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진 시집 『너나들이 향기 꽃』 (현대시학사, 2025)을 읽고
사물과 현상을 규정하며, 다르게 보고,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찾아내 시인만의 다채로운 언어로 사유하고 풀어쓴 시집을 만났다. 생을 관통한 주된 정서인 그리움과 자연에 감탄하며 삶과 감정을 풀어 독특하고 밀도 깊게 그려낸 시들을 읽으며 정혜진 작가가 해석한 세계를 따라가 본다.
우수에 물들어간 나뭇잎처럼
코끝 찡하도록
따스한 인정이 그리운
늦가을 뒤안길에서
무심코 마주한 연보랏빛 산국화
여름날 뜨거운 열기
유연한 몸부림으로 걸러내며
실낱같은 줄기 가락 지어
마알간 꽃술 피워 올리고픈 소망
절절히 감겨든 흔들거림이
차라리 애처롭다
해 질 녘 가로수 길 따라
떨어져 구른 낙엽 소리 들으며
스산한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있을
진한 그리움
연보랏빛 서녘 하늘에
사무친 그리움 들어 올려
기다란 추억 속에 고이 담아
가을을 묻는다.
― 「그리움 속에 가을을 묻고」 전문 (p28)
가을 정취 물씬 풍기는 진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시다. 작가의 애창곡인 “옛 시인의 노래”가 떠오른다. 우연히 마주한 산국화에서 절절한 그리움을 떠올리는 깊은 정서가 느껴져서 몇 번을 다시 읽게 된다. 가을 속에 그리움을 묻는다고 보통은 생각할 수 있겠는데, 작가는 ‘그리움 속에 가을을 묻는다’라고 표현했다. 시인은 이렇게 다른 언어로 새롭게 규정하며 말해야 한다는 걸 알게 해 준다.
순간으로 스쳐간 오늘이
마음 자락 붙잡아
결코 지울 수 없는 지금
겹겹으로 밀착되어
잊힌 듯 가물거리다가도
선명하게 다가선 얼굴
되쏘임으로 일어나
영원하지 않은 시간 앞에 서 있다
지난날 눈길 마주하며
나란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던 길
그림자처럼 가까이 동행했지만
비바람 안개 거센 파도에 밀려나
흩어지고 사라진 자국만 남아 애달프다
언뜻언뜻 흐릿한 형상으로 부딪혀와
사념 어디만큼 차지하다가도
순간 가슴속에 묻히고 마는 사람
목이 메이지만 그뿐
영원하지 않은 시간 앞에서
눈물방울 같은 그리움에 젖는다
― 「그리운 사람」 전문 (p70)
「그리움」, 「흩날린 꽃잎으로 다가선 사람」, 「그리운 얼굴」에 이어 쓴 연작시 같은 시가 「그리운 사람」이다.
만남과 이별로 인한 진한 그리움은 반백 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질 것이다. 몇 편의 시들을 읽으며 절절한 아픔이 느껴진다. 하 많은 세월을 마음에 품고 살았으니, 이별도 이별이 아닌 것, 사라짐이 아닌 함께 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동행의 고마움이다. 작가의 삶의 길에 든든한 버팀목이자 환한 등불이 되었을 “그리운 사람”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보탠다.
참 많다
잠시
내 안에 머물다가
어느 순간 자취 감춘 손님은
순간순간
색깔까지 달리하며
기다릴 줄도
참아줄 아량도 없는 듯
시시때때로
표정까지 바꿔치기하는데 능숙해서
인내를 저울질해 대는
마음속 방문객
내킨 대로
분노를 일으켰다가
온화한 웃음 붙들었다가
순간순간 변덕스럽게
하루에도 몇 번씩
종잡을 수 없는 색깔 드러내며
마음 온도계 쥐고 있는 변덕스러움
분위기쯤 아랑곳하지 않는 손님이지만
덤덤하게 버려두기엔
아직 길들임으로 평정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여력에 의존하여
조금씩 떨쳐내고 있는 속박의 굴레
이 또한 희망이다
― 「내 안의 방문객」 전문 (p102~103)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시인과 촌장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내 안의 방문객은 늘 우리들 마음을 지배하는 감정에 대한 시다.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지만, 나의 몸 외부의 사정에 의해 내 속의 여러 감정이 일으켜지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표출되기도 한다.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도 저절로 일으켜지는 마음의 갈래를 단단하게 붙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평정심을 찾고자 부단히 애쓰며 매사에 기원의 힘으로 살아가는 작가의 맑고 순수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막힘 앞에서도
거뜬하게 올라챌 준비 멈추지 못한
서러운 인생아!
살아온 날들 언저리에서
훼방 놓듯
밀어닥친 거센 파도처럼
아픔만 주던 운명아!
어차피 부딪혀 이겨낼 의지
잃지 않았거늘
이제는 그만
힘든 차단막일랑 걷어치울게
살아낼 힘 아껴둔 지금
고난 딛고 일어설 수 있으니
절망하지 않음에 감사하며
스스로
조심스럽게
발걸음 내딛고 있지 않니?
― 「굴곡」 전문 (p118~119)
살아가는 일은 한고비를 넘기면 또 한고비가 있더라. 마치, “이래도 살 수 있어?”라고 묻는 것 같기도 하더라. 「굴곡」을 읽으면 힘이 솟는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의지가 읽힌다. “운명아! 덤벼!”라고 말하는 듯하다. 굳은 의지로 삶의 굴곡에 굴하지 않고 숱한 난관을 뚫고 운명 앞에 우뚝 선 작가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운명을 의지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을힘을 다해 피 울음을 삼키며 용기를 냈을 것이고, 오늘의 성공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쉼 없는 노력의 산물이다.
해넘이 노을빛 채색에 잠기고
사그락 자글자글
잔잔한 물결 소리 어둠 불러내
둘레 길 이음줄에 기댈 때쯤
나무도 풀잎도
푸른빛 내려놓고
회색 안에 침묵한다
사방이
소리 낮춰 명상에 잠기고
바닷물에 스며든
우주의 광폭과 하나 된 순간
집 떠난 여행지에서
달빛 마중받으며
밤을 맞는 느낌이 새롭다
넓게 펼쳐진 물 마당 지나서
거실 안까지 찾아와 너울거린
풀잎 그림자
그리운 얼굴로 형상 지어
가깝게 다가선 달빛 그림이
오늘따라
젖은 추억의 끈 풀어내게 한다
― 「바닷물에 젖어 든 달빛 그림」 전문 (p124~125)
바닷가에서 만나는 둥근 보름달을 좋아한 작가의 마음이 보인다. 출렁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온 세상이 ‘회색’으로 번져가며 침잠하는 순간의 고요와 경이로움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도 감출 수 없는 것. “우주의 광폭과 하나 된 순간”에는 참았던 그리움도 증폭되는 것이리라. 자연은 달빛을 바다에 풀어 온 우주에 그림을 그리고, 작가는 그리움을 풀어 넓이와 깊이를 잴 수 없는 또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
정혜진 작가의 시집 『너나들이 향기 꽃』
마지막 장을 빠져나오며 작가의 시선을 따라 긴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다. 작가의 고향을 한 바퀴 돌았고, 거문도, 백도, 거금도 등 바다를 유영하는 영혼을 가진 작가의 바다처럼 넓고 큰 품을 생각해 본다. 작가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눔과 베풂의 발걸음,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하는 성정과 큰 덕목이 그의 삶에 닥친 역경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시집에서 안타까운 사회현상, 우리 곁을 떠나간 인물들, 인간적 고뇌 등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작가 스스로 자연에 물드는 삶을 토대로 광활하고 밀도 깊은 서정적 감성을 그리고 있다. 넓고 깊은 사유의 길에서 뭐라 덧붙일 나의 말이 부족하다.
귀한 시집을 선물해 주신 작가님께 평안을 기원하며 캔자스의 "Dust in the Wind"를 보내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