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은
오늘의 시 한 편 (52).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이 꿈에도 달의 뒷면 같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 있을까
최지은
아무 일 없이 하루가 끝나고 자정이 되고 나는 고속버스
안에서 잠이 들어 있습니다. 반포터미널에서 전주, 아버지
의 집으로 가는 검은 도로. 겨울의 버스 차창은 성에로 뒤덮
여 모든 것이 포근해 보입니다. 밖은 불투명하게 가려지고
승객들은 저마다의 몽유 속에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 있습니
다. 나는 무거운 몸을 창에 기댄 채 꿈속으로 빠져듭니다. 등
돌린 어머니가 보입니다. 내가 세살 때, 다른 사랑을 찾아 나
를 떠난 나의 어머니. 하얀 부엌. 뒷모습의 어머니는 통조림
뚜껑을 열고 있습니다. 크게 울려오는 통조림 뚜껑 소리. 뒤
집힌 통조림에선 붉은 양귀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연이
어 푸른 들판. 늪처럼 깊은 여름 밤하늘이 흘러넘칩니다. 검
푸른 밤하늘에 눈을 줄 때마다 하나하나 별빛이 밝아집니
다. 내 시야는 점점 넓어지고. 꿈의 모서리로부터 끝없는 기
찻길이 놓이기 시작합니다. 시야는 점점 넓어지고. 기차 소
리 들려오지만 기차는 보이지 않습니다. 더 넓혀갑니다. 이
리저리 돌려가며 납작한 꿈을 부풀려봅니다. 부풀어오르는
내 여름밤. 기찻길. 별빛. 흔들리는 양귀비. 넓어지는 시야.
기차가 출발했던 곳까지 내달리는 나의 꿈. 내가 모르던 이
야기들이 그곳에도 숨어 있습니다. 저 멀리 기둥 아래 한 사
람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가슴속 슬픈 돌멩이. 슬픈 얼굴. 아버지라는 걸 압니다. 부풀
어오르는 꿈. 또 한번 시야가 넓어지고. 또다른 기둥에 가려
져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시야를 넓혀 들여다봅
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내 사랑.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을
때 온작 이유로 떠나간 그와의 이별이 떠올랐습니다. 미움
도 괴로움도 두려움도 없이 나는 그 시간을 다 지켜보고. 되
돌려진 시간 속에 긴 오해를 풀어가고 슬픔과 화해하며. 넓
어지는 꿈속에서. 나는 용기를 내 다시 사랑을 붙잡아봅니
다. 사랑의 손을 잡고 걷습니다. 어쩐지 우리 둘 맨발로 가볍
게 거닙니다. 상처 입은 여름풀. 짙은 향기를 풍겨옵니다. 음
악이 흐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린 피아노 음악. 우리 둘 이
제 거의 음악 속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두 발이 떠오르고 하
늘을 나는 것 같습니다. 구름 사이를 지나며 어릴 적 내가 잃
어버린 흰 개를 본 것도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바랄 것 없고
두려움 없는 마음. 나의 돌멩이, 나의 슬픔, 나를, 이기는 사
랑을 내 손에 쥐고. 나는 음악처럼 더 가벼워집니다. 거의 없
어질 듯. 그때. 사랑은 돌연 또 사라지고. 또 한번 온갖 이유
가 내 앞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능숙하게 눈앞에 이유들을
하나하나 감추기 시작합니다. 두 발이 땅에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무거운 눈꺼풀. 밤
의 버스에 앉아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 길인지 기억나지 않
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수년이 흘렀는데 이 새벽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무리 생각을 되짚어봐도 이상합
니다. 지금 나는 여름 밤길을 홀로 걷고 있으니까. 어디부터
가 몽상의 시작이었을까. 사랑을 잃은 건 언제 적 일일까. 이
밤길은 왜 이렇게 길고 어두울까. 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
까. 얼마나 더 걸어야 집에 닿을까. 몽상이 끝에 나의 집 있
을까. 백번의 사랑을 잃고 백두번째 사랑에 빠져 걷고 있는
이 밤. 지금 여기. 저 멀리 쫑긋 세운 하얗고 작은 두 뒤. 멍한
두 눈이 보입니다. 내가 잃어버린 흰 개. 나는 힘껏 달려봅니
다. 안아봅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너무 오래 헤맨 나
의 하얀 개. 따듯한 목욕. 옛날이야기. 담요 위의 잠. 부드럽
고 깨끗한 음식. 작고 허름한 내 방 안에서 순한 숨을 내쉬는
작은 개. 내게 이렇게 해보라는 듯이. 나는 하얀 개를 따라
누워봅니다. 눈을 감아봅니다. 어수선한 몽상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거두어봅니다. 하얗게 지워지는 머릿속. 순하고
느린 숨. 흰빛. 끝으로 나의 두 눈동자를 지워봅니다. 한없이
아름답고 가벼운 여름밤 내 가슴 위를 지나갑니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없음.
(이렇게 긴 시를 쓰신 최지은 작가님 존경합니다.
여기까지 따라 쓰느라 힘들었습니다. ㅠㅠ
이 긴 시를 읽으신 작가님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정월 대보름입니다.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