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줄 달고 미국 여행
샌프란 도착 셋째 날은 아들이 공부한 스탠퍼드 대학과 현재 근무하고 있는 애플본사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사실 우리 부부가 남편의 건강에도 불구하고 굳이 미국에 오려고 했던 제일 중요한 이유도 아들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위와 딸이 여느 때처럼 아들 집으로 왔는데 어째 분위기가 싸했다. 어젯밤에 둘 사이에 뭔가 다툼이라도 있었던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사위는 뉴욕에서 올 때 허리 벨트를 잊어버리고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장모님 죄송합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내게 죄송할 일은 아닌데 왜 그런가 했더니 셔츠를 바지 속으로 밀어 넣지 않고 밖으로 빼고 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옷차림이라는 것이었다. 처가에 대한 드레스코드인가 싶어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런 사위가 좋았다.
그래서 먼저 스탠퍼드 대학 근처의 아울렛으로 가서 사위의 허리벨트를 사기로 하였다. 대학 근처의 아울렛이라고 하여 작은 규모의 쇼핑몰을 생각하였는데 그곳은 의외로 크고 화려했다. 특히 가드닝에 신경을 많이 쓴 듯 화단에 갖가지 예쁜 꽃들이 싱싱하게 피어있었다. 딸은 헤르메스 매장에 들어가 나올 줄을 몰랐고 나는 꽃밭에 엎어져 꽃을 바라보느라고 넋을 잃었다. 역시 보라색 꽃이 대세였다.
사위가 새 벨트를 매고 셔츠 자락을 바지 안에 밀어 넣은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셔츠를 안으로 밀어 넣으니 사위의 배가 더 앞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식사를 하자 불편함을 느낀 듯 사위는 다시 셔츠를 밖으로 내어 배를 감쌌다.
우리가 애플 파크의 방문자센터에 도착하자 아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의 가슴에는 애플의 사원증이 꽂혀있었다. 나는 아들의 사원증을 바라보며 무언가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꼈다. 월급쟁이 생활에 아들딸을 유학시키느라 별로 남은 것도 없는 우리 부부의 인생이지만, 그 결과 아들이 저 자랑스러운 사원증을 달고 있으니 그러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자센터 근처에는 올리브 나무가 가득 심겨 있었다. 왜 이곳에 올리브나무를 심었을까 잠시 의아했지만 이것이 팀쿡 회장의 친환경적 소신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회사의 친환경적 분위기는 방문자센터 곳곳에서 느껴졌다. 건물에 목재를 많이 사용하였고 계단도 손잡이도 아이폰처럼 둥글게 마감처리되어 따뜻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 세계 최고의 기업은 이미지 관리에도 매우 신경 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멀리서 봐도 회사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보였다.
우리가 아들의 근무지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었으므로 아들은 방문자센터에 마련되어 있는 회사의 모형 앞에서 내부 구조를 설명해 주었다. 모형에 의하면 애플본사는 넓은 구릉 위에 우주선이 내려앉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들은 AR장치가 있는 패드를 가지고 와서 실제인 듯 사무실 모양 등을 보여주었다.
이층에 올라가면 원형건물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여 우리는 모두 2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층에도 멋진 나무벤치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날씨가 너무 뜨거워 벤치에 앉아 전경을 감상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유리 난간에 기대 멀리 보이는 원형의 애플 본사를 잠시 응시하였다. 아들이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자랑스러웠다.
아들은
“부모님의 헌신으로 오늘의 제가 있게 되었으니 이 사원증을 아부지에게 드립니다”
라고 하며 애플 사원증을 아빠 셔츠 주머니에 꽂아주었다.
아들이 많이 컸다. 이런 말도 할 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방문자센터 뜰에 세워진 애플 로고 앞에서 다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애플의 로고는 ‘한입 베어 먹다만 사과’로 유명하다. 이 로고는 독이 든 사과를 베어 먹고 자살한 앨런 튜링(Alan M. Turing)과 관련이 있다. 그는 최초로 컴퓨터를 개발한 사람이다.
아들이 애플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긴장이 된다면서 내게 전화한 날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6명의 인터뷰어들과 차례로 하루 종일 심층 면접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예상 문제 하나를 집어주었다. 분명 누군가는 애플의 로고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물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앨런 튜링에 대한 스토리를 요약하여 들려주었다. 내용은 이랬다.
1912년 영국에서 출생한 앨런 튜링은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였다. 22세가 되던 1935년, 튜링은 저명한 독일 수학자 David Hilbert가 선정한 아주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힐베르트의 논리 문제를 단계별로 쪼개어 수행할 수 있는 기계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명령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는 없고 다만 수행하기만 하면 하는 그런 기계였다. 튜링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행동들을 단순한 논리적 단계로 쪼개어 기계에 입력하면 기계가 모두 수행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튜링은 인간의 온갖 과제를 수행해 줄 범용기계를 만들고자 분투했다. 그러나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2차 대전 중 그는 영국정부의 독일 암호 해독팀에 고용되어 일했다. 이때 그는 범용 컴퓨터에 매우 가까운 무언가를 만들었다. 이 기계는 계산기보다는 뛰어났으나 프로그램이 가능한 진정한 의미의 컴퓨터는 아직 아니었다.
그런데 1952년 튜링은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2차 대전 시 영국 정부를 위해 일했던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감옥에 가는 대신 여성호르몬 복용의 처벌을 받았다. 호르몬 처방이 계속되자 튜링은 여자처럼 가슴이 발달하고 있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1954년 6월의 어느 비 내리던 저녁, 튜링은 청산가리를 묻힌 사과를 베어 물고 자살했다.
이후 엘런 튜링은 이론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 분야에 미친 그의 지대한 공헌으로 인해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애플 사는 상업용 컴퓨터를 개발하면서 ‘컴퓨터의 아버지’인 튜링을 기념하여 베어 먹은 사과모양의 로고를 채택하였다.
이것이 내가 아들에게 알려준 애플 로고의 비밀이었다.
사실 이 내용은 아들이 유학을 떠난 뒤 아들의 책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책(일렉트릭 유니버스)에서 읽은 내용이었다(아들은 그런 책이 있었는 줄도 모를 것이다).
뒤에 물어보니 인터뷰어 누구도 애플의 로고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초보적인 문제였거나 인터뷰어들이 역사에 관심이 없었던 가 보았다. 나는 뻐길 기회를 놓쳤지만 아들이 애플사를 다니는 한 앨런 튜링에 대해 알아야 된다고 나 자신을 변명하였다.
애플을 주마강산으로 둘러보고 아들이 졸업한 스탠퍼드대학으로 갔다.
스탠퍼드대학은 캠퍼스가 크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과연 캠퍼스에 들어서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스탠퍼드의 주랑이 쭉 연결된 메인 쿼터가 나타났다. 지중해식 붉은 기와지붕의 나지막한 건물 앞에는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오른 워싱턴야자나무들이 멋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학교라기보다는 고급 리조트 같은 인상이었다.
이곳에서 83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배출되었고 현재도 17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몸담고 있다고 하였다.
“아! 이런 곳에서 아들이 공부했다니 얼마나 좋은가”
아들은 우리에게 도서관을 보여주고 싶어 하였다. 도서관 출입을 위해서는 모두 방문증을 만들어야 했는데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우리는 아들이 안내하고 싶어 하는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참고서적들을 볼 수 있는 열람실이었다. 아들은 이곳에서 엉덩이가 물러지도록 공부했노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가끔 걸려오는 아들의 전화를 통해 아들이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현장을 직접 대하고 보니 새삼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을 견뎌준 아들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스탠퍼드대학은 철도사업으로 거부가 된 릴랜드 스탠퍼드 부부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되었다. 이 아름다운 대학의 탄생에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스탠퍼드 부부에게는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16세의 나이로 장티푸스에 걸려 갑자기 죽고 말았다.
릴랜드 스탠퍼드는 절망과 상실감에 빠져있던 아내를 위로하며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을 모두 우리의 자녀로 삼읍시다"
라고 말하며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천만 평에 달하는 팔로 알토 말목장을 대학 부지로 내놓았고, 이것이 오늘날 스탠퍼드대학의 시작이 되었다. 통상 스탠퍼드대학이라고 불리는 이 대학의 정식 명칭은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 대학 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이다.
캠퍼스 안에는 스탠퍼드 일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이곳에서 1세대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을 대표하는 휴렛 패커드를 비롯해 인터넷 검색 신화의 시작이던 야후, 구글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기업인들이 잉태되었다.
신학기여서 인지 캠퍼스에는 학생자치 서클을 광고하고 후배들을 뽑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신학기 특유의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대학에서 느껴지는 활기를 가슴 깊이 들이켰다. 그리운 냄새였다.
아들이 바빠 스탠퍼드를 겉핥기로 둘러보았으므로 뒷날 남편과 나는 칼트레인을 타고 스탠퍼드를 다시 방문하였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써보겠다.
이날 저녁, 딸과 사위는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진다고 나가고 남편과 나는 아들네에서 집밥을 먹기로 하였다. 며느리가 직장에서 달려와 아들과 힘을 합쳐 허급지급 저녁을 지었다. 된장국에 고기를 굽고 김치와 함께 흰밥이 뚝딱 완성되었다. 가만히 보니 며느리는 불룩한 배를 안고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고 아들도 앞치마를 두르고 며느리와 함께 열심히 저녁을 준비하였다. 영락없는 잉꼬부부처럼 보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들이 진지한 얼굴로
“아부지, 어머니, 저희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라고 말하였다.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연해졌다.
오늘 내내 아들의 족적을 따라서 스탠퍼드대학과 애플사를 가본 나는 아들이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세계 최고의 기업에 근무하는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나는 복잡한 한국사회를 떠올렸다. 서울의 복잡함과 한국 기업의 터프함과 경쟁 속에 시달리는 한국의 아이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무엇보다 미친 집값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아들 내외뿐만 아니라 태어날 손자도 스트레스 덜한 환경에서 살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미국은 글로벌 원의 유일한 나라이다. 나라도 크고 부자이고 자유롭다.
“왜 이 좋은 나라를 떠나려고 할까? 아들은 혹시 회사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일까? ”
나는 걱정이 되어 속으로 자문하였다.
나는 아들에게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아들의 답이 의외였다. 아들은 한국의 끈끈한 정이 그립다고 하였다. 친구들과의 왁자한 만남, 회사를 파한 후 동료들과 즐기는 삼겹살과 소주의 저녁도 그립고 부모형제와 어울려 명절도 보내고 싶다고 하였다. 특히 아버지가 아프고 보니 부모를 볼 날도 많지 않을 것 같아 부모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동안 아들이 겪었을 외로움을 깨달았다.
나는 참 바보 같은 엄마다! 그 생각은 못하고 아들이 처한 외형에만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구나. 미국은 겉보기에는 근사하게 보여도 드라이한 나라구나. 아들은 한국적인 정이 그리운 게로구나.
그날밤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였다. 남편은 아들이 이미 성인이고 우리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할 것이니 우리가 나서서 아들 미래에 영향을 주지 말자고 하였다.
그러자 낮에 본 근사한 스탠퍼드 캠퍼스의 모습과 애플사의 멋진 풍경이 신기루처럼 눈앞을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