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남편을 진정으로 염려하여 그의 회복을 빌며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새삼 세상의 인심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맨 먼저 그리스 여행을 함께한 남편 친구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가평에 사는 그 친구는 집에서 수확한 유기농 과일이라며 복숭아며 토마토를 한 배낭 메고 왔다. 본인도 심장박동장치를 몸에 넣고 있는 친구인지라 주렁주렁 줄을 매달고 누워있는 남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남편 침대 곁에 앉아 긴 한숨을 쉬다가 돌아갔다. 친구의 복숭아는 아주 잘았는데, 나는 밤새 그 콩알만한 복숭아들의 껍질을 벗겨 남편의 가래 처치로 고생하는 간호사들에게 건네주었다.
이어서 그리스 여행을 함께했던 분당의 이 여사가 왔다. 위암 수술의 경험자인 이 여사인지라 남편을 보면서 옛날 자신이 처음 암 판정을 받았을 때가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이 여사는 우리를 위로하면서 자신의 투병 과정 중 복용했던 아미노산을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권하였다.
어느 날은 내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병실로 올라갔더니, 남편 친구가 왔다 갔다고 했다. 그 친구는 모임 자리에 갔다가 남편의 입원 소식을 듣고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와 남편 병실을 찾았다고 했다. 병실에 오자마자 혼자 누워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oo야, 니가 와 이라고 누워 있노”
라며 부둥켜안고 우는 바람에 남편도 같이 울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도 콧등이 시큰해졌다.
남편은 잘 울지 않았다. 내가 남편의 눈물을 본 것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유일했다. 그때도 주말부부로 살던 때였다. 주말을 맞아 서울에서 부산 집으로 내려온 남편이 8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야외로 나가 가을 정취를 듬뿍 들이키고 즐거운 기분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막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려고 나서는데, 시어머니의 유고를 알리는 전화벨이 울렸다.
바로 대구 큰집으로 가는 밤 기차를 탔다. 나는 남편이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남편의 다리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후로는 남편의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고독하게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울지 않고 버티는 남자의 인생이 암 덩어리를 만든 것이 아닐까 하여 울지 못하는 남편이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고는 마음이 약해졌는지 친구들이 찾아와 울 때면 남편도 같이 울었다. 임 사장 내외가 아침 일찍 병문안을 왔을 때였다. 다정한 사람인 임 사장이 남편을 붙잡고 울자 그 부인도 울고 남편도 울고 나도 울었다.
어느 때보다 남편의 마음이 무너진 사건은 진주에 계시는 누님께서 오셨을 때였다. 입원이 장기화하자 진주 누님께 동생의 입원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우리 내외는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시골집을 드나들었다. 시골에 시숙 한 분이 혼자 살고 계셨다. 시숙님께 국이며 반찬이며를 공수하는 것이 우리의 주요 역할이었는데, 시골에 가면 꼭 누님께 전화를 드리거나 찾아갔었다. 부모님께서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누님 내외가 부모님처럼 생각되었다.
누님께 동생의 수술과 입원 사실을 알리자 누님은
“근래에 통 소식이 없어 너그한테 뭔 일이 있는 줄 알았다”
면서 비교적 담담히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후일 들으니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누님의 가슴은 쿵 내려앉았다고 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안 사실이지만 한번 암 치료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암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가족들은 암에 대해, 죽음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큰 시숙, 둘째 시숙이 암으로 예순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남편 입원 소식을 듣고 큰 동서, 둘째 동서께서 보인 반응이 그 방증이었다. 두 분은 지나칠 정도로 걱정하시고 슬퍼하셔서 꿋꿋이 간병하는 나를 당황스럽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들을 일찍 여윈 조카들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며칠 후 누님네 대가족이 병실에 나타났다. 진주에서 올라오신 누님 내외와 서울에 사는 딸 내외, 아들, 딸 6명이 모두 출동하였다. 대가족의 방문이라 병실로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에 연결통로의 복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저 멀리 누님이 달려오자 남편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지며 누님에게로 달려가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남편은 내가 누님에게 연락드려 연로한 누님 내외가 서울까지 오시게 했다고 나에게 속상해했지만, 나는 연락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편 친구들이 병문안을 많이 왔다. 남편은 나에게 신의를 다하듯 친구들에게도 정성을 다했든지, 아니면 대학 시절에 내가 봤던 것처럼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던지, 아무튼 친구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중에서도 남편의 절친 세 명은 한 주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왔다. 보호자 한 사람 밖에 주재를 허락하지 않는 병원 방침인지라 세 명이 한꺼번에 병문안을 오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어찌어찌하여 꿋꿋하게 병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그냥 말없이 남편을 바라보다 돌아갔는데 그때마다 그들이 남편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남자의 우정을 진하게 느끼게 해 준 친구들이었다.
병실에서 사귄 친구들이 먼저 퇴원했다가 치료차 병원을 방문하고 남편을 병문안 오는 분들도 있었다. 특히 포항 아저씨는 몇 번이나 남편의 병실을 찾아와서 안부를 묻고 가곤 하였다. 참 마음씨 고운 분들이라 잊히지 않는다.
남편이 입원하고 한 달이 지나서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딸이 귀국하였다. 남편은 아들딸에게 당신의 수술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지만, 병실에 있을수록 딸에게는 알려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아들은 당시 공부 중이었기 때문에 쉬이 나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어느 날 남편 몰래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살뜰하게 전화를 잘하지 않는 엄마인지라 나의 전화를 받고 전화기 건너 딸의 목소리에 긴장이 느껴졌다.
“oo야, 놀라지 말고 들어. 아빠가 조금 아프셔”
라고 말을 꺼내자 대뜸 딸아이가
“어디가?”
하며 울먹이며 톤을 높였다.
“그냥. 목에 혹이 생겨 수술했는데 심각한 수준은 아니야. 지금 입원해 계시는데 곧 퇴원할 수 있을 거야”
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아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딸은 가만히 있더니
“엄마, 나 여기 정리 좀 하고 바로 들어갈게.”
하더니 마침내 병실에 나타난 것이었다.
정 카타리나가 공항에 나가 딸을 태워 오면서 무슨 말을 하였던지 병원에 들어오는 딸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딸을 붙잡고
“너, 아빠 앞에서 울면 안 돼”
라고 다짐을 받았건만 고개를 끄떡이던 딸이 병실로 뛰어들면서
“아빠!”
라고 부르는데 이미 울음에 북받친 목소리였다. 남편은
“뭐 하러 나왔어?”
하며 애써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딸을 보자 그동안 긴장하여 몰랐던 증세들이 나타났다.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S병원 앞에 있는 내과를 찾아가서 수액도 맞고 단숨에 활력을 준다는 무슨 주사도 맞았다. 그 내과 의사는 내가 한 달을 혼자 병 간호한 사실에 놀라면서 보통 일주일이 되면 보호자들이 기진하여 자기들 병원을 찾아오는데 나더러 오래 잘 버텼다고 나를 위로하였다.
그러고 보니 시집 쪽보다 우리 친정 쪽의 육 남매는 모두 건강하게 살고 있는 편이다. 오빠는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테니스며 등산으로 활력에 넘친 삶을 살고 있고 큰언니도 작은언니도 여전히 운전하며 팔도를 돌아다닌다. 손아래 남동생들도 어디가 아파 드러누웠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 나는 내게 튼튼한 몸과 지구력을 주신 조상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며 천천히 병실로 돌아왔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원의 조경도 눈에 들어왔다. 병실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는 잘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S병원은 꽃 하나, 나무 하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병원 정문 입구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마음껏 자라고 있었고, 병원 쪽 가로에는 멋진 소나무들과 회화나무들이 고급스러우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큰 나무 아래로는 어여쁜 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마치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로하는 듯 피어있었다. 잠시 병동 입구의 벤치에 앉아 꽃과 나무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딸이 가져다준 여유가 너무나 감사하게 내 몸을 감쌌다.
입원 중 추석을 맞았다. 병실 밖 창문 앞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는 마치 처음 보름달을 보는 사람들처럼 맑고 큰 달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딸이 아빠와 내 손을 잡고 달을 보며 아빠의 건강을 빌자고 하여 세 명이 함께 달을 보며 섰다. 그 순간 무언가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는데, 남편을 힐끗 보니 남편의 얼굴에도 복잡한 상념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딸은 지금도 보름달이 휘영청 밝으면
“엄마, 아빠, 달 보며 소원을 빌어요”
라는 소리를 잘한다. 나는 딸아이에게 한 번도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어보라고 한 적이 없었으므로 딸아이의 그런 행동이 이상하고 우스웠다. 그래도 병실에서 둥근달을 바라보며 셋이서 손을 맞잡고 서 있었던 그 순간이 뇌리에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남편은 추석인데 자기 때문에 차례를 못 지내게 된 것을 속상해하고 걱정하였다. 은근히 나더러 집에 가서 혼자 제사를 지냈으면 하고 압력을 넣었다. 큰 형님도 진주 누님도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차례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미리 내게 귀띔해 주었건만 남편만은 그 상황이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해 추석은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지 못하고 넘겼다.
사실 막내인 우리가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어느 날 큰집의 큰 조카가 남편에게 무슨 사정으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음을 통보해 왔다. 그러자 남편이 우리가 제사를 받아오자고 하였다. 제사 문제로 집안에 갈등이 있었던지라 나는 순순히 남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남편은 나의 친정 부모님을 삼십 년 가까이 모셨는데 이번에는 내가 남편 조상들께 빚을 갚을 때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일을 숱하게 헤쳐왔는데, 그까짓 제사가 대수냐 싶었던 생각도 한몫을 했다. 호기를 부리며 조상 제사를 가져왔지만 역시 제사는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 집으로 제사를 모시고 와서 그때 단 한 번, 조상께 예를 올리지 못하였다.
동찬 엄마가 추석 송편과 전을 가지고 병문안을 왔다. 두 아들과 함께였다. 동찬 아버지는 남편의 좋은 친구였는데 폴란드 지사에 근무할 때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 아들들이 훌륭히 커서
“아저씨 아프다니 우리도 병문안을 가고 싶어요”
라고 하여 병원에 함께 왔다고 하였다. 남편은 자기보다 더 크게 자란 친구의 아들들을 바라보며 감동한듯했다. 재민이 내외도 막내아들을 대동하고 병문안을 왔다. 개구쟁이 소년이 대학생 청년이 되어 나타나자 남편이 놀랍고 반가워하였다.
11월 말경이 되자 아들이 귀국했다. 그동안 아빠 병세가 심각하지 않다고 아들을 안심시켜 두었는데 와서 아버지 상태를 보고 아들은 충격을 받은듯했다. 아들은 이름만 대면 고개를 끄덕일 미국 유명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었다. 세계 유수의 천재들과 경쟁하는 것이 힘에 부친다고 늘 앓는 소리를 하더니 아픈 아버지를 보고는 그 소리가 쏙 들어갔다. 뭔가 생각이 깊어지는 듯하더니 보름 정도 아빠 곁에서 시간을 보내다 미국으로 돌아갔다. 아들은 딸처럼 살뜰하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와서 아버지를 보고 가니 마음이 든든하고 좋았다. 남편도 그랬을 것 같았다. 그 후 아들은 학위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취업하여 미국에 살고 있다. 영원히 막내같이 어리기만 하던 아들이 아픈 아버지를 보고 각성하여 의젓해진 게 아닌가 싶어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감사하게 된다.
아들이 들어가자 이번에는 그 뒤를 이어 사위가 입국하였다. 사위는 미국교포답게 이번 방문을 장인을 위해 왔으니 가급적 장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면서 집 근처에 호텔을 얻어 머무르며 거의 매일 장인을 보러 왔다. 장인이 퇴원하여 집에 있으면서 양재천을 겨우 산책하기 시작할 때였다. 사위는 장인을 부축해 양재천 산책을 함께 하였다. 사위와 딸을 대동하고 남편과 함께 양재천을 걸으니 날씨는 추웠지만 든든하고 훈훈하였다. 사위는 그렇게 보름간의 휴가를 쓰고 귀국하였다.
남편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나눠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 감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