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여행이었나?
허드슨 강변에 있는 작은 도시 비콘(Beacon)으로 가게 되었다. 비콘은 뉴욕시에서 허드슨 강을 따라 북쪽으로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유명한 현대미술관인 디아 비콘(Dia Beacon)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뉴욕시에서 가깝고 디아 비콘이 있으며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작은 숍들이 매력적인 곳이라 뉴요커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높은 곳이라고 하였다.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기차를 타면 허드슨 강 뷰를 보면서 가볍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가 있는 곳인가 보았다.
워싱턴 디씨에 살고 있는 친구 헬렌과 포코노 마운틴에서 만나 열흘 정도 버지니아 주를 여행하기로 하였다. 친구는 포코노 마운틴의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곳 캐빈을 랜트해 두고 우리를 초대하였다. 딸 내외가 휴가를 내어 우리를 포코노 마운틴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였다. 거기로 가는 길에 비콘을 들러가자고 딸 내외가 제안하였다. 이전에 자기들이 간 적이 있는데 그곳의 아름다운 모습을 부모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비콘은 맨해튼에서 허드슨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작은 도시였다. 허드슨 강은 뉴욕 시를 끼고도는 중요한 강이다. 그 강을 쫓아 비콘까지 계속 강을 바라보며 하는 드라이브 길이 꽤 괜찮았다.
군데군데 마련된 전망대에서 강을 바라보았다. 강폭이 넓고 수량이 많아 때로는 호수처럼 보이는 지점도 있었다. 강물을 바라보는데 브레드 피트가 나오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장면들이 생각났다. 영화 속의 몬태나 주의 배경은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허드슨 강을 바라보니 더욱 영화 속 아름다웠던 풍경이 실감 나게 느껴졌다. 강물은 끊임없이 내부로 소용돌이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요히 흘러가는 모습이 꼭 우리네 인생 같이만 여겨진다.
이 강은 뉴욕주 북부의 애디론댁 산맥(Adirondack Mountains)의 헨더슨 호수에서 발원하여 뉴욕 항구까지 흘러들어 어퍼 뉴욕만에서 대서양과 합류한다고 한다.
나는 캐나다 퀘벡에서 뉴욕시로 돌아올 때 애디론댁 산맥을 지나온 바 있었다. 높지 않은 산들의 연봉 사이로 도로가 놓여있었고 도로 주변으로 펼쳐진 풍광이 나무 아름다웠다. 투어 가이드에게 일부러 지형을 물어보았더니 그곳이 유명한 애디론댁 산맥 지역이라고 하면서 그림까지 그려 설명해 주었다. 그 애디론댁 산맥에서 허드슨 강이 발원하여 500여 km를 흘러 맨해튼에 닿는다. 이렇게 큰 강이 뉴욕 곁으로 흐르니 800여만 명의 뉴욕 사람들이 이 물을 식수로, 산업용수로 쓰고, 레저활동도 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문명을 만든 고마운 강이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이 강 근처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단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의 존재를 알리자 서방의 모험가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하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동인도회사의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이었다. 1609년 이 강을 항해한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허드슨 강이라는 이름이 명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딸 내외는 우리에게 디아 비콘 뮤지엄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여행을 계획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워낙 갑자기 계획을 세우면서 뮤지엄 예약에 실패했다고 했다. 디아 비콘 뮤지엄을 못 보면 어떠랴! 우리는 그냥 맑은 가을날의 비컨을 즐기기로 하였다.
숙소로 가는 도중 시골 농장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골 농장 식당이라고 하여 조촐할 줄 알았더니 규모가 크고 사람들도 많아 놀랐다. 미국 시골에서는 이런 식의 시골 농장 식당이 유행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농장 바깥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남편은 뱃줄식사를 하고 우리는 음식을 주문해 먹었다. 날씨는 너무 맑았고 앞 산에는 단풍이 곱게 내려앉아 있었으며 식당 주변에는 새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풍경 때문인지 음식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게 느껴졌다. 맑고 따뜻한 가을날의 정취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아 한참을 해바라기를 하였다.
우리 옆자리에 한국에서 온 젊은 아가씨들이 몇 명 앉아 있었다. 반가워 말을 붙여보았다. 어떻게 이 시골까지 오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그 아가씨들은 나의 질문이 도리어 의아한 듯 “이곳은 유명한 곳이에요”라고 하며 나를 뭣도 모르는 사람인양 약간 측은한 듯이 바라보았다. 아마도 미술관에 예약을 해둔 모양이었다. 나는 즐겁게 떠들고 웃고 있는 젊은 아가씨들을 보면서 새삼 부자가 된 조국의 힘을 느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계 곳곳에 저렇게 자유롭고 당당하게 여행을 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농장 주위를 거위가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고 있고, 누렇게 익은 호박들이 너른 들판에 뒹굴고 있었다. 식사를 한 손님들이 호박을 한아름씩 안고 왔다. 생스 기빙이 가까워 오는 모양이었다. 시골의 일손부족을 이렇게 해결하고 있어 지혜롭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우선 숙소에 짐을 풀었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에어비앤비로서 전망이 좋았다. 그런데 이층의 숙소까지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는 데 계단이 몹시 삐걱거려 불안했다. 게다가 오래된 미국 목조 건물의 냄새가 괴롭게 목을 자극하였다. 목조와 카펫이 만들어 내는 퀴퀴한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일단 짐을 숙소에 두고 비컨 시내로 나갔다.
이곳의 맥주 브루어리가 관광객들 사이에 꽤 유명하다고 하였다. 미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각 지역마다 고유한 브루어리가 있고 관광객들이 지역 맥주를 즐긴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도 저녁 무렵의 맥주 브루어리에 앉아 낯선 도시의 정취를 느껴 보았다. 작은 도시의 소박한 공기가 주변을 감싸고, 마침 어둑해지는 시간에 마주한 맥주잔이 여행자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이런 소소한 풍경이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같이 느껴졌다.
저녁은 The Roundhouse라는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바로 곁에 멋진 폭포가 흐르는 호텔을 겸한 식당이었다. 이 호텔은 경치가 좋아 결혼식 피로연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별로 없어 넓은 식당이 설렁하게 보였다. 레스토랑 창가로 위세 좋게 흐르는 폭포의 모습이 보였다. 보기는 좋았지만 호텔 곁으로 거센 물살이 지나가는 계곡이 있다니 호텔의 안위가 괜히 걱정되었다. 이런 나를 두고 딸은 지 엄마가 세상 걱정을 다한다고 핀잔을 준다.
저녁을 먹고 어두움이 내려앉은 작은 동네를 걸었다.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아기자기한 예쁜 가계들이 줄을 이어 자리하고 있었다. 뉴욕시의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많이 옮겨와 예술작업을 겸한 가계를 운영한다고 하더니 작은 로컬 샵들이 저마다 개성을 자랑하듯 치장하고 있었다. 캔들샵, 인테리어샵, 아이스크림 가게, 도넛샵등 예쁘게 치장한 그 모습들에 눈길이 갔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가계들이 문을 닫아 그냥 바깥에서 들여다보기만 하였다.
바깥 산책을 즐기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아까부터 무언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위가 숙소를 옮겨야겠다고 하였다. 예약을 할 때는 위치만 보고 집을 선택했는데 집이 이렇게 낡은 줄 몰랐고 동네가 우범지역인 줄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워낙 사고가 많은 미국인지라 여행지도 안전 정도를 알려주는 웹사이트가 있는 모양이었다. 딸은 잘 알아보지 않고 숙소를 정했다면서 제 남편을 힐난하였고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우리가 나서 숙소를 옮기자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다행히 호텔을 예약할 수 있었다.
여행가방을 옮기는 짧은 동안 잠시 스릴이 느껴졌다. 마치 그 짧은 순간에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딸 내외 덕분에 치안상태가 나쁘다는 것에 대해 별로 실감을 못하고 지내왔지만, 사위의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우리에게까지 불안이 전염되는 것 같았다.
호텔로 옮기고 보니 밝고 깨끗하고 도회지적인 분위기가 느껴져 안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비콘에서의 하룻밤은 뜻하지 아니하게 호텔에서 지나게 되었다.
호텔로 향하는 도중 잠시 밤의 허드슨강과 조우하기로 하였다. 딸내외가 전에 이곳에 왔을 때 강가의 데크에 앉아 흐르는 강물소리를 들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허드슨 강에 맞닿은 작은 부두에서 강으로 이어진 데크로 걸어갔다. 멀리서 비치는 작은 불빛이 강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찰랑찰랑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고요하게 들렸다. 그래서 데크 끝까지 갈 때까지는 분위기가 들떠있었다. 그런데 데크 끝자락에 다가가자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검은 물체가 보였다. 웬 사람이 앉아있었다. 이 밤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랜다더니 마음이 혼비백산하여 서둘러 그곳을 떠나왔다. 그리하여 허드슨 강과의 밤의 조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