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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Sep 29. 2024

16. 새 세 마리

<양재천 산책>


양재천을 걷는데 눈앞에 직박구리 세 마리가 나타났다. 이들이 나무 위에서부터 뭔가 긴박하게 움직여서 자연히 눈길이 가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한 놈이 입에 꽤 큰 곤충을 물었는데 다른 두 마리가 그의 뒤를 따르며 먹이를 나눠달라고 조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다 곤충을 문 새가 땅에 내려앉자 덩달아 두 마리도 같이 내려앉았다. 먹이를 문 놈이 먹이를 땅에 내려놓고 얼렀다가 다시 물기를 반복하고 다른 새들은 그 주위를 맴돌며 애원하는 모습을 한참을 계속했다. 새들은 그 놀이가 너무 재미있었는지, 혹은 간절했는지 사람들이 지나가도 별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다. 그러다 먹이를 문 새가 나무 위로 포르르 날아오르자 두 마리도 따라 나뭇가지로 날아올랐다. 가만히 보니 한 마리는 그냥 포기하고 나뭇가지에 앉았고 두 마리는 먹이 유희를 계속하며 이나무 저나무로 옮겨 다니고 있었다. 


양재천의 새 세 마리:가운데 놈이 벌레를 잡았고 다른 두 마리는 나눠먹자고 졸라대고 있다.



새 세 마리의 유희를 잠시 보면서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인 유전자>가 떠올랐다.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새들의 행동을 묘사한 부분이 특히 나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새들은 수컷이 암컷에게 구애할 때 먹이를 잡아 바친다고 한다. 암컷은 먹이를 잡아주는 수컷에 당연히 마음이 끌리게 되지만 그렇다고 먹이만으로 쉽게 동거를 허락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암컷은 당장의 먹이도 좋지만 신중하게 상대방의 행동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 관찰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상대가 동거할 집을 얼마나 성실하고 꼼꼼하게 짓느냐 하는 것이란다.  암컷이 이렇게 신중하게 상대를 고르는 이유는 알을 낳은 뒤 수컷이 다른 암컷을 유혹하기 위하여 가족을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수컷은 자기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한 암컷과의 교미에 성공하고 나면 다른 암컷에게로 눈을 돌린다고 한다. 암컷은 말하자면 자기를 유혹하는 상대가 성실한 아버지가 되어 자식의 부양을 책임져 줄 상대인지 바람둥이로서 가족에게 고통만 안겨줄 상대인지를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나는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새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도출한 위 글이 매우 마음에 남았다. 


둥지를 짓는다는 것은 인간으로 치면 집을 짓는다는 것인데, 우리가 집을 짓는 것은 일생에 한번 해볼까 말까 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런 집을 한 파트너와 태어날 새끼를 위해 꼼꼼하고 성실하게 지으려면 성실한 성정이 필수로 요구될 것이다. 사람의 경우 성실함의 판정기준은 다양할 것이다. 그 사람 자체의 언행을 통해서 평가할 수도 있고 부모의 됨됨이를 살핀다든지 친구들의 평판 등도 참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새들의 경우는 성실함의 판정 기준의 제1순위가  둥지를 짓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기를 위해 집을 지어줄 때 집 짓기의 어려움을 깨닫게 하여 또다시 다른 암컷을 유혹하기 위하여 먹이를 잡아주고 집을 짓는 일을 벌일 엄두가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 선택한 짝과 함께 새끼를 키우며 사는 방식이 차라리 에너지가 덜 드는 까닭에 바람둥이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킨스가 말하는 현명한 암컷은 신중하게 성실한 수컷을 골라 수컷과 함께 알콩달콩 새끼를 키우며 행복하게 사는 새이다. 그러나 모든 새들이 이렇게 현명하냐 하면 물론 그렇지 않다. 어리석은 암컷은 수컷의 먹이에 솔깃해 신중하지 못하게 동거를 시작했다가 혼자서 피눈물을 흘리며 새끼를 키워야 하니까. 


봄철 벚꽃 구경을 하느라고 양재천에서 넋을 빼고 있을 때 곁에 까치가 살며시 다가와 놀란 적이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놈은 벚나무에 둘러 논 야자 펄프에서 섬유 한가닥을 빼고 있었다. 요즈음 야자 펄프로 만든 카펫이 친자연소재라 공원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펄프만치 까치집 짓는 데 도움이 될만한 재료가 없겠다 싶었다. 천연소재인 데다 나뭇가지보다 훨씬 부드럽고 얼마든지 변형가능하다.  이런 집을 지어주면 암컷 까치도 기꺼이 부부가 되기로 동의할 것 같았다. 


눈앞에서 먹이를 가지고 희롱하던 새들은 날아갔지만 나의 상상력은 계속 나래를 펼친다. 끈질기게 쫓아간 새는 결국 먹이를 얻었을까? 두 마리의 새 중 수컷이 먹이를 주고 싶어 했던 새가 바로 그 적극적인 새였을까? 아니면 포기하고 뒤쳐져 버린 새에게 더 마음이 갔을까? 수컷은 그 먹이로 인하여 암컷의 마음을 사게 되었을까? 

결국은 암컷이든 수컷이든 적극적인 놈들이 사랑을 쟁취하고 새끼를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먹이에만 신경 쓰지 말고 신중하게 수컷의 성실함을 테스트하여 꽃길을 걷는 암컷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새들이 이러할진 데 사람 사이의 신중함은 얼마나 중요할까. 찰나적인 사랑에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면 사랑에 충실한 그 마음에 감동이 되다가도 신중하지 못한 새의 암컷처럼 일생을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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