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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1

유럽의 근현대사를 볼 수 있는 도시

by 불친절한 은자씨

2023년 10월 23일부터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이 장기 휴관에 들어간다고 한다. 박물관 보수 공사로 무려 14년동안이나 문을 닫는단다. 지금 못 보면 내가 환갑이나 되서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유럽에서 살면서 여러 박물관을 참 많이도 방문했다. 사실 박물관이든 미술관이든 웬만한 배경지식이 탑재되어 있지 않는한 고작 한번의 방문은 그저 발도장찍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알고있는 유명 작품을 직접 본다는 것 정도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래도 14년이나 볼 수 없다니. 발도장이라도 지금 찍어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 부랴부랴 항공편과 숙소를 검색해본다. 다행히 8월 마지막주는 항공편과 숙소는 성수기 시즌이 지나 어렵지않게 예약을 했다.

한창 학교에서 제 1,2차 세계대전을 배우고 있는 큰 애는 베를린에 간다니 한껏 들뜬 모양이다. 본인이 가고 싶은 장소를 보여주며 일장연설까지 한다. 좀처럼 보기 힘든 큰 애의 적극적인 태도에 덩달아 여행의 기대감이 증폭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베를린을 향했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새벽비행기를 예약했다. 1시간 30분 정도 걸렸을까? 짐을 찾고 게이트를 빠져나오는데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이다. 새로 지었다는 브란덴 브르크 공항은 베를린 시내에서 20km밖에 떨어져있지 않아 숙소에 도착하니 11시다. 이른 체크인을 해두어서 잠시 쉬다가 슬슬 점심도 먹고 어슬렁 거려보기로 한다. 숙소 근처에 슈니첼 맛집이 있다길래 찾아가본다. 어제까지 40도에 육박하는 타들어가는 푹푹 찌는 더위의 밀라노에 있다가 27도에, 눈부신 햇살에 바람은 시원한 베를린은 선물같기만 하다. 슬렁슬렁 걷다보니 점찍어둔 식당이 금세 보인다. 하늘색 차양이 멀리서도 눈에 띄는 , 식당이름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같다. 엘리펀트 식당.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딱 두가지였는데 독일식 돈까스인 슈니첼과 굴라쉬 형태의 수프였다. 슈니첼은 밀라노에서는 꼬톨레타로 불리우는 송아지 돈까스와 비슷하다. 한국으로 치면 딱 돈까스인데 다른 점은 한국의 거칠고 바삭바삭한 빵가루와 달리 슈티첼이나 꼬톨레타는 아주 부드러운 빵가루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름만 조금씩 다를뿐 유럽 여러나라에서 이런 형태의 음식은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의 슈니첼은 소스를 다양하게 만들어 종류가 수십가지였다. 따끈하게 구워진 슈니첼과 감자튀김, 샐러드는 오랜 공복을 달래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도 배가 고팠는지 남기지 않고 다들 싹싹 비웠다.


배가 차니 나와 남편은 한숨자면 딱이겠다 싶은데 아이들은 에너지가 팔팔하다. 큰 애의 성화에 못 이겨 슬슬 시내로 나가보기로 한다. 덥지 않으니 걷는 것도 즐겁다. 한 블럭 나가니 바로 지하철역이고 버스정류장이다. 구글맵을 보며 버스를 타보기로 한다. 100번 버스를 타면 웬만한 베를린 관광명소를 다 볼 수 있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밖을 보니 저 멀리 꼭대기에 황금빛 무언가가 시선을 강탈한다. 전승기념관이라고 한다. 전승기념관을 지나 티어가르텐 공원을 가로질러가니 라이히스탁-국회의사당이 보여 후다닥 내렸다.

큰 애가 꼭 오고 싶다던 곳이 바로 이곳 베를린 국회의사당이었다. 처음 1894년에 지어진 국회의사당은 2차세계대전 중 지붕 돔이 화재로 없어지고 계속 그 상태로 있었는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다시 이 건물이 독일의회의 사용처가 되면서 1999년 노먼 포스터에 의해 지금 유리천정의 돔으로 만들어졌다. 유리와 알루미늄으로 돔 천정을 만들었으며 각각의 유리판넬이 다른 각도로 조립되어 있는데 이는 자연 조명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맨 위 좌부터 라이히스탁,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브란덴부르크

오기전에 온라인 예약을 하려했으나 온라인 예약은 현 시점의 1주일 뒤부터나 가능하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현장예매도 가능한데 당일과 다음날은 불가능이고 2일 이후부터 가능하다. 다행히 우리도 토요일로 방문예약을 잡고 바로 브란덴 부르크 문으로 향했다. 관광명소답게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다. 밀라노와 달리 도로가 시원시원하게 넓다. 자전거도로도 보행자도로만큼 잘 되어 있어 도심에서도 자전거 탄 사람들이 많다.


브란덴 브르크 문앞에 가까워질수록 무슨 시위라도 하는 건지 경찰차들이 보이고 광장 한 가운데에는 한 무리가 크게 원을 둘러 누군가가 기조연설을 하는 분위기이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침공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그 사람들 앞으로 브란덴브르크 문을 배경으로 사진찍으려는 관광객- 나포함-있는 광경이 뭔가 비현실적이면서 이질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내 눈으로 마주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유럽안에서 무력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을텐데. 1년이 훨씬 넘어가는 전쟁이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점점 잊어가는 것 같아 갑자기 부끄러움이 확 몰려왔다.

그런 부끄러움을 동반한채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로 향했다. 2700여개의 기둥이 세워진 이곳은 세계대전 중에 학살된 이름 모를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보수 공사중인 관계로 일부만 접근할 수 있고 절반이 넘는 공간은 공사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래도 남아있는 곳만 둘러보아도 충분할 정도로 꽤 컸는데 각 기둥마다 높이와 경사도가 다르게 제작되어 있다. 기둥사이로 천천히 걷다보니 아까의 부끄러움이 다시 밀려든다. 결국 내 가 직접 겪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잊어버리며 살게되나 보다.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지만, 애들도 나도 오래 걷느라 피곤이 몰려와 숙소로 돌아가 쉬기로 하고 다시 100번 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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