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오늘의 시 한 편 (51).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사랑의 전당
김승희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
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전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
(수박이 없는 여름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블루베리와 복숭아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블루베리는 봄을, 복숭아는 여름을 상징하는 대표 과일이 되었다. 수박을 쪼개며 이런 시상을 떠올릴 수 있는 시인이 김승희 시인이다. 감각적이고 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는 시인. 그렇지만, 결국은 사랑을 말하는 시인. 포대 속의 고구마처럼 한데 뭉쳐 얼크러지는 고난 속에서도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절벽인데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고난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그곳이 바로 사랑의 전당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