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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휴 Jan 29. 2024

생의 참 의미를 만나다

에밀 아자르 장편소설 『자기 앞의 生』 (문학동네, 2022)을 읽고

지구가 멸망해서 단 한 권의 책만 남겨 둬야 한다면 어떤 책을 남겨 두고 싶은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말했을 때, 작가는 서슴없이 말했다. “당연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이지요.” 그 이유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했는가를 말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라고.     



오래전부터 책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책을 며칠 내린 비와 눈 덕분에 오롯이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다. 서사를 따라가며 소설을 읽으면서도 마치, 잠언집을 읽는 것처럼 마음에 닿아 숙연해지고, 고개가 끄덕여지고, 눈물짓게 해서 밑줄 긋게 만드는 문장의 연속이었다.     


 

로맹 가리가 『하늘의 뿌리』로 콩쿠르상을 받은 이후, 가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生』으로 콩쿠르상을 또 받아 사상 최초로 한 사람이 두 번 받았다고 한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것을 밝힌다. “젊은 시절, 초창기, 첫 소설에 대한 향수,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것에 시달렸다. 새로 시작하는 것, 다른 존재로 사는 것이 내 존재에 큰 유혹으로 다가왔다.”라고 말했다. 그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거부한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이 책은 로맹 가리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자기 앞의 生』은

열네 살 모모가 서술자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 집에서 자란다. 로자 아줌마는 젊었을 때는 창녀 일을 했다. 애인이라는 남자가 재산을 모두 빼앗고, 유태인이라고 경찰에 신고한 후부터 삶이 더 어렵게 되었다. 새벽에 경찰이 잡으러 와서 유태인 집단수용소로 끌려가 죽기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로자 아줌마는 새벽 초인종 소리와 경찰을 극도로 무서워한다.   


   

50대부터 창녀들이 맡기는 아이들을 키워주는 일을 한다. 늘 살림이 가난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아파트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을 키운다. 프랑스의 벨빌 지역에는 유태인과 아랍인, 흑인들이 많이 살았다. 합법적인 일은 아니라서 가짜 서류를 만들어 대항책을 갖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집단보호소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닐곱 살에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가 누군가가 보내준 돈을 받고 자신을 키워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종일 운다. 그렇지만 뚱뚱하고 소리도 잘 지르고 거친 로자 아줌마를 미워할 수는 없다. 어떤 보모들은 시끄럽고 고약하게 구는 아이들에게 신경안정제를 먹이는데 로자 아줌마는 거꾸로 자신이 신경안정제를 먹고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편하게 미소 짓고 켜보았다고 한다.   


   

송금이 끊긴 모모에게 친절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계속 돌보았으며, 친부모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친부모는 알려주지 않을 사정이 있지만. 모모는 꼭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로자 아줌마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모모는 학교에 가려고 해도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고, 걸맞지 않은 말을 하는 등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판단에서였다. 나이보다 조숙했던 것은 로자 아줌마가 모모가 자라면 떠나게 될까 봐서 네 살이나 속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모모로서도 로자 아줌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었다.    


  

모모는 젊은 날 양탄자 행상을 하며 세상을 두루 다녀 보았고, 항상 빅토르 위고의 책을 끼고 다니는 하밀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하밀 할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어서 모모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은 하밀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이다.”(p126)라고 고백한다.     


 

로자 아줌마는 60세가 넘어 늙어가고 심한 비만으로 7층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 외출도 어려운 지경이 된다. 지병이 많아 심장과 뇌의 문제가 심각해진다. 병원으로 옮겨서 장기 치료를 해야 하는데 로자 아줌마는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연명하는 삶보다 안락사를 원한다. 그렇지만 프랑스에서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는 큰 범법행위다.     


 

맡아 기르던 아이들은 하나둘 독립하거나 입양시키고 모모만 남게 된다. 늙고 병든 로자 아줌마를 주변의 사람들이 힘을 합해 돕는다. 심장이 약한 의사 카츠 선생님을 업어 나르는 지움 씨네 형제들 덕분에 로자 아줌마는 정기적인 검진을 받을 수 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로자 아줌마를 위해 밤새도록 북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기도해 주는 ‘왕룸바 일행’ 그래도 시끄럽다는 민원이 단 한 번도,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장 남자인 룰라 아줌마는 돌볼 아이도 없고, 지원이 끊긴 늙고 아픈 로자 아줌마와 어린 모모만 사는 집을 돌봐주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천사 같은 사람이다.





“죽음은 사람에게 중요성을 부여해 주고,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온 사람을 더 존경하게 되기 때문이다.”(p234)   

  

열네 살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부축해 운동시키고, 음악도 틀어주며,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기는 등 병시중 한다. 병원으로 가기 싫어하는 로자 아줌마와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모모. 7층의 집에서도 머물 수 없게 된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지하실로 옮긴다. 로자 아줌마가 비밀 동굴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낡은 침대와 먼지투성이인 곳이었지만 로자 아줌마의 안식처였다. 로자 아줌마가 죽고 3주일이나 함께 잠자고, 함께 죽고 싶어하다 발견된다.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정서나 은유에 빛나는 문장들, 위트가 느껴졌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生』이 발표되었을 때 어떤 비평가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의아했다. 내가 익히 알고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 앞의 生』에는 제국주의인 프랑스의 법과 경찰, 의료법에 대한 비판들이 곳곳에 나온다. 콩쿠르상을 주는 심사위원들이 그런 내용에 치우치지 않고 작품의 문학적 성과와 내용을 높이 평가하여 상을 주었다는 부분이 역시 프랑스라는 감탄을 갖게 했다.     


 

책에서 어려운 상황이 묘사될 때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빌려서 말하곤 하는데 그 모든 말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라 저절로 수긍하게 된다. 늙고 병든 하밀 할아버지나 로자 아줌마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마음이 감동스러웠다.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이 동양사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늙고 힘없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돈과 찾아오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인상 깊었다.   



   

생이 우리에게 어떤 시련을 준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고 이겨내는 힘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했다.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맡아서 키운 사람 역시 가난한 로자 아줌마였다. 로자 아줌마가 늙고 병들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들도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병자를 씻겼고, 음식을 나눴으며, 로자 아줌마를 7층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로자 아줌마의 생에, 모모의 생에 닥친 고난들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많이 났고, 그 어려운 상황을 오직 사랑으로 헤쳐나가는 사람들이 감동이었다. 삶을 향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넘치는 책이었다. 내게 닥친 생의 고난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아니, 너무나도 감사한 것이었구나. 한 권의 책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휘감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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