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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휴 Jun 03. 2024

어느 가여운 소녀 이야기

앨리스 먼로 소설집 『거지 소녀』(문학동네, 2019)중 「장엄한 매질」

앨리스 먼로는 1931년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우리 시대의 체호프”,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며 캐나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총독문학상 3회, 길러상 2회 등 유명한 상을 받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작가다.


『거지 소녀』는 단편으로 유명한 작가에게 출판사들은 장편을 써 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작가는 단편의 형식에 장편의 내러티브를 더해 연작소설집을 출간했다. 열 편의 단편들이 종횡무진 엮이면서 주인공 로즈가 유년기부터 중년까지 40여 년의 생애를 그리고 있는 형식의 소설집이다.    


       

(배경 설명이나 인물 설명이 다소 길다는 느낌이 들지만,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한 설명이 그 이유라서 뛰어난 묘사력과 표현에 주목하며 읽게 된다. 서사보다는 장면 묘사에 더 치우친 소설 작법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주인공 로즈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새엄마 프롤, 이복동생과 마을 뒷골목에서 산다. 아버지는 솜씨 좋은 수선공이고, 플로는 식료품점을 운영한다. 로즈는 플로의 일을 돕는다. 다소 복잡한 가족구성원이라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궁금하다. 제목에서부터 마냥 행복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로즈의 성정은 뾰족한 껍질에 싸인 파인애플처럼 자라났으나 그 변화는 느리고 은밀했다. 단단한 자존심과 회의주의가 서로 겹쳐지면서 로즈 자신에게조차 놀라운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p18)  

 

  

로즈는 순종적인 아이는 아니다. ‘무엇이든 머리에 그려보고 말이 안 되는 것들은 꼬치꼬치 따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아이다. 플로는 로즈가 말썽을 피울 때 “장엄한 매질”이라는 단어를 말한다. 플로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을의 한 노인이 폭력적이었는데, 부인은 죽었고 장애가 있는 딸과 아들까지 폭행한다는 소문이 돈다. 장애가 있는 딸을 임신시켰다는 끔찍한 이야기. 젊은이 셋이 한겨울에 노인을 끌어내 매질하여 죽게 된 이야기를.  


 



로즈는 기죽지 않고 새엄마인 플로와 티격태격을 거듭하면서 일상을 산다. 아홉 살, 열 살 그런 나이라서 집을 떠나 살 수도 없다. 플로는 어느 날 식료품점을 청소하다가 로즈와 언쟁을 벌인다. 로즈가 학교에서 배워 온 노래를 더러운 말이라고 못 하게 한다. 로즈는 계속 흥얼거린다. 플로는 급기야 아버지를 불러들인다. 로즈가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일러바친다. 플로는 아버지의 화를 돋우는 말을 계속하고, 아버지는 로즈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플로는 가게와 문들을 모두 닫아건다.    


  

아버지는 화를 억누르며 희열을 느낀다. 로즈는 아버지의 벨트가 날아드는 것을 피해 달아나려 하지만, 손으로 얼굴과 온몸을 무차별적으로 때리고 벽에 밀치고, 다리를 걷어찬다. 아버지의 매질이 끝나면, 플로와 아버지의 말다툼, 플로가 콜드크림을 들고 로즈에게 오고, 음식을 만들어 온다.     



 


(로즈는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있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폭력에 노출된 로즈의 상황이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이 그 여린 몸으로 견뎌내야만 해야 한다는 것이 아프다.) 


   

(어릴 적에 우리 엄마도 그랬다. 개구쟁이 오 남매가 하도 말을 듣지 않으면, 하루 날을 잡아서 매를 들었다. 우리 집 규칙은 엄마의 일장 연설이 끝나고 난 후, 자기가 맞을 매를 직접 만들어 와야 했다. 우리는 부엌에서 적당한 굵기의 나뭇가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몇 대 맞을지를 말하라고 했다. 적게 말하면 혼날 것 같고, 많게 말하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오빠가 말하는 것에서 조금 빼고 말하곤 했다. 그래도 우린 옆에 다른 형제들이 있어서 매를 맞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았던 기억이 난다.)


    

(플로 또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보다는 철없는 아이였지만, 로즈와 애증의 관계를 쌓으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읽힌다. 로즈가 아버지로부터 그토록 무서운 매질을 당하면서도 어디론가 도망가지도 않고 플로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로즈가 조금만 더 성장하면 지옥 같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매질 앞에 장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했는지 의문이 든다. 연작소설집인 이 책의 다음 편들을 서둘러 읽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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