을 이어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도착한 호스트의 쿨한 메시지! 추가 침대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다며 현금을 받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쌩돈 낼 생각으로 근심에 휩싸였던 마음, 일순간 개이는 마음을 숨기고 서류상 증거를 확실히 챙겨두었다.
"그럼 침대는 추가 비용을 안 내도 된다는 말씀이시죠?"
"뚜이. 부용" (네. 필요 없습니다)
한시름 놓고 나서야 아이들을 부추겨 어디로든 나가 볼 동력이 생겼다. 그런데,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곳이 보이지 않겠나. 알고 보니 그곳이 딘타이펑 본점이었는데, 애초에 갈 생각도 없었다가 '남들은 딘타이펑 가겠다고 일부로 찾아오는데, 근접성으로 치자면 최상위권에 속하는 우리가 안 가볼 수 없잖아?'하는 자동 의식 시스템에 따라 번호표를 받았다. 가면 가고, 아니면 말고. 대기 시간은 120분이 주어졌는데, 처음엔 정말 설마 했다. 그렇게까지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인파로 몰리는 식당의 예측은 정확했고, 추후에 듣게 된, 기대를 많이 하면 곧잘 실망한다는 현지 가이드들의 분석도 맞았다. 김치 없이 못 먹겠는 계란 볶음밥과 자꾸만 본전 생각나게 하는 샤오롱바오를 맛본 후 '이 한 번으로 족하다' 싶었으니까.
물론 실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첫날 일정의 가장 큰 성공은 융캉지에 금품양주 앞에서 한국인 일행을 만났던 것. 여행 가이드북에서 학습한 덕분에 그곳이 위스키의 성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년 여성들에게 코리아 특급 친화력을 발휘하다가 그들의 가계 조직도부터 총 인원, 여행 스케줄까지 대략적인 정보를 듣게 되었다. 럭키드로우 8인 중, 8인 모두 실패라는 어마어마한 사실까지.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나오는 남자분을 가리키며 '(저 친구가) 많이 속상해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안에서는 해방의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나보다 몇 배는 더 속상했을 인물이 저기에 있구나 싶어서. 타인의 슬픔을 딛고 미련의 벽을 넘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원래 분하고 속상한 마음은 더한 고통과 실수를 지닌 인간으로부터 넌지시 위로받는 법이니까. 부디 즐거운 여행 하기를…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축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