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먹기 위한 사투였다.
하인두암 수술환자의 경우 가장 어려운 일이 음식을 삼키는 일이다. 특히 남편처럼 유리피판 수술을 통해 다른 조직의 살을 이식한 환자의 경우 이식한 근육이 연동운동 기능이 없으므로 음식이 식도로 쉽게 내려가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입안에 고여있던 음식이 호흡과 함께 폐로 들어가 흡입성 폐렴을 유발하게 된다. 일반인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폐렴은 주요 사망원인이 된다. 그러니 남편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먹는 문제였다.
먹는다는 것은 생물에 있어 삶의 유지에 필수적인 행위이다. 남편이 삼키는 문제로 고심을 거듭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가 일상으로 음식을 입에 넣고, 삼키고, 소화하는 그 모든 과정이 오히려 기적같이 보인다. 태초에 세포 하나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연합하여 조직을 만들고, 조직마다 다른 기능을 가지며 이 기능들이 협력하여 생명체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하나의 기능이 멈추어서야만 깨달을 수 있는 생명체의 신비요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해서 암세포를 깨끗이 제거한다고 해도 입으로 음식을 삼키지 못하면 환자의 삶의 질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진다.
수술 후 처음에는 코에 줄을 끼우는 비위관을 통해 물과 유동식을 주입하였다. 콧줄이 위로 바로 연결되므로 삼키는 문제의 난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콧줄을 통한 유동식 투여는 장기간 쓸 수 있는 수단은 아닌 것 같았다. 입원이 장기화되자 이번에는 비위관을 위루관으로 바꾸었다. 위로 직접 관을 연결해 유동식을 투입하자 식사가 조금 더 편해졌다.
이 방법을 통해 음식물을 섭취하려고 하면 여러 도구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행히 유동식은 수입품과 국내 제품이 시판되고 있어 내가 따로 유동식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시판 유동식은 유동식만으로도 환자에게 필요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도록 열량, 단백질, 비타민, 미네랄, 식이섬유 등에 꽤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동식을 뱃속으로 흘려 넣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 유동식을 매달아야 하므로 유동식을 매달 걸고리가 필요하다. 정 카타리나가 철옷걸이를 개조하여 고리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시판하는 S고리도 준비해 다니는데, 옷걸이가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므로 여러모로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즈음도 남편이 외출하려고 하면 나는 꼼꼼하게 이런 것들을 챙긴다. 유동식, 손 소독제, 물, 물그릇, 주사기, 걸고리 등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뱃줄이 오염되면 큰일이기 때문에 꼼꼼한 뱃줄소독도 필수적이다.
잠자기 전, 남편의 뱃줄 소독을 마쳐야 보호자인 나의 일과도 끝이 난다. 그러면 남편은
“부인 수고했소. 오늘 소독은 만점이요, 인젠 자도 좋소”
라고 말한다. 옛날 초등학교 시절 읊었던 동시에 나오는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젠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를 연상하며 하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잠자리에 든다.
수술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은 뱃줄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뱃줄을 내놓고 유동식을 매달려고 하지 않아서 외출에 제한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도 태연히 뱃줄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당에서 외식할 기회가 오면, 우리 가족은 그곳이 유동식을 메달 수 있는 환경인지를 먼저 살펴본다. 분리된 방이 있는 곳이면 좀 낫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 가족이 식당을 두리번거리며 걸 곳을 찾게 되므로 종업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런데 요즈음 식당들은 인테리어를 깔끔하게 하다 보니 벽에 못이나 그림을 건 곳이 거의 없다. 커튼 고리를 이용한다든지 여러모로 머리를 짜내보지만, 도저히 영양액을 걸 장소가 보이지 않으면 남편은 혼자 배를 곪고 앉아있다가 집에 돌아와서 식사해야 했다.
뱃줄로 유동식을 넣을 경우,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튜브가 막혀 나중에는 꽉 막히게 된다. 특히 멀리 갔을 때 관이 막히면 여간 당황스럽지 않다. 그렇게 되면 응급실로 가서 위루관을 교체해야 한다. 뱃줄은 6개월~1년에 한 번은 교체해야 하는데 위루관 교체를 위해 지금까지 네 번 응급실로 달려갔다. 한 번은 위루관이 빠져 급하게 응급실로 간 적도 있었다.
남편은 처음에는 500ml씩 하루 세 번 유동식을 주입했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점심은 300ml로 바꾸었다. 그러면 아무리 잘해야 하루 1300 칼로리의 열량밖에 섭취하지 못하게 된다. 이 정도 섭취만으로는 암수술과 치료과정 중 쇠약해진 몸에 절대 부족한 열량이므로 어떻게든 음식 섭취를 늘려야 했다.
입원한 지 50여 일이 지나자 병원에서는 삼킴 훈련을 권장하였다. 먼저 침 삼키는 훈련부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강제적으로 빼내던 침을 삼키게 되자 기침이 폭발적으로 나왔다. 역시 침이 폐로 들어가면서 이를 뱉어내려는 인체의 저항이 시작된 것으로 보였다.
침이 그러하니 음식을 입으로 삼킨다는 것은 요원하게 보였다.
퇴원한 다음 달부터 삼킴을 위한 재활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재활치료에는 운동치료와 작업치료가 병행되었다. 약간의 재활치료를 한 후 3월에 처음으로 삼킴 검사를 하였다. 그 결과 남편의 목 상태는 무엇을 삼킬 정도가 아니라는 판정이 나왔다.
다시 재활치료를 계속하다가 4월에 삼킴 검사를 했더니 삼키는 기능의 20%밖에 작동하지 않아 역시 외부에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의사의 권고를 들었다.
또다시 재활치료를 하고 6월에 삼킴 검사를 하였을 때는 삼키는 기능이 약간 호전되었으니 입으로 음식을 먹는 연습을 해보자고 하였다. 물리치료 선생과 함께 요구르트를 이용하여 먹는 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8월, 10월, 11월의 잇단 삼킴 검사 결과는 실망이었다. 전혀 기능이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에 실망해 있자 우리 주치의는 구강확장시술을 권하였다. 구강확장시술을 한 후에는 죽을 쑤어 곱게 간 다음 입으로 먹는 연습을 하였다. 연말쯤 되자 죽을 갈지 않고 먹어보았고 11월 삼킴 검사에서 담당 의사는 연한 밥과 반찬의 시도를 허락하였다. 일 년간의 눈물겨운 재활훈련과 삼킴 검사, 구강확장시술 등의 노력 결과 이제 밥을 먹을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그러나 밥 한 숟가락을 먹으려면 한, 두 시간을 붙잡고 있어야 할 만큼 삼키기는 어려웠다.
퇴원한 지 두 해째가 되는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밥과 반찬을 시도하였다. 여전히 밥 한 숟가락을 먹는데 한 시간 이상 걸렸다. 1월의 삼킴 검사 결과, 의사는 삼키는 기능이 30% 정도까지 회복되었다고 하면서 음료를 마신다거나, 된장국에 밥 말아먹는 것은 위험하니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삼킴 검사를 할 때마다 담당 의사는 삼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각성시켰다. 기껏 암은 극복했으나 폐렴 때문에 응급실에 오는 환자가 많다며 겁을 주었다.
의사의 경고가 있으면 먹는 행위는 더욱 위축되었다. 내 생각에는 자꾸 음식을 먹어서 목 근육이 음식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듯이 여겨졌으나 남편은 모범생답게 의사의 허가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3월의 삼킴 검사 결과, 기능이 더 후퇴한 것 같다고 하여 다리에 힘이 다 빠졌다. 의사는 남편같이 나이 든 환자의 경우 대부분이 기능이 퇴화하는데, 그 상태대로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라고 하였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6월까지 삼킴 검사를 하였다. 퇴원한 지 세 해 째가 되는 올 1월에도 진전이 없었다.
삼킴 검사의 횟수가 증가하고 계속 의사의 경고를 듣게 되자 내성이 생겼다고 할까 반발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할까, 남편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진료실 앞에서 만난 병상 이웃과의 조우가 큰 영향을 미친 것도 같았다. 경산에서 온 그 환자는 식도암이 재발한 환자였다. 병실에서 같이 지날 때도 재발한 환자치고 본인도 그 아내분도 의연하고 경쾌하여 덩달아 우리까지 기분을 밝게 해 주던 부부였다.
그 경산 환자가 외래병실 앞에서 아직도 뱃줄을 달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외쳤다. 자기는 입원해 있을 때, 의사가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안 먹고 사느냐고 하면서 살짝살짝 음식을 먹었다고 했고, 뱃줄은 진작 뗐다고 하였다.
남편은 그 후 삼킴 검사를 더는 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20%, 30%라는 수치에 목 메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먹는 것에 집중하였다. 밥을 된장국에 적시고 작은 김치 조각을 얹어 천천히 먹었다. 한국 사람에게 밥과 된장국과 김치의 존재는 생명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했다. 나이가 들면 이 세 가지 식품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데, 남편같이 오래 음식을 먹지 못한 경우에는 더욱 감격스러운 식품이 된다.
식사할 때마다 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기침이 나온다는 것은 인체가 이물질을 폐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노력이 살아있는 증거라고 생각되었다. 기침이 잦아들면 또 한입 먹는 식으로 식사를 계속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도할 때도 기침을 많이 했다. 코로나로 민감한 때였으므로 남편이 자지러지게 기침을 하면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피해 앉았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고 외칠 수도 없어 미안하고 답답하였다.
올 7월 남편이 친구들과 강원도 여행에 나섰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 할 만큼 남편이 건강에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것이 기쁘면서도 식사자리가 불편할 게 뻔해 남편의 여행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웬 여행이냐고 타박을 하였더니 남편은 나에게 휴가를 선사하려고 일부러 여행을 간다고 말했다. 남편은 자기 병간호에 매달려 온 아내에게 휴가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마음이 가감 없이 전해져 오자 괜히 콧등이 찡해졌다.
남편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사흘의 휴가를 받은 나는 친구들을 만나 놀기도 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며 오랜만에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자유로우면서도 뭔가 허전했다. 사흘째 되는 날, 남편이 돌아왔다. 한눈에도 홀쭉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입가도 물렀다. 나는 서둘러 남편의 저녁을 준비하고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데 남편은 음식을 삼킬 때마다 연신 기침을 해댔다. 사흘 만에 들어보는 정다운 남편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그동안의 허전함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 남편의 식사량이 조금 늘었다. 기침도 덜 한다. 음식을 좀 낫게 먹자 체중도 약간 회복되었다. 역시 용불용설이 맞는가? 음식을 계속 먹어주자 목의 연동운동이 조금씩 회복된 게 아닌가 하는 희망이 생겼다. 전에는 매운 음식을 통 못 먹더니 이제는 청양고추가 든 김치찌개에도 숟가락을 댄다. 이제 삼킴 검사를 하러 가면 의사가 깜짝 놀랄듯하다. 만용이 아니라 우리는 그동안 폐기능 검사나 폐 X-선 조사 등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폐렴에 신경을 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