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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안도현

by 민휴

오늘의 시 한 편 (44).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호미


안도현

호미 한자루를 사면서 농업에 대한 지식을 장악했다고 착

각한 적이 있었다


안쪽으로 휘어져 바깥쪽으로 뻗지는 못하고 안쪽으로만

날을 세우고

서너평을 나는 농사라고 했는데

호미는 땅에 콕콕 점을 찍으며 살았다고 말했다

불이 호미를 구부렸다는 걸 나는 당최 알지 못했다

나는 호미 자루를 잡고 세상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너른 대지의 허벅지를 물어뜯거나 물길의 방향을 틀어 돌

려세우는 일에 종사하지 못했다

그것은 호미도 나도 가끔 외로웠다는 뜻도 된다

다만 한철 상추밭이 푸르렀다는 것, 부추꽃이 오종종했다

는 것은 오래 기억해둘 일이다


호미는 불에 달구어질 때부터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

손하게 내면을 다스렸을 것이다

날 끝으로 더이상 뻗어나가지 않으려고 간신히 참으면서


서리 내린 파밭에서 대파가 고개를 꺾는 입동 무렵


이 구부정한 도구로 못된 풀들의 정강이를 후려치고 아이

들을 키운 여자들이 있다

헛간 시렁에 얹힌 호미처럼 허리 구부리고 밥을 먹는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헛간 시렁에 얹힌 호미처럼 허리 구부리고 밥을 먹는

(세상의 전부였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였던 친정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 그토록 아낌없이 내어주는 존재들이 모두 모인 설날에도 링거를 꽂고 아랫목에 누워계셨지만, 고혈압이 진정되지 않아 입원해서 원인을 찾고 있다. 팔순에서 망구를 겨우 넘긴 엄마가 호미같다고 생각했다. 꼿꼿하던 허리가 구부러진 엄마는 애초부터 구부러진 허리를 숨기고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을까? 구부러진 허리로 온 생을 살아오느라 심장이 망가진 사람. 오랜 협심증이 자식들의 걱정을 키우고 있다. 한평생을 살아서 호미가 된 엄마처럼 내 손에도 호미가 쥐어졌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버릇처럼 말했던 나도 허리가 아프다. 호미가 되기로 한 것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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