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뽈)
드디어 간절하게 원했던 세계 여행자가 되었다. 워홀러로서 살아가는 것보다 여행자로 지내는 것은 훨씬 수월했다. 호주에서 일과 집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적응하기 위해 긴장했던 수고로움에 비하면 아무리 여행 난이도가 높은 나라라 할지라도 미리 겁을 먹지 않았다. 적응력은 날로 진화했고 현지인들이 영어가 아닌 현지어로 말을 걸만큼 겉모습에선 여행자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역시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은 더없이 달콤했다. 차곡차곡 통장에 쌓여가는 돈을 볼 때면 흐뭇했지만 ‘일’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여행을 하면서 입금은 없고 출금만 있는 통장을 보며 지출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빠져나가는 돈 이상의 것이 채워지고 있다는 확신에 불안하지 않았다.
노는 게 제일 좋았다. 놀이하는 인간 ‘호모루덴스’가 정설이었다. 여행자가 천직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여행을 하다가 발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호주가 처음으로 같이 살았던 곳이라면 발리는 우리의 첫 해외 여행지였다.
삐래)
‘이삐래 알아가기 프로젝트’. 첫 번째, 호주의 다사다난했지만 즐거웠던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통해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고 두 번째, 가슴 뛰는 해외 장기 여행 시작이다.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지, 또 그 귀한 경험을 통해 내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인생 첫 동남아 여행지. 휴양지로 손꼽히는 이곳. 발리 여행을 계획하면서 상상했다. 에메랄드 빛 바다, 새하얀 모래사장, 높고 파란 하늘 그리고 오색찬란한 칵테일 한 모금을 마시는 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줄리아 로버츠가 ‘나’라는 엉뚱한 상상 말이다. 이번 여행은 타국에서 외노자로서 서러웠던 지난 날들, 돈 버느라 뼈 빠지게 고생했던 나에게 주는 일종의 상이 었다. 실컷 쉬고 놀자.
나보다 먼저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만료된 이뽈은 먼저 여행을 떠났고, 두 달 뒤 우린 발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늦은 저녁에 출발하는 비행기가 최저가였다. 이렇게 아낀 돈으로 마사지를 더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현명한 여행자라며 날 치켜세웠다.
그러나 잊지 말자 내 체력. 발리에 캄캄한 밤에 도착했다. 간신히 눈꺼풀을 부여잡고 택시에 몸을 싣었다. 이동은 역시 피곤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속소 앞 도착. ‘삐래!!’ 하고 외치는 이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고작 두 달 만에 듣는 내 별명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맨발의 그녀가 ‘요라나 마루루~’라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요라나, 마루루는 이뽈이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남태평양에 위치한 ‘보라보라 섬’, 타히티에서 배워온 말이란다. ‘요라나’는 ‘안녕하세요’, ‘마루루’는 ‘감사합니다’의 뜻이다.
사막에 있을 때보다 더 까만 콩이 된 이뽈, 이 녀석 나 없는 두 달 동안 신나게 놀았구먼. 날 위해 준비했다며 웰컴 목걸이를 걸어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자리에서 주저앉아 한참을 웃었다. 빅웃음 선사해주시는 이뽈님. 너와의 첫 해외여행 기대할게.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