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시골집 화재

by 보현


남편이 퇴원하고 집에 누워있는 3월 어느 날 아침, 시골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골에 살고 계신 6촌 아지매였다. 아지매는 매우 주저하는 목소리로 시골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시부모님께서 사시던 시골집이 하도 낡아 남편이 아프기 전 다시 지으려고 설계도면을 받아놓았던 참이었다. 아지매는 한 참 뜸을 들이더니 “근데 시숙님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요”

하며 울먹이는 소리로 말하였다.

그 말을 듣는데 가슴에서 무언가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가 오전 10시나 되었는데, 그 시간에 시숙이 집 안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부지런한 시숙은 아침밥을 먹고는 마을 한 바퀴를 도는 습관이 있었다. 좀 있으면 돌아오시겠지 라고 위안하면서도 마음의 고동이 가라앉지 않았다.


남편 고향은 산청면 단성리 입석리이다.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노역을 하며 어렵게 사시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마을로 들어가셨다고 했다. 그곳에서 6남매를 두었는데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 살았고 오직 한 분 시숙만이 시골집을 지키고 계셨다. 남편의 바로 손 위 형님인 그 시숙은 어릴 때 마루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친 탓에 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했다. 대처에 나가 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시숙은 시골에서 살았다. 말하자면 이 시숙은 우리 집안의 굽은 소나무였던 셈이었다.


시숙이 의지했던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위로 형님 두 분도 돌아가시고 이제 막내인 우리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혼자 계신 시숙을 위해 자주 시골을 드나들었다. 나는 시숙을 위해 국을 많이도 끓였다. 국을 담은 찜통과 반찬을 싣고 우리가 시골이 보이는 거리에 도착하면 저 멀리 마을을 지키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면 그 나무 아래에 조그만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시숙이었다. 시숙은 우리가 시골에 간다고 전화를 해두면 새벽부터 거기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아예 전화를 안 드리고 그냥 시골에 갔다. 시숙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시골 가는 날을 미리 알려드리지 않자 시숙은 매일 느티나무 아래에 나가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중촌 마을의 느티나무에는 우리 시숙의 오랜 기다림이 서려 있는 셈이다.


시숙이 어찌 되었는지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병상의 남편은 애가 타서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나는 진주 누님댁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씀드리고 얼른 시골집에 가서 아주버님이 어찌 되었는지 근황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시골에서 계속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아주버님이 집안에 계시다가 변을 당한 것 같다는 불길한 소식이었다. 남편의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다.


시골에 소방차가 대규모로 동원되면서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큰 불길이 잡혔다고 했다. 소방대원이 방안에 웅크리고 계신 시숙을 발견하였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시숙에게 딸이 하나 있다. 그 딸이 현지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질녀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 시숙의 시체를 국과수로 데리고 갔다고 하였다. 장례를 언제 치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남편을 대신하여 황망히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일단 장례식장을 잡아 장례준비를 하였다. 질녀와 질녀 사위, 두 아들만이 동그마니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일찍 부검이 끝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 중이어서 시숙을 보내는 길에 손님이라고는 없었다. 질녀 가족과 진주에 계시는 손위 동서와 나 이렇게 조촐하게 아주버님을 보내드렸다.

장지는 시골 뒷산에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화장한 후 시골 장지의 부모님 묘 아래에 시숙을 묻었다. 형식적인 장례절차가 이루어지는 동안 아무도 울지 않았다. 한 사람의 가는 길이 너무 쓸쓸하여 슬펐지만 그래도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우리는 적막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다가 각자 헤어졌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숙 생각을 했다. 시숙은 시골에 계속 살았으므로 사회성은 별로 없었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시숙을 보면 <바보 겐주>가 곧잘 떠올랐다. 약간 모자란 아이인 겐주는 허리춤을 새끼줄로 묶고 마을 뒷산과 밭을 헤매고 다녔다. 그는 비 내리는 숲과 날아가는 매를 좋아했고 특히 나무를 보면 좋아서 절로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 겐주가 집 뒤편에 있는 커다란 들판에 삼나무 묘목을 심기 시작하자 마을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은 겐주가 또 바보짓을 한다고 놀려댔다. 어느 가을, 겐주는 전염병에 걸려 죽었지만 나무들은 쑥쑥 자라 커다란 삼나무 숲을 이루었다. 겐주를 바보라고 놀리던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여 그 숲에 겐주의 기념비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방콕에서 5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시숙 일은 우리 관심사 밖이었다. 고등학생인 아들의 대학입시가 가장 중요한 화두일 때였다. 나는 다른 엄마들의 조언을 귀담아듣다가 결국 대치동으로 오게 되었다. 해외에 근무하다가 한국에 돌아오면 비싼 집값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박완서가 쓴 <엄마의 말뚝>에서 처럼 나도 식구들의 서울살이를 위해 서울에 말뚝하나를 박으려고 동분서주하였다.


약간 정신을 차린 후 시골집을 찾았을 때, 풀더미 속에서 혼자 살고 있는 시숙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시숙을 돌보던 위의 두 형님도 돌아가시자 실의에 찬 시숙은 자라 오르는 잡초를 제거할 의욕도 잃고 풀더미 속에서 살고 계셨던 것이다. 시숙에게 있는 유일한 딸은 결혼하여 대처로 나가 사는 탓인지 아버지를 자주 찾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제 시숙을 돌볼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산청까지의 길은 멀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골을 찾아가려고 작정하였으나 여의치 못할 때도 있었다. 시골에 내려가 보면 시숙은 부엌 방의 문을 열어두고 둥근 양철소반에 밥과 국, 최소한의 반찬만 놓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생활이 너무 초라하고 적막하였다.

어느 해부터인가 나는 시숙을 위해 부엌 앞의 마당에 꽃을 심기 시작하였다. 해바라기를 위시하여 꽃양귀비, 금계국, 메리골드 등 여러 가지 꽃심기를 시도해보다가 최종적으로 백일홍을 심었다. 백일홍은 꽃도 크고 예쁘고 오랫동안 피어 적적한 시숙의 밥 친구로 제격일 것 같았다.

어느 날 시골집에 들어가자 시숙이 달려 나오더니

“제수, 꽃이 피었소. 꽃이 참 이삐요”

라고 하며 함박웃음을 피웠다.

나도 국 냄비를 던져두고 백일홍 꽃밭으로 달려갔다. 백일홍꽃들이 싱싱하게 피어있었다. 꽃밭에는 그 흔한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나는 그때 알았다. 우리 시숙이 꽃을 사랑하는 줄을. 바보 겐주처럼, 나처럼 시숙도 꽃을 사랑하였다.

시숙은 장애를 가진 자 특유의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누가 자기를 싫어하는지를 예리하게 알아챘다. 나는 아마도 진심으로 시숙에게 사랑을 보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시숙이 내게 좀 뜨악하게 대했다. 그런데 백일홍 사건 이후 시숙과 내 마음 사이의 거리가 많이 가까워졌다. 시숙은 내가 꽃을 심으면 옆에 쪼그리고 앉자 열심히 꽃을 익혔다. 그리고 풀을 맬 때 꽃을 뽑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풀과 꽃을 구분하지 못해 내 꽃모종을 뽑아버려 나의 원망을 듣곤 하였다.

홀로 계신 시숙 곁에 꽃양귀비며 부용, 봉숭아, 메리골드, 작약, 모란 등이 계속 꽃을 피웠다. 남편이 아프기 전까지 해마다 이 부엌 앞마당에 백일홍을 심어드렸다. 우리가 시골에 갈 때마다 마당에 풀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그런데 겐주처럼 천진난만하던 시숙은 한 줌 재가 되어 뒷산에 묻혔다. 지금은 천국의 꽃밭에서 평안을 누렸으면 하고 빌어본다.


남편의 발병 소식을 시골 시숙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시숙에게는 부모를 위시하여 위의 두 형을 잃은 트라우마가 깊이 내재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시숙이 남편의 발병 사실을 알게 된 사건이 생겼다. 남편이 퇴원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밤 중에 문 앞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벨이 울렸다. 나가보니 남편의 시골 초등학교 친구들이었다. 이 친구들은 남편의 집을 짐작으로 찾느라고 여러 집 현관 벨을 누르고 다녔다고 했다.

친구들이 잠시 남편을 보고 갔는데, 그중 한 친구가 시골에 가서 우리 시숙을 만나자

“동생이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 같던대”

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시숙은

“우리 동생이 죽는단다”

라며 울며불며 마을을 돌아다녀 온 동네 사람들이 남편이 곧 죽을 줄 알았다고 했다.

그 친구가 참 괘씸하였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 오래 산다고 하니 용서해주기로 하였다.


어느 날 우리 집으로 택배 하나가 왔다. 건축업자가 시골집의 불탄 자리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족보책이었다. 시골집이 타면서 우리가 열심히 모아두었던 책이며 그림이며 가전제품 등이 몽땅 재가 되었는데, 족보책 세 권만 멀쩡히 살아남아서 우리 집으로 온 것이었다. 겉면만 약간 그을린 족보 책을 보면서 참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시숙을 위해 새집을 하나 지어드리려던 우리의 숙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가 너무 굼뜨게 움직여 시숙은 그 새를 못 기다리셨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남편이 너무 애통해하여 차마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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