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딸꾹질

by 보현


남편은 딸꾹질이 심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딸꾹질이 밤낮없이 남편을 괴롭혔는데 특히 한밤중에는 온 병동 사람이 다 깰 정도로 심하게 딸꾹질을 하였다. 약을 처방해도 소용이 없었다. 딸꾹질을 너무 심하게 하여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편을 부축하여 병원 복도를 함께 걸었다. 희한하게도 걸으면 딸꾹질이 멎었다.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딸꾹질이 왜 생겨 이렇게 괴롭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의사도 암과 딸꾹질과의 관련성을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못하였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의 병원 복도를 남편을 부축해 걸으면 병원에 갇혀 있는 우리 처지가 슬프고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딸꾹질 때문에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다니 싶으니 마치 조롱이라도 당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딸꾹질이 덜한 시간에 남편은 쪽잠을 잤다. 그동안 수염을 깎지 못해 털북숭이가 된 남편은 무인도에 상륙한 로빈슨 크루소처럼 보였다. 남편에게 그렇게 털이 많이 자란 모습은 처음 보았다. 병문안 온 남편 친구들은 beard man이 된 남편 모습을 멋있다고 놀리기도 했지만,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감당하느라고 살이 빠지고 지친 남편 모습은 안쓰럽기만 했다. 게다가 말도 못 하여 친구들과의 대화도 필담에 의지해야 했으니 얼마나 남편 처지가 가련했겠는가. 약간 미간을 찡그리며 잠이 든 beard man을 바라보노라면 남편을 windy man이라고 불렀던 젊은 날이 생각났다.


남편과는 대학에서 만났다. 과의 재수생 언니들이 미팅을 하게 되었는데, 한 언니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내가 급히 핀치 히터로 가게 되었다. 그때 나의 파트너가 된 남자가 남편이었다. 남편은 재치 있는 유머로 좌중을 압도하여 우리 친구들의 호감을 많이 샀다. 나는 그때 ‘저 사람과 있으면 심심하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하였는데 후에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세상에 입이 무거운 경상도 사나이였다.

그렇게 얼굴을 한번 익히고 그만이었는데, 도서관에서 가끔 그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3학년 2학기 복학생이었던 남편은 취업이나 장래 문제로 다급했던 듯 도서관에 지정석을 얻어 공부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나도 대학원 진학을 위해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던 때였다.

남편을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남편이 도서관에 앉아있던 내 자리에 누런 봉투를 하나 던지고 갔다. 열어보니 잘 익은 홍시가 세 개 들어있었다. 부끄러워하며 홍시를 던지고 간 남편의 소박한 멋에 반해 나는 남편과 친해졌다. 친구들은 내가 너무 싸게 넘어갔다고 놀리지만, 그 홍시는 매우 달았다. 알고 보니 단성시(丹城柿)는 맛있기로 전국에서도 유명했다.


우리가 결혼하고 난 뒤, 우리의 신혼집에 시어머님이 홍시를 이고 오셨다. 그것을 철없는 며느리가 그 자리에서 맛있게 먹자, 보다 못한 어머님이

“아 오면 묵어라”

라며 타박하셨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어머님은 아들 주려고 그렇게 소중하게 홍시를 모시고 오셨는데, 그것을 젊은 처자에게 갖다 바친 아들의 행위를 꿈에나 생각하실까! 처음에는 어머님의 타박이 좀 원망스러웠으나 이제 아들을 장가보내고 보니 어머님의 그 마음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남편과 친하게 지나게 되자 나는 남편이 상당히 인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이 계속 그를 불러내었고 도서관의 그의 자리에는 언제나 그의 책들만이 덩그러니 놓인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내가 그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데이트라도 하려고 하면 그의 친구들이 어김없이 그를 낚아채 갔고 학교 앞 다방에서 나는 하릴없이 그의 출현을 기다리며 바깥으로 난 작은 창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바람 같은 사나이, windy man’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 바람 같은 사나이가 영 나의 애를 태웠다.


그 겨울, windy man이 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경남 하동의 어느 유명 사찰 아래로 비장하게 떠났다. 그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사찰 동네의 소인이 찍힌 편지가 도착하였다. 나는 너무 인기가 많아 나를 외롭게 만드는 이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에게 편지를 썼다. ‘공부 열심히 하세요. 각자의 길을 갑시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바로 우리 집 앞이라고 했다. 나의 편지를 받고는 바로 짐을 싸서 돌아왔다는 그의 말에 나의 ‘헤어질 결심’은 눈 녹듯 녹아버렸다. 그날 진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후로도 남편은 늘 내게 windy man이었다. 나의 직장 때문에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그는 창원으로, 서울로, 일본으로, 태국으로 회사의 명을 받아 바람처럼 떠돌았다. 그가 거의 10년을 해외에서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나는 여전히 직장에 매여있었고, 우리는 주말부부로 살았다.

남편이 없는 동안 나는 가장 역할을 하였고, 혼자서 아이들을 키웠으며, 시집의 대소사를 남편 대신 챙겼으며, 친정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고 나 나름대로는 생색을 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살뜰한 아내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남편의 한 선배가

“갸가 그런 병에 걸린 것은 결혼을 잘 못 했기 때문이야”

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솔직히 분개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아주 많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직장생활에 연연하지 않고 그를 따라 함께 나섰더라면 남편은 암에 걸리지도 않고 건강하게 살았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남편은 결혼하기 전, 교수가 되기를 원하는 나에게

“당신 앞 길에 찬물 한 그릇을 놓으면 놓았지 방해는 하지 않겠소”

라고 약속했었다. 나는 그 ‘찬물 한 그릇’에 감동하고 말았다. 그 후 남편은 혼자서 세계를 떠돌면서도 나더러

“직장을 때려치우고 이쪽으로 오시오”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내가 큰일을 저질러 남편을 아주 괴롭게 한 사건도 있었다.

내 방에 있던 대학원생의 아버지가 내게 사업을 같이하자고 제안해 왔다. 처음에는 연자(蓮子)로 만든 음료를 가져와 기능성을 좀 봐 달라고 하더니 내가 그 음료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자 아예 나더러 회사를 같이 만들어보자고 달려들었다. 한참 대학에서 벤처사업을 독려하던 시절이었다.

그 학부모의 요설과 대학의 은근한 장려와 나 자신의 허영심이 결합하여 나는 학교 내에 벤처기업을 하나 만들고 말았다. 그 후의 참담한 실패는 여기에서 말하고 싶지 않다. 사무실을 빌리고 직원을 채용하고 제품을 생산한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유명 배우를 써서 광고를 찍고 TV 광고까지 내보낸 것은 누가 보아도 미친 짓이었다. 후일 나는 나의 이러한 앞뒤 재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저지른 성질을 내 속에 숨어있는 장전동의 피라고 규정하였다. 우리 아버지와 오빠를 통해 이어져 오던 무대책주의, 근거없는 낙천주의 말이다.

결국, 광고비가 눈덩이처럼 내게 씌워졌다. 알고 보니 대학원생의 아버지는 집 한 칸 없는 알거지 신세였다. 나는 그제야 남편에게 SOS를 보냈다.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끼며

“여보, 언제까지 돈이 얼마 필요해요.”

라고 말하면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날까지 내 통장에 필요한 돈을 넣어주었다. 내가 큰 빚을 지고 회사를 말아먹자 남편은 그 빚을 나와 함께 갚아주었다. 남편은 그 과정에서 한 번도 나에게

“당신 왜 그런 짓을 벌였어?”

“왜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었어? ”

라며 나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런 훌륭한 사람이 딸꾹질을 못 이겨 괴로워하고 있으니 수염이 온통 자란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슬펐다.

“하느님! 이 남자 이번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가 이 남자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해요.”

나는 남편 침상 옆에 엎디어 눈물로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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