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시골집을 짓다

by 보현


방콕에서 귀국한 이래 시골집 짓기는 남편의 숙원사업이었다. 남편이 방콕에 있을 때 첫째 시숙과 둘째 시숙이 다 돌아가셨다. 이제 시골 시숙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과제였다.


시골에 가서 보니 시골집의 신축이 급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목조건물은 빨리 내려앉는다고 했다. 시숙이 살고 있었으므로 사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방 한 칸만 쓰며 혼자 겨우 버티고 있었다.

제일 큰 문제가 난방이었다. 아직도 장작을 때어 방을 데웠으나 장작을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졌고, 집이 오래되어 구들이 자주 내려앉았다. 남편은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장작을 구했고, 시숙 사위인 이서방이 한 번씩 와서 땜질 처방으로 구들을 고쳐주고 가곤 했지만, 근본적인 처치는 못 되었다.

시골집에서 자고 갈 형편이 못되었으므로 우리가 시골에 갈 때면 지리산 중산리 아래에 있는 펜션을 빌려 묵곤 하였다. 그 세월이 10년이 넘자 그 펜션 주인과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시골에 갈 때마다 객지 잠을 자는 생활이 지겨웠다.

숙원사업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은 백방으로 애를 썼다. 그 와중에 시숙이 비극적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시골에 집을 새로 지으려던 노력은 허망해지고 말았다.


시골집 신축은 시숙을 위해서라고 내세웠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였다. 나는 어릴 때 부산의 변두리에서 자랐다. 내가 자랄 때 그곳은 시골이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농사를 지으셨다. 지금은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번화한 아파트촌으로 변화하고 말았고 나는 고향을 잃었다.

그런데 결혼하여 산청을 드나들면서 남편의 고향마을이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시골에 가면 고향을 찾아간 듯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방콕에서 돌아온 후 시골에 갔을 때 시골집은 낡았을 뿐만 아니라 마당에도 풀이 가득 자라 있었다. 배수가 좋지 않아 여름이면 뒷마당에 물이 고였다.

나는 시골집에 갈 때마다 수북이 자라 있는 풀을 뽑고 꽃모종을 심고 가꾸었다. 꽃을 심기 위해 땅을 고르면 마치 벽돌처럼 네모나게 생긴 돌이 자꾸 나왔다. 돌 때문에 밭을 일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열성으로 땅을 고르고 나무며 꽃을 심자 질녀 가족들이 나를 많이 도왔다. 특히 이서방은 사람이 충직하고 재주가 많아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열심히 풀을 메고 꽃을 심자 시숙의 태도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생의 의미를 다 잃은 듯 풀더미 속에서 자포자기의 삶을 사는듯하더니 꽃에 물도 주고 풀도 뽑으며 건설적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시골집의 모습이 일변하였다. 나는 시숙의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꽃의 치유효과를 믿게 되었다. 나 자신도 꽃을 보는 것이 좋았고, 풀을 멜 때면 무념무상이 되어 잡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는 것이 좋았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고 있으면 서울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특히 여름밤, 개구리 합창이 터져 나오는 날이면 그곳에 머무르며 밤새 그 합창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곳에 깨끗한 집을 하나 짓고 시숙을 돌보면서 꽃도 심고 나무도 가꾸며 살고 싶다는 소망이 점차 자랐다. 남편은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시골 삶에 대한 향수가 없었다. 어릴 때 소먹이고 농사일을 돕던 고생스러운 일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의 시골에 대한 향수를 현실을 모르는 도시 여자의 사치로 치부하였다. 그렇지만 아내가 10년을 한결같이 시골집에 대한 애정을 보이자 남편도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나의 퇴직이 가까워져 오자 남편은 본격적으로 집 지을 작정을 하고 설계사로부터 설계도면을 받았고 건축업자를 만나 집 짓는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남편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몸을 추스르는데 3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그동안 시골집은 불탔고 시숙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참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오래 준비하였고 이왕 마음먹었으니 새집을 짓고 싶었다. 어차피 그곳에 부모님 산소가 있으므로 한 번씩 가야 할 곳이었다.

내가 집 지을 마음을 굳히자 시누들과 동서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진주 누님께서는 시골집 터가 좋지 않으니 그곳에 집을 짓지 말라고 강경하게 말씀하셨다. 시골 사람들도 사람이 죽은 곳에 집을 지으면 안 된다고 쑤군거렸다. 큰 동서는 꿈에 시할머니가 나타나 불이 활활 타는 시골집을 보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나의 열망을 아는지라 나와 누이들, 형수들 사이에서 난감에 빠졌다. 시누들, 동서들이 한꺼번에 나의 계획에 반대하자 혼자서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시골에 집을 지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서운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였다. 서운한 것은 나의 의지가 꺾였기 때문이었고 분한 것은 나만 소외시키고 시누, 동서들이 자기들끼리 나를 뜯어말려야겠다고 결의한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소외된 자의 분노가 내 마음을 괴롭혔다. 온갖 억울한 심사가 터졌다. 그냥 아무 의욕이 없어졌다. 갑자기 서울의 좁은 아파트가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다. 퇴직하고 김해 집을 정리하면서 김해에 있던 짐을 다 흩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필수적인 책이며 옷가지, 살림살이들이 서울로 보내져 오자 좁은 아파트가 터질 것 같아졌다.

새벽에 홀로 일어나 앉아 있으려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서울의 집을 전세 주고 교외의 한적한 곳으로 이사 가자고 해봐도 남편은 아픈 몸을 움직여 이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병원이 가까워야 한다는 핑계를 대었다.

양평의 전원주택을 혼자 보러 다녔다. 일 가구 이주택자에 대한 세금이 중과되던 시기여서 양평의 전원주택들은 싼값에 매물이 많았다. 세 곳을 골라 남편에게 이 가운데 하나를 사달라고 졸랐다. 남편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세금은 어떡할 거냐고 고요히 물었다. 나에게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장전동 78번지의 DNA가 새로 들끓기 시작했음을 스스로 느꼈다.


그 후로는 시골집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마음속에서 제외해 버렸다. 동서들과 시누들과도 연락을 끊어버렸다. 가끔 그들이 조심스럽게 내게 전화를 걸어와도 냉랭하게 전화를 받았다. 분노와 좌절감이 내 맘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남편은 그런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일로 그 동네를 지나다가 시골집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세상에! 일 년 사이에 풀이 그렇게 자랄 수 있다니 놀라웠다. 불탄 자리에는 망초가 내 키 보다 더 높이 자라 있었고 내 생애 처음 보는 엄청난 크기의 민들레가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치고 있었다. 시숙을 위해 심었던 백일홍은 자취도 없었고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작약, 모란, 백합, 알리움, 부용, 꽃양귀비의 자취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너무 마음이 황량하고 슬펐다.

시골집을 다시 보자 내 마음속에 포기했던 꿈이 다시 왕성히 일어났다. 어느 날 내가 남편에게

“여보, 당신은 내가 먼저 죽고 나면 후회할 거야. 아내가 그렇게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지 못했다고 말이야”

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남편이 그 다음날 건축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 중단했던 집 짓기를 다시 해보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시골집 짓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누님과 시누들을 모아 그 집이 재수 없는 집이 아님을 차분하게 설득하였다. 시골에서 아들 세 명이 다 공부를 잘하여 대처로 나가 대학을 나왔고 좋은 직장을 얻어 잘 살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큰 시숙은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신문사의 기자 생활을 했고 둘째 시숙도 나름 멋을 내며 살았으며 남편만 해도 우리나라 유수의 기업에서 CEO까지 지냈으니 뭐가 재수 없는 집이냐고 물었다. 두 형제가 암으로 일찍 돌아가신 것은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지는 몰라도 생활습관이 나빴다고 말했다. 내가 하도 열성으로 설득에 나서자 이번에는 시누들과 동서들이 내게 한 수 접어 주었다. 그동안 나와의 갈등이 마음씨 착한 그들에게도 괴로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기초공사를 할 때 성모 상본을 땅에 묻었다. 혹시 나쁜 기운이 있다고 해도 성모님께서 다 제거해 주기를 빌었다.


집터를 고르려고 땅을 파자 납작납작한 돌들이 엄청나게 나왔다. 마치 빨래판이 깨진 것같이 생긴 돌들이었다. 나는 이 지역이 주상절리가 있었던 곳인데 풍화하여 흙과 작은 돌이 된 게 아닌가 하고 나름의 지리학적 고찰을 해보았다.

건축업자는 마당에서 나온 돌로 돌담을 쌓았다. 돌담을 쌓은 사람은 돌담 쌓기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얼마나 예쁘게 돌담을 쌓던지 나는 그 돌담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집을 짓는 도중에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많이 터졌다. 무엇보다 코로나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고 인건비 자재비가 폭등했다. 거기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터져 에너지값이 오르자 모든 자잿값들이 다시 오르기 시작하였다.

시골의 건축업자는 이 폭풍을 견디기 어려웠던지 쉬엄쉬엄 집을 지어 올봄에 시작한 집 짓기가 10월이나 되어서야 겨우 집 꼴을 갖추게 되었다. 그동안 자주 시골집 현장을 다니면서 업자를 어르고 달려며 완공을 독려했건만 아직도 뒷마무리가 남았다.

그러나 주황색 벽돌집에 스페인 기와를 얹으니 자그마한 집이 그럴듯하게 예쁘게 보였다. 일전에는 남편과 내려가서 그 집에 가구도 넣고 청소도 하였다. 이번 달 말에는 시누들, 동서들과 함께 입주식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시숙께 새집을 지어드리지는 못했지만 이 집에서 남편이 열심히 산소를 돌보고 꽃과 나무를 심으며 땀 흘려 완전한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우리 동네 근처에 산청의 유명한 관광지인 예담촌이 있다. 그곳에 부부회화나무가 유명하다. 300년 된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한그루는 쓰러지듯 비스듬하게 누워있고 한그루는 쓰러지는 나무를 받치듯 그 뒤에 서 있다. 사람들은 그 나무에 부부회화나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그 회화나무를 보며 부부란 한편이 넘어지면 다른 한편이 받쳐주며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부부회화나무처럼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남은 인생을 함께 살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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