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입원한 것이 7월 중순이었으므로 그 정신없었던 때는 다행히 나의 방학 기간이었다. 그래서 남편 곁에서 내 손으로 병간호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9월이 다가오자 개학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 간병인을 구하기로 했다. 간호사들에게 문의하였더니 이구동성으로 김 아녜스를 추천하였다. 가장 성실하고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간병인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연락을 받고 김 아녜스가 병실로 왔다. 아녜스는 남편을 쭉 지켜보았는데, 저 상태라면 굳이 간병인이 붙어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나는 나의 역할이 필요 없는 환자를 병간호하지 않아요”
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남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것도 고마웠고 쉬운 환자를 맡아 편하게 돈 벌려는 마음도 없는 것 같아 신뢰가 가고 좋았다.
그 후 아녜스와 친해져서 같이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었다. 커피 마실 가장 한적한 장소는 아녜스가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병원 귀퉁이의 그 비밀한 장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앞에 병원의 동산이 바라보이는 장소였다. 새벽에 일찍 잠이 깨는 나는 병실을 벗어나 그 동산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병원에 걸을 수 있는 멋진 동산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동산을 산책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병원 생활이란 것이 그만큼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동산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무성한 나무들을 올려다보는 것이 좋았다. 아네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눈은 계속 동산의 참나무에 머물렀다.
아녜스는 가톨릭 간병인 중에서도 신뢰를 얻어 주로 추기경님들의 병간호를 맡았던 모양이었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을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녜스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과 고매한 품격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고 증언했다. 나는 존경하는 김 추기경님을 마지막까지 돌본 아녜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녜스가 무척 고맙고 귀하게 생각되었다.
한 번은 아녜스가 직원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 밥을 사주었다. 병실 아래층에 가면 직원들과 간병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이 있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병인 후보에게서 밥을 얻어먹었다.
나는 아녜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내가 병실을 비우는 하루 동안은 남편 혼자 병실에 두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병실을 나와 수서역에서 기차를 타고 학교로 갔다. 학과 교수들이 나의 형편을 고려하여 수업을 하루로 몰아주었다. 밤늦게 서울에 도착하면 수서역에 정 카타리나가 나와 있었다. 카타리나는 내가 배고플까 봐서 따끈한 군고구마를 품에 안고 나를 기다리곤 했다.
수서역에서 병원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택시를 타면 된다고 아무리 그녀를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카타리나의 정성으로 군고구마를 먹으며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 곁으로 갈 수 있었다. 이제 기온이 내려가는 계절이 오니 카타리나의 따뜻한 고구마가 그리워진다.
남편이 발병했을 때, 나의 정년퇴직이 2년 남아있을 때였다. 나는 한 학기만 하고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하였다. 나의 사정 때문에 학생들과 학교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남편은 이런 나의 결심에 반대했다. 내 앞길에 찬물 한 그릇을 놓으면 놓았지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남편이었다. 그런데 자기 때문에 아내가 정년을 이 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는 것에 대하여 심한 자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학기를 보내자 코로나가 몰려와 대면 강의가 전면 취소되고 방송 강의로 대체가 되었다. 강의내용을 녹화하고 편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남편을 돌보면서 강의를 계속할 수가 있어 퇴직을 일 년 더 미루었다.
그리고 일 년 후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동안 39년을 근무한 교단을 떠나려니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회한이 많이 남았다.
나는 대학에 있을 때 한국전통음식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다. 80년대 들어 나라의 국력이 커지고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당시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던 때였다. 부산대학교 김치연구소와 함께 김치 연구를 꽤 오래 하였다. 특히 명품김치 개발을 위하여 김치 명가를 찾아다니며 인터뷰하고 논문을 쓴 일들이 기억에 남는다. 실제 명품 김치의 개발에 성공하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젊음을 바쳐 몰두하던 아름다운 시기가 있었고, 그때 함께 애쓰던 이경희 요리학원 원장과 최수분 여사와의 우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수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훌륭한 동료 교수들을 많이 만난 것도 나의 복이었다. 우리 학과에 훌륭한 교수들이 많이 계셨다. 그중에서도 나와 늘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송영선 교수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로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1992년은 우리 학과의 이정표가 될 만한 중요한 해였다. 한국식품개발원장으로 계셨던 권태완 박사님께서 우리 대학으로 오시면서 식품과학연구소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었다. 권 박사님과의 조우로 나의 연구 방향도 인생관도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나는 권 박사님같이 원대한 뜻을 품고, 완고하리만치 그 뜻을 좇아 직진하는 분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권 박사님을 통해 학문이 무엇인지, 그것이 사회변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일명 ‘콩박사’로 알려진 권태완 박사님은 우리나라에 ‘콩박물관’을 짓는 일에 일생의 뜻을 두셨다. 박사님이 희사한 거금의 사재를 바탕으로 ‘한국콩연구회’ 소속 임원들을 중심으로 박물관추진위원단이 구성되었고 이 위원들은 온 열성을 다해 마침내 2015년 영주시에 <한국콩박물관>을 완공하게 되었다.
정식품 정재원 회장님께서도 콩박물관 건립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말년에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시던 권 박사님께서 2017년 4월에 87세로 돌아가셨고 정재원 회장께서도 2017년 10월 향년 100세로 돌아가셨으니 2017년은 한국의 콩연구를 주도하시던 두 거두가 다 돌아가신 해였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병실에서 <한국콩연구회 35년 사> 집필을 마쳤다. 그때 집필 위원들이 병원을 찾아와 편집회의를 하였으니 참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그 결과 2019년에 <한국콩연구회 35년 사>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
연구 외에 기억에 남는 일은 우리 대학에 여교수회를 창설한 일이었다. 우리 대학은 설립자의 높은 이상과 적극적인 투자로 학교 외형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나 비민주적인 학교 운영이 늘 교수들을 힘들게 하였다. 교수평의회 소속 교수들이 이에 저항하면서 평의회 의장이 여러 번 삭발 단식 투쟁을 하였다. 그러니 여교수들의 위치는 더욱 열악하였다. 한마디로 대학 생활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여교수들도 있다는 의미로 대학 내에 여교수회를 창설하였다.
여교수들이 함께 만나 고충을 토로하고 서로를 알면서 학교생활이 훨씬 행복해졌다. 그러나 그 뒤 선거에 의한 총장 선출이라는 진일보한 제도가 도입되자 교수사회에 큰 갈등이 닥쳤다. 학교 내의 각 단체는 선거 바람에 휘말리게 되었고 여교수회도 그 바람을 비껴갈 수 없었다.
여교수회 회장을 맡고 있던 나도 생전에 겪지 못하던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가장 큰 갈등은 교수평의회와의 갈등이었다. 교수평의회는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삭발 투쟁하며 재단에 맞섰지만, 어느새 권력이 되어 최대 파벌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욱하여 교수평의회의 비민주적인 작태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전 교직원에게 보내고 말았다. 이 일로 조용히 살던 내가 교수평의회의 집요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 최초의 교직원 선거로 선출된 김 모 총장이 논문부정행위로 연일 교수평의회의 맹비난을 받다가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모든 과정이 충격이었다. 여교수회는 교수평의회 소속 여교수들이 떠나면서 반쪽이 되고 말았다. 이념대립이 빚은 참 슬픈 대학사회의 현실이었다.
그러는 동안 퇴임식의 그날이 다가왔다. 나는 39년의 교직 생활을 마감하는 퇴임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늘 생각하였다. 그동안 교수들이 교단을 떠나면서 남긴 퇴임사를 되새겨보았다.
11월이 되자 퇴임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거기에 내 이름이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교무처에 문의하니 나는 정년퇴직자가 아니고 불명예퇴직자이므로 퇴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는 어이없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39년을 근무했기 때문에 나보다 더 오래 근무한 교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첫 번째 퇴임사를 하는 교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퇴임사를 준비하였다. 거기다 교육부에서 장기 근속자에게 주는 상훈도 불명예퇴직자에게는 수여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왔다. 기분이 몹시 상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퇴직이 불명예퇴직은 아니었다. 나는 학교와 학생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퇴임 1년을 남겨놓고 퇴직신청을 했으니 학교는 나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터였다. 나의 항의로 퇴직자 맨 뒤편에 내 이름이 올라가기는 하였다.
퇴임식 날짜가 정해지자 남편이 굳이 아내의 퇴임식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당시 남편은 멀리 여행할 형편이 아니었다. 암 치료로 몸은 쇠약해 있었고 식사도 뱃줄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태도가 워낙 강경하였으므로 부산 바닷가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였다.
나는 갈등에 휩싸였다. 화가 나기도 했다. 남편은 조기 퇴직하는 아내를 보며 자기 처지를 슬퍼하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불명예퇴직자가 된 아내를 보면 얼마나 더 슬퍼할까 싶으니 남편에게 우리 대학의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퇴임 의사를 철회하였다. 교무처에서 모든 수속을 다시 밟느라고 고생했지만 내가 퇴직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을 때 남편이 보이는 안도감에 그 모든 비난을 참기로 하였다.
그리고 일 년 뒤 나는 40년의 대장정을 마치고 마침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명예로운 퇴직이었다. 코로나가 심해져 공식적인 퇴임 행사가 취소되었으므로 내가 고심하던 퇴임사는 읊을 기회도 없었다.
그 대신 몇 명 친구 여교수들이 나를 위한 조촐한 퇴임 파티를 열어주었다. 미술전공의 박 교수의 아틀리에에 정성을 다해 꾸민 아름다운 파티가 열렸다.
나는 동료 교수들이 베풀어주는 아름다운 이별 파티에 울컥하며 감동하였다. 그동안 생각하고 생각한 퇴임사를 그 자리에서 차분하게 이야기하였다. 여교수들은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 나는 사도바울이 티토에게 권면한 말을 인용하였다.
나이 많은 남자들은 절제할 줄 알며 기품이 있을 것이며 나이 많은 여자들도 몸가짐에 기품이 있어야 젊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다
고 하는 말씀이었다.
대학사회에도 몰아친 부도덕과 권력을 탐함과 이기주의의 팽배가 걱정이기도 했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기도 하고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대학교수야말로 기품 있는 말과 행동으로 학생들의 모범이 되어주어야 하고 사회의 등불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정부로부터 40년 근속 교원에게 주는 황조훈장을 받았을 때는 온 가족이 기뻐하여 나도 정년 퇴임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퇴임 과정을 번복한 것이 영 부끄러울 뿐이다.
나의 교수 생활 중 만난 최대 위기는 학교 내에 벤처기업을 설립하고 큰 빚을 떠안게 되었을 때였다. 좌절 중에 독서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고 그리하여 2015년, 20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인 <나의 사가독서>를 출간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나의 사가독서>는 나의 고통 속에 피어난 정신의 결정체 같은 것이었다. 그 후 오뚜기재단의 지원으로 2018년 <사피엔스의 식탁>을 쓰게 되었으니 난관이 꼭 해로운 것만은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