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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Sep 30. 2024

22. 느릅나무와 <침묵의 봄>

<양재천 산책>



조지 오웰이 쓴 <1984년>에 느릅나무와 관련된 묘사가 나온다.

거대한 감시사회에 사는 한 쌍의 연인이 몰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시골의 숲 속을 찾아 나서면서 그들이 발견한 아지트의 묘사 장면이다.  


... 건너편 울타리에는 느릅나무 가지들이 미풍에 흔들리고, 무성한 이파리들이 여인의 머리칼처럼 가볍게 살랑거리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은 개인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빅 브러더 전체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를 보여준 정치색 짙은 작품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의 식물에 대한 통찰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느릅나무의 늘어진 이파리들을 여인의 머리카학으로 묘사할 수 있었을까! 영국 사람인 조지 오웰이 그의 소설에서 느릅나무를 이렇게 묘사한 것을 보면 영국에도 멋진 느릅나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양재천에 참느릅나무와 비술나무가 자라고 있다. 참느릅나무는 대치교에서 서초구가 시작되는 곳까지 양재천변 양쪽에 식재되어 있고 비술나무는 타워팰리스 쪽 영동 3교에서 영동 4교를 향하여 난 중간길 초입에  한 그루가 서 있다. 


참느릅나무와 비술나무는 모두 느릅나무속이다.  느릅나무속은 전 세계적으로 약 30종이 북반구의 온대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약 7종이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느릅나무뿐만 아니라 비술나무, 당느릅나무, 중 느릅나무, 왕느릅나무, 난티나무, 참느릅나무 등이 속한다. 


양재천의 참느릅나무 가로수길


느릅나무는 속성수로 빨리 자라는 편인데도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고 무거우며 탄력성이 좋아 가구, 건축, 선박재로 사용되고 있다. 느릅나무 목재가 건축재로 하도 인기가 많자 신라시대에 4두품 이하의 하급관리는 느릅나무 목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느릅나무의 용도는 구황작물과 약용으로서의 용도였다. 느릅나무가 구황작물로 사용된 이유는 느릅나무 수피 아래의 속살은 달콤한 맛이 나고 나무줄기 껍질이나 뿌리껍질을 벗겨 물에 담가 놓으면 코처럼 끈끈하면서 흐물거리는 액이 생기는데 그것을 먹으면 배고픔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끈끈하면서 흐물거리는 액이 나오는 과정을 '느름 해진다'라고 표현하고 거기서 느릅나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하니 이름에서부터 느릅나무의 주 용도를 알 수 있겠다.

‘평강공주와 온달’ 이야기에도 느릅나무가 나오는데, 평강공주가 온달의 집을 찾았을 때, 온달은 식량이 없어 산으로 느릅나무껍질을 채취하러 가고 없었다. 느릅나무의 어린순은 맛이 순해 찹쌀가루나 밀가루에 섞어 느릅떡을 만들어 식량을 증량했다고도 한다. 


느릅나무의 끈적끈적한 점액은 배고픔을 막아주는 작용을 했을 뿐 아니라 종기나 종창을 치료하는 데에도 좋은 약이 되었다. 옛날에 불결한 위생환경 때문에 종기가 많았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 종기가 난 머리의 주변 머리카락을 자르고 고약을 붙인 모습과 빤질빤질하게 코가 묻은 옷소매였다. 그럴 때 느릅나무줄기를 으깨어 종기에 바르면 감쪽같이 나았다. 느릅나무는 염증에 좋은 약이어서 요즈음에도 위장병, 장염, 기관지염, 비염의 치료에 쓰인다. 피부염에도 효과가 있어 아토피 치료에도 쓰인다고 한다. 

이렇게 느릅나무가 전통적으로 귀한 민간 약재로써 사용되어 오면서 약초꾼들의 무분별한 수피 채취로 산에는 느릅나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미국에서도 느릅나무는 사랑받는 나무였다. 미국 느릅나무인 Ulmus Americana는 북아메리카 동부 원산으로 노바스코샤 서부에서 앨버타와 몬타나, 남부에서 플로리다 및 중부까지 자란다고 한다. 네덜란드 느릅나무병이 들어오기 전까지 미국에는 30미터 이상, 1.2미터 둘레로 자라는 200년 이상 된 멋진 느릅나무들이 많았다고 한다.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이라는 연극은 느릅나무 두 그루가 있는 농가에 사는 사람들의 탐욕과 치정에 관한 이야기를 그렸다. 


그런데 20세기 초 이 나무에 느릅나무시들음병(Dutch Elm Disease)이 생기면서 유럽과 미국의 느릅나무가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 DED가 느릅나무에 얼마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던지 20세기 세계 3대 수목병에 해당할 정도로 유명하였다. 

느릅나무 시들음병은 1917년 프랑스에서 처음 보고되었고 1921년 네덜란드에서 보고된 후 유럽, 아시아의 일부, 그리고 북미로 전파되었다. 미국에는 1930년경 유럽에서 오는 느릅나무 목재를 따라 들어왔는데, 매개충인 유럽 느릅나무 딱정벌레(European elm bark beetle)도 따라 들어왔다. 이 병은 1930년대 초반에 오하이오와 동부 해안의 일부 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서쪽으로 퍼져 나가 1973년에는 태평양 연안까지 전파되었다. 이 병은 대부분의 느릅나무 종에 발생했지만 미국 느릅나무에 가장 큰 피해를 줬다. 미국 도시 느릅나무 10만 그루 중 1그루 정도만 살아남을 정도로 참혹한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DED의 원인은 곰팡이균인데 딱정벌레가 나무껍질에 구멍을 뚫는 과정에서 병균을 옮기게 된다. 곰팡균이 나무에 침입하면 곰팡이가 생산하는 독소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나무가 병균의 확산을 막기 위해 스스로 물과 영양분의 운송 체계를 틀어막는 바람에 잎이 노랗게 변하며 시들어 죽고 만다고 한다. 느릅나무 시듦병  때문에 매년 미국 도시에 있는 수십만 그루의  느릅나무가 죽었다. 


이에 미국에서는 화학약제를 항공방제로 집중하여 살포하기 시작하였다. 2차 대전 후 비행기가 많이 남아돌던 시점이었다. 적은 양이 살포된 1954년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곧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징조들이 나타났다. 화학물질이 살포된 지역에서 더 이상 울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들을 수 없이 된 것이었다. 미국에서 울새 소리는 봄을 날리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강력한 농약은 느릅나무 딱정벌레뿐 아니라 가루받이를 돕는 곤충 등 모든 곤충을 죽였다. 느릅나무도, 새도 죽었고 천적도 죽었다. 


그리하여 1962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출간되었다. 그녀는 인간과 지구를 죽이는 화학물질, 특히 토양에 뿌려지는 살충제의 위험성을 낱낱이 밝히며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파괴되는 야생 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책이 출간되자 그녀에 대한 언론과 화학업계의 양동 협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농약제조업체들은 살충제가 인간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며 “레이첼 카슨의 잘못된 주장이 문명을 중세 암흑시대로 되돌려 놓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또 저널리스트와 평론가들은 카슨을 “결혼하지 않은 히스테릭한 여성”이며 그녀가 쓴 책은 “자신이 저주하는 살충제보다 더 독하다”며 인신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의 비난과 화학업계의 거센 방해에도 불구하고 카슨의 <침묵의 봄>은 국민적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카슨의 책에 감명을 받은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환경 문제를 다룰 자문위원회를 구성했고, 1969년 미국 의회는 국가환경정책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암연구소는 DDT의 암 유발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각 주들의 DDT 사용 금지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 느릅나무가 양재천에서 번성하고 있다. 이름은 참느릅나무와 비술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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