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줄 달고 미국 여행
아들이 특별히 마련한 여행은 나파밸리에서 온 가족이 사흘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 여행을 끝으로 딸 내외는 뉴욕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나파밸리에서의 여행은 흩어져 있던 가족이 재결합하는 의미 깊은 행사가 될 참이었다.
아들은 우리 가족이 머무를 산장과 와이너리 세 곳을 예약해 두었고 분위기 파의 딸은 예약하기 어려운 미쉐린 쓰리 스타의 식당을 예약해 두었다고 은근히 자랑하였다.
무엇보다 나파밸리는 딸과 사위가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매우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몸이 무거운 며느리를 걱정하여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지만 며느리는 밤새 고심하더니 아침이 되자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산달이 가까워 오는 며느리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것도, 집에 남아있는 게 어떠냐고 하는 것도, 어느 것도 편치 않는 제안이었지만 다행히 며느리가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 온 가족이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파밸리는 샌프란시스코 시로부터 약 60km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들 집이 있는 마운틴 뷰에서 나파밸리까지는 2시간 가까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가르는 노선은 복잡하여 산호세 위의 밀티파스를 지나 내륙으로 가는 경로를 택하였다. 가는 도중 세계적 IT 기업들이 길가에 띄엄띄엄 보여 과연 여기가 실리콘 밸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는 길 옆으로는 누런 산들이 계속 이어져있었고 어느 지점에서는 광활한 서부의 풍경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나는 예전에 본 영화 <Far and Away>를 떠올리며 지평선이 까마득하게 펼쳐지는 서부 모습을 기대하였다. 내가 나파를 향하면서 노래를 불렀던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의 모습은 그 뒤 <그랜드 서클 투어> 때 실컷 볼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는 온화한 날씨 탓인지 포도재배에 적당한 곳이라고 한다. 나파밸리가 워낙 유명하기는 하지만 나파밸리로 가는 도중에도 넓게 펼쳐진 포도밭을 볼 수 있었다.
실리콘 밸리의 왼쪽 사면에 위치한 산타크루즈 산맥 지역에도 포도재배와 와인생산에 적당한 환경이 조성되어 그곳에서도 훌륭한 포도주들이 생산되고 있다고 들었다.
나파밸리는 그 이름처럼 산맥과 산맥사이에 길게 자리 잡고 있는 계곡이다. 계곡의 길이는 약 30마일(50 km) 가량이고 폭은 가장 넓은 지역이 5마일, 가장 좁은 지역은 1마일 정도라고 한다. 계곡 안에는 대부분 포도나무가 심겨 있었다.
포도꽃이 피면 이 골짜기에 온통 꽃향기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포도꽃이 필 시기가 아니어서 꽃향기가 넘실거리지는 않았으나 포도나무에 까만 포도들이 여전히 달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파밸리의 포도나무들은 우리나라에 비해 키가 나지막하여 신기했다. 게다가 포도 알갱이도 작아 마치 머루포도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까베르네 쇼비뇽 포도를 보았다. 까베르네 쇼비뇽 포도주를 즐겨마셨으면서도 그 포도 품종을 처음으로 보았으니 이런 것이 와이너리 투어의 매력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먹는 알갱이가 큰 포도는 캠벨이라는 포도 품종이다. 나는 이 캠벨이 실리콘 밸리에 소재한 캠벨 시티와 관련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 포도를 개발한 사람의 이름이 캠벨(Campbell)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캠벨포도는 당도도 낮고 신맛도 강해 포도주용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했는데 단지 알갱이가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애용되고 있다니 신기했다.
나파밸리에 도착하여 어느 식당에서 브런치를 겸한 점심을 먹다가 딸과 사위가 처음 만난 곳이 이 근처에 있는 와이너리라는 말을 들었다. 딸과 사위는 각자의 친구의 결혼 들러리로 참가했다가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딸의 대학 친구가 나파의 한 와이너리에서 결혼식을 하면서 딸을 신부 들러리로 초대하였다. 당시 딸은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뉴욕에 살고 있던 사위가 신랑 들러리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때 둘 사이에 로맨스가 싹터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었으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한 데가 있다. 나는 딸과 사위가 처음 만난 그 와이너리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 있어 그곳까지 갈 수는 없다고 하였다. 좀 서운하였지만, 딸과 사위가 처음 만난 곳에 가까이 왔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파밸리가 좋았다.
아들이 예약해 둔 첫 번째 와이너리는 <Artesa>라는 곳이었다. 알테사 와이너리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나파밸리의 와이너리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점은 있었지만 별로 특색 있는 와이너리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알테사에서 와이너리 순례에 대한 호기심을 잃을 뻔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찾은 두 번째 와이너리에서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날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미쉐린 쓰리 스타 식당에서의 식사였다.
나는 음식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는 편이어서 맛집을 찾아 열성을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가난하게 자란 습성인지도 몰랐다. 아마도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대게 배를 채우는 한 그릇의 음식에 만족하지 굳이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미쉐린 쓰리 스타 식당에서 나의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식당에 관한 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면 딸이 어렵게 예약했다고 자랑하던 <The French Laundry>라는 식당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세탁소가 있던 건물을 리노베이션 하여 프랜치 식당으로 만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
딸이 드레스 코드를 맞추어야 한다고 엄포를 놓기에 나도 며느리도 원피스를 꺼내 입었고 남편도 양복 윗도리를 걸쳤으며 사위도 상의 깃을 바지 아래로 밀어 넣어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그래놓고 정작 딸 자신은 구두 챙겨 오는 것을 잊어 샌들을 신고 식당에 입장해야 했다. 샌들 때문에 입장을 제지당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식당은 밀려드는 손님들을 좀 더 받으려고 식탁사이의 간격을 약간 좁혀두기는 했지만 모든 것에 품격이 넘쳤다. 서비스도 훌륭했고 음식도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맛있었다. 거기다 와인을 추천하는 소믈리에의 은근한 태도는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였다. 나는 완전히 황홀해졌다.
여기 와서 안 사실이지만 사위가 소믈리에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는 와인 전문가라는 사실이었다. 사위의 와인에 대한 높은 식견은 이 식당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사위가 소믈리에와 주문할 와인에 대해 의논하는 것 같더니 우리가 주문한 와인 외에 고급 와인을 엑스트라로 맛보는 행운을 누렸다.
딸이 아빠의 생일이라고 식당에 미리 귀띔을 했던지 생일 축하 케이크가 불꽃과 함께 도착하여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며칠 뒤가 남편의 생일이었다. 나는 평소 딸의 기획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파밸리에서 다시 한번 딸 때문에 놀라고 감동하였다.
그때 매니저가 우리 식탁에 오더니 주방을 공개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방 구경을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매니저는 스페셜 케이스라고 하며 은근히 우리에게 특전을 베푸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아마도 아빠 생일을 위해 자기들의 식당을 찾아온 동양인들에게 무언가 호의를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주방 안은 너무 깨끗하고 셰프들도 하나 흐트러짐 없이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과연 미쉐린 쓰리 스타를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딸부부가 식사비로 꽤 많은 돈을 썼겠지만 우리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식당 밖에서 찍은 사진이 만족했던 당시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우리가 산속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였을 때는 밤이 되어 있었다.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휴대폰으로 담을 수 없는 <별 쏟아지는 밤>이었지만 그냥 추억을 위해 이 사진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