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병문안을 왔다. 오빠는 병문안을 오겠다고 여러 번 전화를 내었다.
“아이고 우리 권서방!, 권서방이 입원했다니!”
하면서 오빠는 과장된 애정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나는 오빠가 병원에 오는 것이 탐탁지 않았고, 남편도 오빠의 방문을 기꺼워하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병문안을 오겠다는 오빠에게 남편의 상태가 위중하니 천천히 오시라고 몇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러다가 내 마음이 걍팍하지 못하여 언제 병원에 한번 다녀가셔도 되겠다고 연락을 드렸다. 그러자 오빠가 병실에 나타났다. 뚱뚱한 배가 그대로 드러나는 티셔츠에 주황색 조끼를 걸치고 야구모자를 쓴 오빠가 병실로 들어서자 나는 ‘아차 괜히 오시라고 했구나’ 하는 후회의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친구까지 대동하고 나타났길래 나는 오빠랑 점심을 같이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사실 오빠는 불청객이었다. 친정 오빠를 불청객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빠는 친정집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오빠는 군입대 전만 해도 그렇게 이상한 성품은 아니었다. 오히려 얼굴도 해맑게 잘 생겼고 성격도 서글서글하여 마을에서 인기가 좋았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멋쟁이 언니인 최부잣집 둘째 딸과 결혼한 것만 보아도 오빠의 매력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군대를 다녀온 뒤부터 오빠가 달라진 듯 보였다. 오빠는 무언가 돈을 만들려고 골몰하는 것 같았다. 집안에 양계장을 설치하고는 병아리 수십 마리를 사다 키웠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냉동창고 사업을 시작하여 아버지 재산을 몽땅 은행에 저당 잡혀 하루아침에 다 날려 먹었다. 친정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부모님은 부산의 변두리인 장전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우리 육 남매를 키우셨다. 엄마의 옛날 시집살이 이야기의 시작은 늘 이랬다.
“생전 처음 보는 곳으로 시집이라고 왔더니 돌무더기 사이에서 새카만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기라.”
나는 돌무더기 사이에서 쏟아져 나온 그 새카만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 가족이란 것을 안다. 엄마는 18살에 장전동 골짜기의 가난한 총각에게로 시집을 왔다고 했다. 18살이라면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싶은데 당시 일제가 처녀들을 위안부로 마구잡이로 끌고 가던 시대였으므로 엄마는 아무 남자에게라도 시집을 가야 할 형편이었다고 했다. 그 아무 남자가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살던 장전동 골짜기 땅은 척박하고 돌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새색시는 당장 식구들의 새카만 무명옷을 벗겨 양잿물을 넣고 삶은 후 냇가로 가서 빨랫방망이로 탕탕 때려 하얗게 만든 후 식구들에게 입혔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엄마는 장전동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 육 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워낙 근검절약하며 살았던지 논밭을 꽤 늘려 한국전쟁의 어려운 와중에도 우리는 자라면서 배를 곯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우리가 살던 장전동 78번지 집은 앞마당이 꽤 넓었었다. 가을걷이할 때면 그 넓은 마당에 나락이며 탈곡기며 사람들의 고함으로 소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우리 집 마당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었다. 아이들과 자치기도 하고 땅따먹기, 술래잡기도 하고 놀았는데 요즘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에 이런 놀이가 소개되어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니 새삼스럽다.
장전동 집은 금정산 아래에 있었으므로 우리 남매들은 금정산을 제집처럼 오르내렸다. 방학이 되면 새벽에 일어나 오빠의 구령에 맞춰 금정산을 뛰어갔다가 뛰어내렸다. 뽀삐라는 이름의 스피치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우리 앞서서 산을 누볐었다. 그때 폐활량을 키워서였던지 대학에서 산악부 활동을 할 때 나는 꽤 촉망받는 여성 산악인으로 이름을 조금 떨쳤고 하마터면 히말라야도 갈 뻔했다. 금정산을 오르내리며 식물들과 친하게 지낸 탓인지 지금까지도 남들보다는 식물 이름을 꽤 많이 안다. 이 시절 오빠는 마을 아이들에게 군기반장 노릇을 하였고 나에게도 우상이었다.
장전동 집 이야기를 하니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 마당에 와서 놀던 아이 중에 정인하가 있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서울내기였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얘 좀 싱겁게 생긴 듯한 이 서울내기를 마을 아이들이
“서울내기 다마내기”
하면서 놀려먹었다. 하루는 앞집 동생이 내게 편지를 하나 전해주었는데 펼쳐보니 인하로부터였다. 앞마을 어느 나무 아래에서 기다릴 터이니 몇 시까지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생애 처음 받아본 연애편지였다. 물론 나가지 않았다. 인하는 그 후 나를 못살게 굴었었다. 내가 지나가는 길에 웅덩이를 파고 나뭇잎으로 덮어놓았다가 내가 멋모르고 빠져 얼굴이 빨개지며 울음을 터뜨리면 박수를 치며 기뻐하였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시내에 있는 K여중에 다녔다. 당시만 해도 중학교도 입시 시험이 있었고 K여중은 부산에서는 최고의 명문여자중학교였다. 나는 베레모를 삐딱하게 머리에 얹고 세일러복을 입고 자부심에 차서 앞만 바라보며 학교에 다녔다.
내가 중학교를 가든, 고등학교에 가든 인하는 언제나 나의 주위를 맴돌았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인하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었다. 나더러 대학에 가거든 얌전하게 자기를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자기는 이번 입시에 실패했지만, 재수하고서라도 내년에는 꼭 내가 간 대학으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하는 재수를 하고도 내가 다니는 대학으로 진학하지 못하였다. 나는 나의 길을 갔고, 그는 그의 길을 갔다.
내가 모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연구실로 꽃바구니 하나가 배달되어왔다. 도대체 누가 이 커다란 꽃바구니를 보냈을까 잠시 의아했던 나는 분홍 리본에 쓰인 글을 보고야 그 주인공이 인하라는 것을 알았다. ‘forever 정인하’라는 글씨가 뚜렷이 쓰여 있었다. 처음에는 정인하라는 그 글귀가 낯설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 만에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 살던 개구쟁이 인하가 떠올랐다. ‘아! 인하가 어디에선가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묘한 설레임이 일었다. 그 후 인하로부터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하지만 그 후 나는 가끔 인하 생각을 했다. 인하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70년대에 들어 장전동까지 개발붐이 일면서 땅값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오빠는 장전동 자산을 담보로 거액의 사업자금을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았다. 멀쩡히 직장을 다니던 위의 두 형부를 꼬드겨 세 명이 사업을 한다고 어울려 다니며 술 마시고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흥겨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공장을 짓겠다던 계획은 처음부터 어그러졌고 그 후 빠르게 몰락이 밀어닥쳤다.
사람 좋았던 아버지는 아들의 대출에 연대보증을 섰다가 살던 집까지 경매에 넘어가 버렸다. 친정 식구들은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 오빠와 위의 두 언니, 나는 결혼으로 출가하였으나 내 밑에 두 남동생과 부모님이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나는 그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 때였다.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자 엄마는 땅바닥에 뒹굴며 울부짖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신혼집으로 친정 식구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우리의 작은 집에 친정의 네 사람이 덧붙으니 대혼란이었다. 남편은 당시 무척 힘들었을 텐데 내가 친정 식구들을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와야겠다고 하자 반대하지 않았다. 시어머님만 우리 집에 오시던 발걸음을 끊어 마음이 아팠다. 엄마는 아버지를 원망하다 아들을 원망하다 날을 지새웠다. 엄마는 당신이 양반 집안 출신이라고 하며 본래부터 아버지를 내려보셨는데,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해 집까지 날려 먹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대단하였다. 아버지는 말없이 소주만 들이키셨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상자째 소주를 사대곤 했는데 후일, 그것이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을 더한 게 아닌가 하여 후회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넘겼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하면 다 헤쳐 나갈 힘도 생기는가 보았다. 그렇게 뒤엉겨 살다가 두 남동생을 결혼시켰다. 남편이 서울로, 일본으로, 태국으로 발령이 나서 집을 떠나 살았으므로 그나마 집안에 어른들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게다가 아이들까지 안심하고 맡겨놓을 수 있어 나도 마음껏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부모님 두 분은 다 우리 집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여든다섯까지 사셨고, 엄마는 여든일곱까지 살고 가셨다. 아버지는 원래 소심하고 심성이 고운 편이었던지라 늘 남편과 나에게 미안해 하셨다. 그 미안함의 발로였던지 당신이 죽으면 화장하여 뼈를 아무 데나 뿌려달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나 남편과 힘을 합쳐 신불산 아래의 공원묘지에 장지葬地를 하나 마련하자 아버지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다. 그 자리에 누워보시고
“이 자리가 명당이다. 참 좋다”
라고 여러 번 흡족해 하셨다.
희한하게도 아버지 묘지 번지가 478번지였다. 살아서 장전동 78번지에 사시던 두 분께서 죽어서 478번지에 묻히셨으니 그 자리가 딱 우리 부모님을 위한 자리처럼 여겨졌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남편은 장인 장모께 효성스러운 사위였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 엄마의 이부자리에 손을 넣어보며 잠자리가 따뜻한지 살폈고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친자식처럼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부모님과 살면서 생기는 갈등과 원래 무심한 성격으로 인해 부모님과 진정으로 다정하게 지내지 못한 것 같다. 우리 형제들이 엄마의 성품을 이어받아 다 그렇게 다정한 성품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당신 자식들이 아무도 하지 않는 효행을 사위로부터 받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잘해줘야지’라고 결심하였지만, 생활에 부대끼다 곧장 그 결심을 잊었다.
부모님께서 우리 집에 계시니 오빠는 가끔 우리 집에 와서 부모님 속을 뒤집어 놓고 갔다. 늙은 부모 앞에서 이혼한다고 하였고 돈을 해내라고 위협하기도 하였고 파렴치한 짓을 많이 하였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소주를 더 많이 들이켰고 엄마는 속을 끓였으며 그 때문에 나는 오빠를 미워했다. 심지어 남편 회사까지 찾아가 남편에게 돈을 요구했다니 남편에게 낯이 서지 않았고 오빠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다.
오빠는 친정 형제들로부터도 기피하고 싶은 인물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뚜렷한 벌이도 없이 살아야 했으니 용케 버틴 그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싶으면서도 당시는 당할 때마다 기분이 상했었다. 이제 팔순이 된 오빠를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오빠는 개발붐이 일던 한국사회의 희생양인 것도 같다. 지혜롭지 못한 많은 사람이 흥청망청 떠밀려갔던 시대의 희생자. 오빠에게는 세월의 때가 묻어 유들유들한 모습이 더 많이 보이지만 여전히 젊은 시절의 해맑은 모습이 약간 남아 있기도 하다. 오빠는 여전히 떠벌리고 허풍을 부리는데,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받는 듯 요즈음은 사는 아파트의 노인회장이 되었다고 자랑하고 다닌다.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나도 나이를 먹어가니 이제는 오빠를 원망하던 마음도 옅어진다. 오빠를 보면서 나는 성경에 나오는 요셉 생각을 했다. 요셉은 자기를 팔아넘기고 벌벌 떠는 형들에게 괴로워하지도 말고 자책하지도 말라고 하면서 자기를 이집트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셨던 것이라고 고백한다. 나는 요셉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가족에게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느낀다. 부모님은 없는 살림 중에도 나를 공부시켜 후일 길바닥에 나 앉지 않게 하신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하느님은 ‘우리 집안의 구원자로 나를 세우셨구나’라고 생각하면 나는 나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다 한 것 같아 다행스럽다. 더구나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 두 분 다 세례를 받게 해드린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몇 해 전 나훈아의 콘서트장에 갔을 때가 생각이 난다. 콘서트장까지 가서 시끄러운 공연을 봐야 하나 싶어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도 어렵게 구한 표라길래 마지못해 남편과 함께 콘서트장으로 가게 되었다. 콘서트장에는 우리처럼 늙수그레한 관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나훈아가 언제의 가수인가? 그런데도 그이는 참 대단한 에너지로 관중을 압도하였다. 노래 사이에 섞인 그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나레이션에 빠져들 무렵 그가 <홍시>라는 노래를 불렀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함께 살 때 부모님께 진심으로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우는 나를 달래며 남편이 말했다. “괜찮아, 당신 그동안 잘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