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다 보면 여러 환자와 그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2인실에 있었으므로 6인실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교재 범위가 좁았지만, 옆 병상 환자와 친밀하게 지낼 기회는 많았다.
우리가 입원한 곳이 암 병동이었으므로 환자 대부분은 암 환자였다. 그중에서도 9층은 두경부암 환자들이 많았다. 두경부암은 코, 부비동, 안면, 구강, 후두, 인두, 갑상선, 침샘 등에 발생하는 암을 말하는데, 위암이나 폐암 등과 달리 그리 흔치 않은 암인지라 환자들 사이에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묘한 친밀감이 있었다. 그래서 서로 어떤 병인지, 증세는 어땠는지,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등 궁금한 점을 서로 나무며 쉽게 친밀하게 되었다. 오래 병원에 입원해 있다 보니 다른 병실에 입원해 있는 환자 보호자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 법이다. 처음에는 암 종류가 어쩌고 치료 방법이 어떻고를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집안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남편은 내가 우리 집안 이야기를 다른 부인들과 나누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였으므로 주로 휴게소나 복도, 급식실에서 수다를 떨었다.
나는 여성들의 수다가 병원에서만치 중요한 곳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병실에서 밥상을 엎어버린 환자를 돌보던 어떤 부인은 끝내 눈물을 쏟으며 그동안 폭력 남편으로부터 당한 수모를 털어놓아 다른 부인들의 공분을 샀다. 요즘은 젊은 여성들의 권한이 세졌다고 혀를 내두르지만, 여전히 여자의 일생은 고달픈 듯했다. 특히 남편 병간호를 하는 여성들의 애환은 하는 자들만이 아는 법이다. 보호자들은 수다를 통해 가슴 속의 온갖 응어리들을 뱉어내면서 병간호의 애환을 덜어내고 있었다.
사실 나는 학교에만 있어 낯선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일이 낯설었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을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처럼 메마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고민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병원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이나마 생긴듯하여 그것도 인생의 수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곳의 모든 것이 인생이라는 학교였고 나는 계속 배우고 있었다.
병원에서 안 사실이지만 재발, 삼발하여 입원한 환자들이 많았다. 수술한 지 6개월 만에 재발한 환자도 있었고, 1년 이내, 2년 이내, 어떤 환자는 10년 만에 재발하여 입원하기도 하였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재발하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내가 불안해하자 정 카타리나는 나를 위로하며 병원에는 아픈 사람만 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고, 나은 사람들은 병원에 오지 않으니 보기 힘들 뿐이라고 나를 일깨웠다. 맞는 말이기는 해도 재발환자가 그렇게 많다는 사실은 심히 두려운 현실이었다.
나는 남편의 눈치를 보아가며 옆집 환자나 환자 가족과 우정을 나누었다. 특히 부산에서 식도암 수술을 위해 올라온 문씨 영감과는 문중 이야기를 하며 친하게 지냈다. 영감님이 문중 일을 많이 하여 장전동 문씨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계셨다. 이야기 도중에 아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여 반가웠던 것이었다. 영감님은 상당히 박식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남편이 하도 나에게 눈치를 주어 남편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재빨리 문씨 영감님에게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감님은 나더러
“학교 선생님이지요?”
라며 하며 대번에 나의 정체를 눈치채었다.
그 후 영감님은 6인실 병실로 옮겨갔지만 문씨 성을 가진 교수인 나를 특별하게 여겨주어서(나에게 문씨 족보를 사라고 은근히 압박하였다) 아들과 며느리를 우리 병실로 보내 맛난 것도 갖다 주었고, 퇴원할 때는 노구를 이끌고 우리 병실로 와서 장중하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아직 정정하게 보이는 문씨 영감이 퇴원 후 부산의 요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고 하여 마음이 언짢았다. 요양원에서도 고상한 인격을 지닌 채 살 수 있기를 기원해 보았다.
옆 환자와 사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짧은 만남 기간이었다. 2인실에는 병실료를 염려해서인지 환자들이 짧게 머무르려고 했다. 우리가 80일을 머무르는 동안 무려 23번이나 파트너가 바뀌었다. S병원에는 전국 최고라는 명성 탓인지 지방에서 올라온 환자들이 많았다. 광주, 부산, 김천, 포항, 서산, 인천, 원주, 속초, 청주 등 전국팔도의 사람들을 다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방분들이 많이 왔었다. 물론 서울에 살고 있는 환자들도 있었다. 서울에서 온 분들은 좀 쿨한 편이었다. 혼자서 조용히 왔다가 1박 2일의 입원을 통해 각종 검사를 하고 돌아가는 환자들을 몇 보았다.
어떤 노인은 3년 전 위암 수술을 받았고, 이번에는 폐암 수술 차 입원했다고 했는데 보호자도 없이 홀로 병실에 계셨다. 노인의 암이 재발해도 가족들이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아 씁쓸했다. 혼자 입원한 노인을 위해 필요할 때 도움이 되려고 표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수도권 사람에 비하면, 지방에서 오신 분들은 대개 가족들이 많이 따라왔고 환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지방에서 오신 분들에게는 끈끈한 정이 있었다. 나도 지방 출신인지라 그분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끈끈함이 정답고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방분들이 더 행복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지방분들의 문제는 수술 후 환자가 중환자실에 머무를 동안 환자 가족이 머물 데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변에 방을 구하거나 아니면 수술상황실 의자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였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김천에서 올라온 한 폐암 환자는 폐암 수술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우람하고 장대한 체격을 가진 그 사람을 보자 왜 임꺽정이 연상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가 폐암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가족들의 강권으로 서울 큰 병원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폐암 판정을 못 미더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술 전 동의서를 받으러 온 젊은 의사는 순박한 시골 사람에게 냉정하게 수술과정과 부작용을 설명하고는 동의서에 사인을 받고 갔다. 눈만 껌뻑거리며 듣던 아저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기가 폐암일 리가 없다며 현실을 부인하였다. 아저씨가 수술실로 간 후 나는 그 순박한 아저씨가 큰 병이 아니기를 빌었다.
광주에서 온 안암 환자는 눈알 하나를 제거하였다. 간호사 출신의 부인은 간병에 지쳤는지 잠을 많이 잤다. 눈을 하나 잃은 그 환자는 눈을 잃고도 목숨을 살린 것에 대해 안도하는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다. 부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여서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고 특정 시간이면 커튼을 두르고 기도 시간을 갖는 것 같아 나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 그 안암환자가 우리와 같은 병실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포항에서 온 폐암 환자도 인상에 남는다. 우리가 서로 같은 병실을 쓸 때, 우정이 생겨 그가 폐암 수술 후 다른 병실로 배치된 뒤에도 병실을 오가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그 부부가 다 순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퇴원 후 외래 차 병원을 올 때마다 무언가를 사 가지고 우리 병실을 방문해 주었다.
한 불우한 환자도 옆 병상에 와서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그는 60대의 안면편평세포암 환자였다. 그는 넓적다리 살 두 쪽을 떼 내어 볼 성형에 사용한 환자였다. 이 환자와는 일주일 이상을 같은 병실에 있었으니 꽤 오래 같이 지낸 셈이었다. 그 남자는 수술 후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가 내방하여 환자를 면담하고 가더니 그날 밤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려고 하자 환자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간호사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간호사의 접근을 뿌리치더니 몸에 달아놓은 주삿바늘을 다 뽑아버리고 고함을 질러댔다. 어디선가 남자 간호사들과 힘센 사나이들이 와서 그 남자를 침상에 묶고 진정제를 놓은 후 관찰실로 데리고 갔다.
그 모든 충격적인 장면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병원의 침착한 대응이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넓적다리 두 쪽을 다 떼어내었다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웠을까를 생각하니 그 환자에게 마음이 쓰였고 병원의 침착한 대응이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관찰실에 대한 나쁜 기억이 남아있어 더욱 그랬다. 다행히 하룻밤을 관찰실에서 보낸 환자는 다음 날 병실로 돌아왔다. 우리가 퇴원할 때까지 그 환자와 같이 있었는데 다시는 난동 사건은 없었다. 그 환자가 무사히 치유되어 살을 베어낸 공포에서 헤어나기를 바랐다.
가장 마음이 아픈 환자는 광주에서 올라온 교사 부부였다. 남편이 폐암인데 병이 매우 중한듯하였다. 아내도 학교 교사였는데 남편 병수발을 하느라고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들었다. 두 사람은 한 쌍의 잉꼬부부 같아서 아내 선생님의 남편에 대해 애틋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남편이 중환자실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환자 보호자는 그때마다 병실을 빼 주어야 했다. 나는 그 선생님의 처지가 안타까워 짐을 우리 방의 장에 넣어두고 다니라고 편의를 봐 드렸다. 좀처럼 짐을 찾으러 오지 않길래 전화를 내었더니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어 그 앞을 떠날 수 없노라고 했다. 언제 남편과 이별할지 몰라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전화를 받자 마음이 매우 아팠다. 내가 병실을 잠깐 비운 사이에 그 선생님이 와서 짐을 빼가며 고맙다고 간단한 메모를 남기고 갔다. 내 생각에 남편이 돌아가신듯했다. 나는 병실에서 보았던 약하고 여리면서 남편 때문에 애틋하여 어쩔 줄 모르던 자그마한 여인 생각에 슬펐다. 만나서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문자로 유감의 말을 전하고 만나지는 못하였다. 그 부부 생각이 참 많이 난다.
병원에서 놀라운 해후도 있었다. 태국의 방콕에 살 때, 같은 아파트에 살던 김 사장이 S병원에 입원해 온 것이었다. 김 사장은 피부암 진단을 받고 입원하였는데, 암 발원지를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김 사장 내외와는 태국에 있을 때도 잘 알고 지냈지만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더욱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게 되었다. 먼저 퇴원한 김사장네는 병원에 올 때마다 우리를 찾아왔는데, 한번은 유명맛집의 미역국을 가져다주어 내가 배불리 먹었다. 참 희한한 인연이었다.
병실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두 멋진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병원 생활이었다. 어떤 가족은 가족의 우애가 너무 돈독하여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조카들까지 몰려와 좁은 병실을 마구 휘젓기도 하였다. 잘 참다가 어떤 날은 성격이 까칠해져 옆 보호자 가족들에게 면회시간이 지났으니 병실에서 나가 달라고 톡 쏘기도 하였고, 어린아이들이 와서 마구 먹고 침대에서 뛰고 하면 휴게실로 나가 달라고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병원 당국은 이런 대규모 방문단을 규제하지 않고 뭐 하느냐고 속으로 부아가 끓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편은 노트에다 ‘캄 다운(calm down)’이라는 글을 써서 내게 보여주곤 했다.
사실 한국의 병실 문화는 유별스러운 점이 있다. 가족, 친지, 동료 간의 끈끈한 사랑과 관심은 막을 길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병실을 돌면서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기야 정 카타리나나 남편 친구들도 기를 쓰고 병실로 찾아왔으니 뭐라고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밤새 전화를 해대는 환자에게는 기가 질렸다. 폐암 검사를 위해 입원한 한 환자는 아내와 함께 밤새 전화를 돌렸다.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들에게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알리더니 마을 이장에게까지 전화를 해댔다. 자기가 폐암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엄청난 사실을 알리고 싶어 안달을 내는 그 사람들이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수술 날짜를 잡고도 일언반구도 없이 여행에 따라나선 남편보다는 더 자신에 충실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그런데 코로나가 덮치자 병실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코로나 사태 후에 남편이 입원하게 되었는데, 병실이 완전히 고요하였다. 보호자들이 오가며 나누는 잡담도 들을 수 없었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였다. 코로나가 우리 사회의 문병문화를 일시에 바꾼듯해서 코로나가 미친 영향에 이 부분도 기록되어야 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