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정 카타리나

by 보현


정 카타리나는 나의 대녀이다.

카타리나는 남편 친구의 친척 누이이다. 그녀가 한 분 남아계시던 아버지마저 잃고 몹시 힘들어할 때 남편 친구가 내게 그녀를 부탁했다. 종교 속에서 그녀의 평화를 바랐던 그 착한 오빠는 사촌누이가 천주교 세례를 받기를 원했고 나에게 대모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누구의 대모도 되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녀의 슬픔을 생각하고 대모가 되어주기로 했다. 내가 성당 문을 거의 40년을 밟고 다니면서 유일하게 얻은 한 명의 대녀가 그녀였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스페인 여행에서였다. 남편 친구들 다섯 부부의 여행에 한 친구가 사촌누이를 끼워 왔던 것이었다. 그녀가 정 카타리나였다. 그때 그녀는 막 사랑하는 아버지를 여의고 눈물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처음에 그녀를 보았을 때의 첫인상은 그러나 슬픔과는 거리가 멀게 밝고 친절하고 예쁘다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우리를 만나자마자 그녀는 사탕과 과자가 가득 든 선물꾸러미를 모두에게 안겨 여행 내내 의외의 짐 때문에 성가셨던 기억이 남아있다. 여행 첫날부터 그녀는 우리를 언니, 오빠라고 부르며 친밀하게 다가왔다. 가냘픈 몸에도 불구하고 짐을 들어주겠다고 나섰고 단체 사진 찍을 때면 언제나 자기가 기꺼이 사진사 역할을 하였고 나이 든 우리가 버벅거리면 휴대전화의 인터넷 연결 방법을 방마다 다니며 해결해주곤 했다. 그녀는 곧 우리 여행에서 빠져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고 오빠들의 사랑과 언니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아무튼, 그리하여 카타리나는 남편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세례를 받았고 나는 그녀의 대모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주말마다 미사를 함께 하자며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왕십리에 살고 있었으므로 우리 집과는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한결같이 나에게로 왔다. 사교적이지 않은 나는 누가 친밀하게 굴든지 소원하게 굴든지 별로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편인데 카타리나가 워낙 살뜰하게 다가오니 그녀와 늘 붙어 다니게 되었다.


그녀는 잘 울었다. 신부님의 강론 때마다 울었고, 일상 이야기 중에도 조금만 슬픈 이야기가 나오면 울었다. 아들 여럿에 고명딸로 자란 그녀는 부친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란 듯, 모든 일을 돌아가신 아버지와 연결 지으며 울었다. 그녀는 본당 신부님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았다고 하면서 신부님에게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미사 때 감동으로 눈물을 찔끔 흘린 적은 있었지만, 그녀처럼 수도꼭지를 튼 듯 울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아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남편이 입원한 뒤로 나는 병원 미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병원으로 와서 나와 함께 미사를 보았다. 남편 앞에서는 꿋꿋하게 견뎌낸 나였지만 미사 볼 때가 되면 눈물이 났다. 카타리나는 나의 눈에 약간의 눈물만 맺혀도 나보다 더 많이 울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그녀는 오빠(그녀는 남편을 그렇게 불렀다)와 언니가 병원에 있는데 자기만 여행을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 하면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여행지에서도 자주 전화를 하여 남편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성당에 들러 오빠의 쾌유를 빌며 초를 켰다고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녀는 하루도 빼지 않고 병실을 찾아왔다. 병실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중에도 어떻게든 요령 있게 병실로 와서는 꾀꼬리처럼 맑은 목소리로 여행지에서 있었던 즐거운 에피소드들을 쏟아내었다. 나나 남편이 말이 없는 편인데 그녀가 꾀꼬리처럼 이야기를 쏟아내자 병실은 금방 환해지고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현실적으로도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병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미리 챙겨 왔고 타월이며 옷이며를 가져가 빤 다음 깨끗이 다려 병원으로 돼가지고 왔다. 나의 식사 친구가 되어주었고 간식거리를 챙겨 왔으며 나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남편도 자기 곁에 두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자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은지 훨씬 너그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나뿐만 아니라 남편과도 아무 허물없이 지냈다. 나는 만일 내게 갑자기 유고가 생긴다면 남편을 부탁할 유일한 사람이 카타리나라고 생각하였다. 나의 그런 생각을 만일 카타리나가 알았더라면 결벽증이 있는 그녀는 펄쩍 뛰었을 것이다.


남편은 수술과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나날이 고통이 심해졌다. 가래가 가장 남편을 괴롭혔다. 가래를 계속 빼내자 목에서 피가 쏟아지기도 했고 사흘 동안 혈변을 보기도 했다. 혈변의 원인을 찾느라고 위내시경을 하여 남편이 괴로워하기도 하였다. 폐렴증세로 열이 심하게 오르기도 했고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를 계속하면서는 목이 건조해지고 열감이 차여서 몹시 괴로워하기도 하였다. 머리카락도 빠졌다.

남편의 괴로움이 커지자 카타리나와 장단을 맞추며 이야기할 여유도 없었고 그러기도 싫었다. 나 혼자 조용히 남편을 지켜주고 싶었다.

특히 귀국하자마자 병실로 달려온 딸은 다른 여인이 자기 아버지의 병실에 날마다 와서 온 정성을 쏟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어쩌면 아버지의 사랑을 딴 여인과 나누고 싶지 않은 경계심이 작동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느 날 카타리나에게 이제 병원에 그만 오라는 통보를 하고 말았다. 나의 통보에 식당 앞 벤치에 앉아 그녀가 아기처럼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저는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언니네를 부모님처럼, 가족처럼 생각하며 살려고 했는데 나를 밀어내니 너무 서운해요”

하며 그녀가 울었다. 펑펑 우는 그녀와 그녀를 달래는 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장소가 장소이니만치 사람들은 저 집에 무슨 비극적인 사건이 생긴 것으로 짐작했을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미안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말을 뱉어버렸으니 어쩌랴. 남편은 늘 나의 입을 조심하라고 경계를 내렸건만.

그러고도 그녀는 계속 병원에 왔다. 마치 나의 거부에 지지 않으려는 듯 고집을 부렸다. 나는 그녀의 집착이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한번 이성적으로 그녀를 타일렀다. 이제 개학도 가까웠으니 강의 준비도 해야 하고 바쁠 터이니 매일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며칠 카타리나가 병원에 오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이

“요새 정교수는 왜 오지 않아?, 싸웠어?”

라고 물었다. 남편이 당연한 궁금증을 표현했을 뿐일 텐데도 나는 도끼눈을 하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남편의 적적한 병원 생활에서 카타리나는 청량한 꾀꼬리 같은 존재였던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족령을 해제했지만, 그녀는 전처럼 매일 병원에 오지는 않았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아기 천사 같은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나는 내내 미안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다행히도 그녀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맑은 얼굴로 내게 왔고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요즈음 카타리나가 우울증에 빠진듯하다. 그녀는 무슨 사정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은 듯하였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따르던 본당 신부님께서 갑자기 폐암으로 돌아가시자 카타리나의 슬픔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다.

나는 카타리나가 한이 맺힌 듯 목놓아 울면 무서웠다. 그러던 카타리나가 얼마 전 내게

“이젠 사람이 싫어졌어요”

라고 하면서 나에게도

“언니, 제발 부탁이니 연락하지 말고 나를 혼자 내버려 두어요”

라고 하고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전화번호도 바꾸어 버렸다.

매일이다시피 전화를 하고 한 주에 한 번은 만나던 그녀와의 관계가 끊어지자 적막하고 쓸쓸한 게 마음에 구멍 하나가 뚫린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년을 붙어 다니고 친자매처럼 다정히 지냈건만 전화라는 매체가 없어지자 그녀와 나 사이의 연결 고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집도 모르고 그녀의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관계가 너무나 바스러지기 쉬운 관계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괴로웠다.

그러자 딸아이의 결혼사진을 다 날려버린 사건이 생각났다. 딸아이가 결혼할 때, 전문사진사에게 의뢰하여 스튜디오 사진도 찍고 결혼식 사진도 찍었다. 이 사진들이 엄청나게 보내져 오자 컴퓨터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였다. 그래서 내가 시간을 들여 이 사진들을 USB에 다 모아두었는데 잘못하여 사진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그리하여 프린트된 사진 몇 장 외에는 딸아이의 결혼사진이 하나도 없어져 버렸다. 그와 같이 어이없는 허무함을 카타리나와의 관계에서 느꼈다.


천사같이 착한 카타리나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수많은 무심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중의 하나에 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카타리나를 보며 나이가 들면 부모와 헤어져 자립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거늘 돌아가신 아버지를 못 잊고 나날이 눈물로 지새우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무한한 사랑과 친절함이 어리석게도 느껴져 그녀에게

“다정도 병이야”

라고 자주 경계심을 심어주었다. 어떻게 보면 카타리나는 자기가 베푼 무한한 사랑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너무 냉정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배신감을 느끼고 사람들이 싫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정한 카타리나를 보면서 나의 건조하고 사무적인 인성이 잘 대비되어 보였다. 어쩌면 하느님은 나의 사랑 없는 마음을 깨닫게 하려고 카타리나를 내게로 보낸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후로는 하느님께 나에게도 카타리나와 같이 남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언니 가족을 내 가족처럼 여기며 살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을 나는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

그저 카타리나를 위해 기도할 뿐이다. 시련을 통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음을 믿기에 그녀도 시련을 딛고 더욱 강건해지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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