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뽈)
인생에 가장 우울했던 고시생 시절. 자존감이 높다고 자부하던 나는 어디로 간 건지. 낮아지는 자존감에 비례하듯 공부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나약한 자신을 원망하며 남은 자존감마저 깎아내렸다. 부모님 눈치가 보이자 수험서를 잔뜩 들고 도서관에 갔다. 하지만 해야 하는 걸 안다고 하게 되지는 않지. 도서관에서 내가 한 일은 여행책이나 여행 잡지를 들여다보는 것. 고시생에서 벗어나 상상 속에서 나마 자유롭게 떠다니는 방랑자가 되고 싶었다. 상상 속의 나는 현실보다 훨씬 근사했기에.
‘고시생이 이렇게까지 공부를 안 할 수가 있나? 교사가 되고 싶어 고시생이 되었는데 이렇게 공부를 안 한다는 건 간절하지가 않은 건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난 무엇이 진짜 하고 싶은 걸까.
그리고 나의 버킷 리스트 1순위를 떠올렸다. 그것은 세계 여행. 평생 동안 하나였던 교사라는 장래희망을 이루지는 못할지언정 세계 여행은 반드시 이뤄내야만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세계 여행이 죽기 전까지 이뤄야 할 과업이 된 계기는 해외 어학연수와 3개월간의 유럽 여행이었다. 그 기간 동안 나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가며 과거의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기 위한 그 첫걸음은 나를 인정하는 것. 인정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야 했다. 매일을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노출되어 낯선 나를 발견하게 되고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더 나은 사람이, 더 큰 그릇의 사람이 되고 싶어 계속해서 여행을 떠났다. 여행 후의 성장했을 미래의 나를 기대하며. 나의 20대는 그 1순위를 해내기 위한 긴 여정이었고 이제 그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다.
한국보다 2배 이상 높은 시급과 많은 일자리로 세계 여행 자금 마련에 유리할 거라 생각했다. 물론, 해외 생활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그렇게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나의 세계 여행의 동반자가 될 친언니와. 2010년 4월 여행자로 멜버른에 왔고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16년 4월 워홀러로 멜버른을 다시 찾아왔다.
‘돈 없고 집 없는 외국인 노동자가 왜 독하고 왜 열심인지’ - 바비, 연결 고리 中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나의 스케줄, 투잡에 쓰리잡까지. 입국 전부터 워라벨은 계획에도 없었고 스스로가 돈 버는 기계가 되길 자처했다.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하고 싶은 것 못하고 평점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가격만 보고 숙소를 정했던 과거의 가난한 여행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비용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후회를 여행지에 두고 오고 싶지 않아서.
5개월을 그렇게 돈의 노예가 되어 살다 보니 지쳐갔다. 내일의 큰 행복을 위해 오늘 큰 수고를 하기보다 오늘도 적당히 내일도 적당히 행복하고 싶었다. 일은 자정이 훌쩍 넘어 끝이 났고 트램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호바트’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2009년 어학연수로 호주에 왔던 나는 인구 20만의 소도시 호바트를 여행하게 되었고 자연 속에서의 평화로운 삶이 가능해 보이는 호바트에 살아보고 싶었다. 이런 마을에 살면 없던 이너피스도 생기겠다며. 그렇게 퍼스를 떠나고 싶어 하는 내 친구이자 당시 같은 처지인 워홀러 삐래에게 호바트로 같이 갈 것을 제안했다. 우리는 떠났다. 호주의 제주도라고 하는 그곳으로. 그곳에서는 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결국 행복했냐고? YES! 우리들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그곳에서였다고. 우린 항상 그곳을 그리워할 거라고. 그곳 덕분에 추억할 일이 많아졌다고. 우린 지금도 이야기한다.
삐래)
20살, 산토리니 관련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파란 지붕, 하얀 벽, 따뜻한 햇살, 해맑게 웃는 아이들 TV에 나오는 그리스가 걱정거리 없는 천국같이 보여 나를 사로잡았고 내 1순위 버킷 리스트 여행지가 되었다. '나는 유럽을 다 돌 거야 세계 여행을 하고 싶어'라는 말을 공수표처럼 말하고 다녔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바쁜 학교생활과 술이 술을 부르는 공허한 시간을 보냈고 남들과 같이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꿈은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사회생활 3년 차 반이 지날 때쯤, 직업 특성상 고객사를 상대하는 일이었고, 철저하게 을의 입장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어느 시점부터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죄송하다는 말을 기계처럼 내뱉고 있었다. 일도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사람 관계였다. 나의 상사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꼰대였다. 그의 부정적인 생각과 나를 향해 내뱉는 폭력적인 말들로 인해 나의 멘탈은 산산조각 나고 자존감은 바닥을 쳐 하루에도 몇 번씩 나도 모르는 눈물이 나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내며 남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다고,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라고 나를 위로하고 또 위로했다.
내 친구 이뽈.
이뽈은 늘 현실적이면서도 뭔가 늘 하는 아이였고, 맘먹은 일은 해내고 마는 친구였다. 나는 용두사미로 끝나기 일수여서 늘 친구의 성격이 부러웠다. 그런 이뽈이 한 말 ‘나 워킹홀리데이로 호주를 갈까 해’. 나는 순간 멍해졌고, 내 20살 때의 기억과 함께 뭔가 탁 맞은 느낌이었다. 단 한 번도 생각 못 했고 29살이란 나이에 갇혀 ‘어딜 나가 내 나이에.. 갔다 와서는 뭐 먹고살아’ 이런 걱정들로 아무런 도전도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나이라는 틀에 나를 가둬 뭐든지 안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 이뽈의 결심, 단 한 문장으로 무너져버렸다.
집에 오는 내내 워킹홀리데이라는 말이 떠나 질 않았고, 나의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현실적으로 내가 떠나는 것이 맞는 건지, 이 선택을 해도 후회하질 않을 건지 잠도 설쳐가며 며칠 동안 기회비용을 따지고 또 따졌고 꼬리를 문 생각의 끝에 지금 아니면 못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나의 마음은 가는 거였다. 1년만, 딱 1년 돈 벌어서 여행하자.
마음을 먹는 순간 내 머릿속은 깔끔히 정리되고 나의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3개월치의 생활비와 함께 호주 퍼스에 도착했다. 2주 동안은 참 좋았다. 여러 국적의 사람들과 편견 없이 대화를 하고(바디랭귀지가 많았지만), 같이 놀고 공원에서 앉아서 멍 때리기도 하고 몇 년 만에 찾은 여유와 색다른 경험들로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나의 희망사항과는 다르게 호주의 여유로운 생활은 아주 찰나였다. 호주 역시 사람이 부대끼며 사는 곳이었고, 돈을 벌기로 결심한 이상, 이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로써 적응해야 했다. 떠듦이 영어를 구사하는 나는 도대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일을 구하고 빨리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시티 내에 80곳 이상 이력서를 돌렸고 아무런 결과가 내 손에 쥐어지지 않게 되니, 허무했다. 그리고 막막해졌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이역만리 타국에서 무슨 고생이지?’ 하는 생각과 내가 생각했던 이상과 냉정한 현실의 차이가 온몸으로 느껴지니 후회가 밀려왔다. 이때부터였나? 하루하루가 외로웠던 게.
살면서 원초적으로 외로움이란 감정을 대면했던 적이 있는가, 한국에선 소중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친구들과의 대화, 정겨운 집 밥 냄새, 엄마의 따뜻한 품과 목소리 이런 것들이 매 순간 생각나 눈물로 베개를 적시곤 했다. 타국에 있는 딸 걱정으로 엄마는 매일같이 전화를 했고, 그럴 때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서러움에 다 접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향수병에 지쳐 갈 때쯤 이뽈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호바트 갈 건데, 너 계획 없으면 같이 갈래?” 호바트가 어디인지 전혀 기초 지식이 없던 나였기에,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호바트는 세컨 비자를 위한 농공장이 많이 모여 있으며, 퍼스, 시드니 같은 큰 시티에 비해 일자리도 많은 대신 노동자 비율이 낮아 쉽게 일을 구할 수 있고, 시급도 많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걸 종합했을 때, 난 여기서 이동한다고 해도 잃을 게 없었고, 하나보단 둘이 낫고, 외로운 타지 생활을 친구와 함께 라면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Y. E. S!
이뽈을 만났다. 이뽈을 보다니!! 그것도 호주에서 보다니!!! 해외에서 친구를 본 것도 처음인 데다가, 같이 살게 되다니! 기분이 묘하면서 주체하지 못할 만큼 파이팅이 넘쳤다. 퍼스에서 한 달 동안 이력서 돌리면서 지쳤던 마음과 가족이 보고 싶었던 마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병들을 덕분에 극뽀옥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본격적인 타즈매니아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