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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라면

김현

by 민휴

오늘의 시 한 편 (42).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내가 새라면


김현


걸어다닐 수 있겠지

겨울 갈대숲을

황량한 곳

정신이 깨끗한 손가락으로 턱을 괴는 곳

가끔 진흙탕에 발이 빠지기도 하고

삶이 진창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의 어깨 위에서 알려줄 수 있겠지

어둠 속에서 진흙이 다 말라

떨어질 때

포르릉 사랑하는 이의 정신 속에 있는

진리의 나라로 날아가

갈대숲에 남기고 온 발자국을 노래할 수 있겠지

흙으로 만든 지혜의 징검다리와

그 사이로 몇 번씩 개입되는 슬픔과

무리 지어 서쪽 하늘로 사라지는 고독을

부모는 죽고 죽은 부모가 살아생선 모셨던 믿음이 깨지고

그때

우리가 얼마나 불효자식들인지

당신이 옳아요

당신의 팔다리와

당신이 죽은 고양이를 그리워하며 흘리는 눈물이

그 고양이가 통째로 잡아먹은 당신의 새가

내가 새라면 날 수 있겠지

단 한번의 날갯짓으로

검은 비 떨어지는 창공으로 날아올라

추락을 살 수 있겠지


겨울 갈대숲

발자국 위에서 볼 수 있겠지

멀리

날아가는 한마리 새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흙으로 만든 지혜의 징검다리와

그 사이로 몇 번씩 개입되는 슬픔과

무리 지어 서쪽 하늘로 사라지는 고독을


(도통 모르겠는 단어와 단어의 연결과 조합, 닿지 않을 것 같은 맥락들이 시를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장 같아서 마음을 붙잡히고 말았다. “내가 새라면 날 수 있겠지” 훨훨 날아서 사람 없는 한적한 곳. 예를 들면, 지리산 노고단이나 천왕봉을 내려올 때 만났던 야생화군락지 같은 곳에서 한참 쉬었다 오고 싶다. 꽃은 좋은데, 사람들 너무 많은 곳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구절초를 볼 수 있는 가을이면 더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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