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산책>
어릴 때 내가 살던 고향 집 마당에 오동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이 오동나무에는 둥글고 길쭉한 모양의 열매가 열렸는데 가을에 이 열매가 익으면 열매가 쪼개지면서 그 끝에 둥근 모양의 종자가 매달렸다. 종자에 기름이 많아서인지 깨물면 고소한 맛이 났다. 어릴 때는 무언지도 모르고 볶아 먹었는데 뒤에 알고 보니 그게 벽오동 나무 종자였다.
후일 안 사실이지만 마당에 벽오동 나무를 심은 사람은 우리 아버지였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딸을 셋이나 두고도 오동나무는 심지 않고 왜 벽오동 나무를 심었을까?
어려운 가운데 육 남매를 키우느라고 고생한 우리 엄마는 자주 아버지의 비현실적인 낭만주의를 비난하곤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아버지가 벽오동 나무를 심은 뜻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하게 되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내 심은 탓인가 기다려도 아니 온다
무심한 일편(一片) 명월(明月)이 빈 가지에 걸렸어라
양재천에도 벽오동 나무가 있다. 타워팰리스 쪽의 영동 3교에서 밀미리 다리 쪽으로 가다가 양재천 쪽을 내려다보면 푸른 줄기의 벽오동 나무들이 숲 여기저기서 보인다. 왜 이곳에 유독 벽오동 나무가 군락을 이루었을까 궁금하여 사방을 살펴보았더니 도로 건너편 개포우성 4차 아파트 담장 안에 벽오동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다. 담장나무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벽오동 나무를 굳이 울타리 나무로 선택한 것이 이곳 주민들의 뜻이었을까 아니면 조경업자의 취향이었을까가 궁금하였다.
아파트의 담장을 벽오동으로 두른 이유는 알 수 없으되 저곳에 있는 벽오동나무에서 종자가 양재천까지 날아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양재천의 벽오동나무는 날씬하게 위로 곧게 뻗어 올랐고 줄기가 생생한 녹색을 띠고 있어 일견 상스럽게도 보인다. 그러나 너무 날씬하게 뻗어 오른 저 나무에 봉황이 내려와 앉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양재천을 걷다가 벽오동나무를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에 대해 뭐라고 쓰기는 어렵다. ‘아버지!’라고 하면 너무 복잡한 여러 감정들이 뒤 엉겨 휘몰아쳐 온다. 우리 아버지는 한마디로 무골호인이셨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당신께서 술을 몹시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던 조용한 분이셨는데 술을 드시면 가끔은 호기를 부려 우리에게 용돈도 주시고 하여 우리는 아버지가 얼큰하게 취하여 돌아오시는 날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있어 우리에게 썰매나 연을 만들어주시면 동네 아이들이 부러워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의 아버지는 별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했던 듯하다. 특히 소를 팔고 장에서 술 한잔을 하고 돌아오다가 강도에게 소 판 돈을 몽땅 빼앗긴 사건은 유명했다. 이 일로 아버지는 두고두고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 있는 줄을 몰랐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아버지가 그리웠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남겨놓은 사진 한 장이 있다.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큰 괘종시계 옆에 서 계신 멋진 모습이다. 일자리를 찾아 일본에 가셨던 당시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그 사진 속의 아버지는 젊고 잘생겼다. 이쪽을 바라보고 계시는 아버지의 눈길은 낭만적인 멜랑콜리가 스며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나는 이제 생각한다. 아버지에게도 청춘과 희망과 인생에 대한 꿈이 있었을 것이다. 일제의 암울한 시대였지만 아버지는 소망을 담아 당신 마당에 벽오동나무를 심으셨던 것은 아닐까?
양재천을 걷다가 벽오동나무를 보면 오동나무의 실용성보다는 벽오동의 이상을 선택한 아버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