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퇴원

by 보현


80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퇴원하였다.

병원에 있으면서 보니 암 수술 환자라고 해도 입원 기간은 3박 4일 내지 4박 5일에 불과했다. 수술 하루 전날 입원하여 수술 준비를 하고 그다음 날 수술하고, 중환자실에 하루 머문 후 일반병실로 돌아와 잠시 환자의 예후를 본 후 바로 퇴원시키는 일정으로 로테이션이 되고 있었다.

S병원의 경우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오고 의사들의 수술일정이 일 년씩 밀려있다고 하니 늘 병실 부족이 문제인듯했다. 그러다 보니 무리하게 환자들을 퇴원시키고 병실이 비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새 환자들이 입원하여 똑같은 일정으로 되풀이되는 과정을 거쳐 나갔다. 마치 재깍재깍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태엽처럼 비정하리만치 시스템적으로 이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퇴원 후 외래진료를 해보니 10분에 4명씩 예약이 잡혀있어 우리나라의 유명한 ‘3분 진료’에도 못 미침을 알았다. 얼마나 능률적으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지 거대 병원의 체계적인 운영에 감탄하면서도 우리가 마치 인간이 아닌, 기계의 부속품이 된듯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남편의 경우, 80일간의 입원은 그런 현실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 병원에 머문 편이었다. 오래 입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리피판 수술의 후유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졌다. 하지만 우리를 담당한 주치의의 인간애가 남편의 장기입원을 가능케 한 한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병원의 냉정한 시스템 속에서도 그분은 남편에 대한 연민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남편이라고 표현했지만 넓게는 환자들에 대한 연민이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남편의 입원날짜가 길어지자 주치의가 퇴원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심히 불안해하였다. 집에서 가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뭔가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 대처할 방안이 없다고 보는 것 같았다. 곧 아내의 개학일이 가까워져 오는 것도 남편의 불안감을 더 높였다.

나는 남편이 불안해하므로 입원기간을 좀 더 늘려달라고 의사에게 통사정하였다. 의사는 장기 입원 시 항생제 내성균 우려가 있으니 환자에게도 이롭지 못하다면서 완곡하게 퇴원을 종용하였다. 담당 의사가 워낙 점잖은 사람이라 환자에게 냉정하게 대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레지던트 의사와 종양내과 의사까지 와서 퇴원을 종용하였다. 남편을 소위 퇴원하지 않고 버티려는 요주의 환자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 여의사는 와서

“환자가 이렇게 멀쩡하고, 집도 가까운데 왜 퇴원하지 않으려고 하세요? 우리 병원에 입원하려고 기다리는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하며 남편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니 남편의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퇴원 준비를 해야 했다. 퇴원에 필요한 물품리스트를 작성하고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물품리스트의 대부분은 가래석션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흡입기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인근 의료기상에서 구입하였다. 네블라이저 기계는 의사의 주선으로 회사에서 대여하였다. 그 외에도 가래를 뽑아내는데 필요한 카테트, 멸균장갑, 생리식염수, 손소독제, 세정용 시린지 등을 구매하였다.


보호자에 대해서도 퇴원을 위한 교육이 진행되었다. 가장 중요하게 관찰해야 할 사항은 폐렴이라고 했다. 열이 오르거나 가래 색깔이 누렇게 되면 즉시 병원으로 달려오라고 했다. 뱃줄 소독법을 의사와 간호사로부터 배웠다. 위루술 환자의 경우 뱃줄이 오염되면 큰 일인가 보았다.

그중에서도 나아지지 않는 것이 가래 석션하는 방법이었다. 석션 하기는 참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환자의 목에 통증을 덜 가하면서 가래를 효율적으로 제거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내가 석션을 잘못해서인지 퇴원 스트레스 때문인지 몰라도 또다시 남편의 가래가 엄청나게 나왔고 목 안쪽이 너무 헐어 퇴원이 무기 연기되었다. 가래나 침을 줄이는 약을 처방하자 이번에는 가래가 너무 끈적하게 나와 석션이 잘 안 되었다.


남편이 퇴원하면 어디로 모셔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S병원에서는 수술한 암환자들을 너무 빨리 퇴원시키기 때문에 근처 요양병원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요양병원에 남편을 입원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부정적이었다. 비용에 비해 환자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남편은 요양병원에 들어갈 정도로 위중하지 않다는 평가였다.

남편 친구인 방콕의 김사장은 양평의 산골에 있는 황토기와집을 전세로 얻어 머무르고 있었다. 그곳은 암환자들을 위해 특별히 조성된 곳이었다. 김사장은 그곳이 매우 흡족한 듯, 남편도 그곳으로 오라고 권유하였다. 그래서 남편과 사전 답사를 갔다. 양평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산골짜기에 암요양원을 표방하는 황토기와집들이 여러 채 모여 있었다. 건물 벽을 황토로 세웠고 내부를 편백나무로 둘러 집안에 들어가자 편백나무 향기가 훅 풍겼다. 난방은 장작을 때어 원적외선을 이용해 암을 없애준다고 하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암환자들을 위해 차려진 건강식을 함께 먹었다. 식사는 주로 채식으로 차려졌는데 내용도 좋았고 맛도 훌륭했다.

식사를 마친 환자들이 식당 앞의 벤치에 옹기종기 앉아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눈에도 병이 깊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의 환자들이 그네에 앉기도 하고 벤치에 기대기도 한 채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그곳에는 더 이상 병원치료를 기대할 수 없는 말기암환자들이 자연의 치유력에 의지하려고 모여든다고 하였다.

내 눈에는 그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들을 매우 소중하게 보내는 것 같이 보였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언제 걷어가실지 모르지만 남아있는 생명을 즐기려는 듯한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숙연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느꼈다.

우리는 식사 후, 요양원 주변 숲 산책길을 걸었다. 산으로 난 산책길은 고즈넉하게 길게 이어져 있어 숲 속 산책이 필요한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김사장내외가 왜 그렇게 그곳에 혹했는지 알 것 같았다. 태국에 사업기반을 두고 있는 김사장은 사실상 이곳을 사용할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았다. 김사장은 자기들이 쓰지 않을 때 우리더러 그곳에 와 지내라고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나도 남편도 환자들이 모여사는 곳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으로 퇴원하기로 결심하였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오래된 아파트라서 벽에서는 끊임없이 라돈이라는 방사선 물질이 나오고 있고, 새카만 먼지가 들어오고, 밤낮없이 소음으로 요란한 곳이지만 우리 집이었다.


10월 3일, 마침내 남편은 퇴원하였다. 7월에 입원하였는데 계절은 어느새 가을이 되어있었다. 남편은 그동안 정들었던 입원복을 벗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수척해진 탓에 옷이 따로 놀았지만, 양복 상의를 차려입고 페레가모 구두를 신으니 남편의 원모습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자 상황은 예상한 것보다 더 나빴다. 모든 것이 카오스였다. 봉착한 첫 관문은 흡입기를 작동시켜 가래를 빼는 일이었다. 의료기상에서 흡입기를 살 때 배운 바대로 했는데도 기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설명서를 펼쳐놓고 궁리를 하자 남편이 역정을 내었다. 남편은 집에서의 병간호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당황이 되면서 진땀이 흘렀다. 그럴 때마다 남편보다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는 옥죄임을 받았다.


그 후 나의 주요 일과는 남편을 운동시키는 일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중요한 일과가 남편과 함께 병원복도를 걷는 일이었다. 수술 후 병실로 돌아온 첫날부터 의사들은 걷기를 권유하였다. 남편이나 나나 ‘죽으려면 누워있고 살려면 걸어라’라는 표제어를 늘 머리에 새기고 있었다. 걷기는 살기 위한 투쟁의 두 번째 관문쯤 되었다. 첫 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먹는 것이었다. 먹는 것은 기능적으로 어려웠지만 걷기는 의지로 가능한 일이었다. 첫 아침소독시간부터 휠체어를 타지 말고 소독실까지 걸어오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다. 허벅지살을 베어내고 주렁주렁 피고름 주머니를 메단 몸으로 치료실까지 걸어가 차례를 기다리는 과정은 힘들어 보였지만 병원에서는 냉혹하리만치 몸을 움직이기를 권했다. 몸을 움직여야 상처가 빨리 아문다고 하였다.

남편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콧줄이나 뱃줄로 약간의 유동식을 섭취하고서는 꼭 병원복도를 걸었다. 다섯 바퀴씩 도는 것이 목표였다. 어떤 때는 두 바퀴를 걷다가 돌아와 쉬다가 다시 걷고 하였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환자들이 병원 복도를 걸었다. 암병동 9층 복도는 꽤 길었다. 환자들은 몸에 여러 가지 줄과 기구를 지지대에 연결하고 보호자들과 함께 걸었으므로 충돌방지를 위해 걷는 방향은 일방통행으로 정해져 있었다. 간혹 초보 입원자가 거꾸로 걸어 흐름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 우리는 양재천을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양재천이 지척에 있었다. 이제부터 양재천이 남편을 살리는 생명의 길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퇴원한 첫날부터 딸과 내가 부축하여 남편의 산책길에 나섰다. 10월 초여서 날씨가 좋았다. 아파트를 나가 양재천이 보이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은행나무들이 약간 노란색을 띠기 시작하였고 길바닥에는 은행알이 노랗게 떨어져 구린내를 내고 있었다. 투명한 가을 냄새가 났다. 남편은 걷다가 힘들면 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 가을 냄새를 음미하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첫날은 걷기보다 벤치에 앉아 쉬기를 더 많이 하였지만 한 시간여의 산책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날 남편은 배에 필름을 붙이고 처음으로 샤워를 하였다.

다음 날에는 아파트 경계를 벗어나 영동 5교까지 걸어갔다. 차츰 산책 범위가 넓어져 어떤 날은 대치교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어떤 날은 타워팰리스 쪽으로 걸었다. 가래가 많이 생겨 더 이상 걷기가 어려웠던 적도 있었고 날씨가 추워져 일찍 귀가한 날도 있었으며 어떤 날은 남편의 심기가 불편하여 일찍 귀가하기도 하였지만 양재천 산책은 꾸준히 이어졌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양재천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 들었다. 은행나무는 양재천 뚝길 양쪽에 지구를 받치듯이 당당히 서있었다. 은행나무는 페름기 이후 지금까지 지구에 살아남아있는 화석나무라고 한다. 아틀라스처럼 지구를 받치고 있는 은행나무도 지금 힘겹게 멸종위기를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나무에게서 생명에 대한 강한 결기를 느꼈다.


11월에 들자 좀 더 멀리 나가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남산으로 가을 산책을 나갔다. 남산 도서관 앞에 차를 세우고 남산타워 쪽으로 조금 올라갔다. 주변에 수크령이 빛바랜 자색 꽃을 피우고 있었고 구절초가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는 계단에 앉아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하늘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높은 가을 구름이 아름답게 걸려있었다. 쌀쌀한 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깊어가는 가을의 향기를 맡았다. 남산의 갖가지 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은 이제 이별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 끝에 새 움이 달려 있었다. 나무들은 잎을 떨구면서도 내년 봄을 기약하며 새 생명을 예비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퇴원 후 지금까지 우리는 양재천을 걷고 있다. 남편이 아프기 전에도 남편과 양재천을 걸었지만, 남편이 아프고 난 뒤 걷는 산책길은 느낌이 달랐다. 남편이 한걸음 걷다 쉬던 벤치도 고맙게 느껴지고, 남편이 쓰러질 듯 주저앉은 나무 계단도 고마웠다. 이렇게 세심하게 벤치를 놓고, 아름다운 나무 계단을 만들어 놓은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양재천에 갖가지 식물을 심어 아름다운 산책길을 조성한 강남구 담당자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이 일었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양재천의 풍경이 더 선연하게 다가왔다. 봄이 되자 생명의 재개를 축하하듯 환호 작약하며 온갖 꽃이 피었다. 왕벚꽃이 무더기로 피는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꽃구경 나온 사람들이 풍기는 생기도 좋았다. 나는 특히 귀룽나무를 좋아하는데, 귀룽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이면 남편을 이끌어 함께 은은한 꽃향기를 맡았다. 여름에는 온갖 식물이 무성하여 생명의 깊이를 더했다. 특히 참느릅나무의 늘어진 섬세한 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참느릅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면 소설 <1984년>에 나오는 연인들이 연상되기도 하고 <침묵의 봄>을 쓰고 세간의 비판에 곤혹스러워하던 레이철 카슨이 연상되기도 하였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양재천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뽐낸다. 감이 주홍색으로 익어가면 어릴 때 우리 집 뒷마당에 있던 커다란 감나무 세 그루가 연상되면서 같이 뛰놀았던 동무, 부모 형제들이 떠올랐다. 흰 눈이 내리면 양재천 풍경은 몽환 속에 빠져들었다.

내가 양재천의 이 모든 것들에 넋을 빼고 있으면 남편은 저 앞에 걸어간다. 남편은 점점 걸음이 빨라지고 있고 나는 언제나 허둥지둥 남편을 쫓아간다. 나는 양재천에서 만나는 이 생명의 길이 소중하여 <생명의 길 양재천을 걷다>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양재천의 식물들에 대한 단상을 적고 있다. 새로이 발견하는 생명들에 대한 나의 찬사의 글이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양재천을 걸으며 온갖 생명이 용약하는 그 현장에서 우리의 생명을 꿈꾼다. ‘죽으려면 누워있고 살려면 걸어라’라는 표제어를 늘 머리에 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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