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례
오늘의 시 한 편 (46).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어디가 세상의 끝인지
최정례
산에 나무를 심으러 간다고 간 것이었는데 어린 토끼와
마주치게 되었다. 식목일이었고, 우왕좌왕하는 토끼 한 마리
를 향해 아이들이 고함치며 달려들고 있었다. 어린 토끼는
처음 맞는 이상한 광경에 어리둥절 달아나지도 못하고, 이
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 아마 딴 세상의 소풍일 거라 짐
작했다. 누가 토끼에게 바위 밑 구멍을 가리켜준 듯 토끼는
재빨리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고, 귀에 고함 소리 가득했으
나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 소리 다 흩어질 때
까지, 그들이 다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 졸업 삼십주년이 될
때까지. 누군가 구멍 속으로 연기를 피워 넣자고 했고, 젖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고, 그러면 토끼가 튀어나올 것
이라 했다. 그러나 죽어본 적 없는 어린 토끼 뭐가 뭔지 몰라
무작정 굴속에서 기다렸다. 외롭고 어둡고 어지러운 이상한
소풍날. 기다리기만 하면 이 마술의 끝이 올 것만 같았는데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고, 빨간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그냥
죽었다.
구멍에 손을 뻗어 휘젓다가 축 늘어진 토끼를 꺼낸 것은
은기였다. 졸업 삼십주년 동창회에서 은기가 말했다. 학수
는 선생들이 토끼탕을 먹는 것을 보았다고, 토끼가 펄펄 끓
던 학교 가마솥을 누구보다도 잘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토
끼를 마주친 것은 식목일이 아니라 눈발 날리는 초겨울이었
다고 성만이 말했다. 그날 산에서 산에 사는 메아리라는 노
래를 불렀다고, 오월이었다고, 토끼의 귀에도 그 메아리 반
복되었을 것이라고 규태가 말했다. 메아리가 아니라면 누가
알겠냐고 어디가 세상의 끝인지를, 규태가 이상한 소리를
했고, 그날 눈 속에서 토끼는 뛸 수 없었다고 분명 겨울이
었다고 성만이 우겼다. 그래, 겨울이었다고 치자, 누군가 말
했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메아리가 아니라면 누가 알겠냐고 어디가 세상의 끝인지를
(토끼가 굴속에 갇혀 죽었고, 선생님들이 어떻게 해 버렸는데, 삼십 년이 넘었어도 아이들 기억 속에서는 살아 있다. 토끼를 매개로 이상하고 복잡했던 소풍날을 이야기하는 아이들. 나도 어린 날에 산에 불을 낸 적이 있다. 옆집 사는 친구가 라이터를 가지고 나왔다. 열살 또래들이 평소에 놀던 동네 앞산에 놀러 갔다가 장난삼아 불을 지핀 것이 산불이 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불을 꺼서 큰불로 번지지는 않았다. 경찰차가 마을로 들이닥쳤고, 우린 너무 무서워서 오후 3시가 넘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을에서 숨어서 놀았다. 엄마는 빨리 밥 먹으라고, 밥 먹고 지서에 가야 한다고 했다. 지서에 가면 집에 올 수 없으니 마지막 밥을 빨리 먹으라고, 경찰들이 우리들 잡으러 다시 온다고 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울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는데, 친구가 라이터를 내가 가지고 왔다고 말하는 바람에 더 혼이 났다. 어른이 돼서 만나면 한동안 서로 우기는 일이 반복되었는데 요새는 그마저도 까먹고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