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드림이다. 늦은 나이에 간절한 기도를 통해 나를 얻으신 우리 아버지 감격이 그대로 녹아있는 이름인데, 힘들게 기적처럼 얻은 나를 다시 하나님께 올려 드리겠다는 뜻이란다. 정작 제물로서 주체인 나에게는 일언 상의도 없이 정한 것으로 매번 아버지는 이런 식이다. 그렇다. 나는 일명 P.K. (Pastor Kids)로 우리 아버지는 직업으로 풀타임 목사다.
나는 아버지 직업이 목사라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그것은 꼬리표가 되어서 은근히 나를 누르고 감시하며 비교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는 훌륭한 인격을 가졌다는 신神을 처음부터 미워하게 되었고 학창 시절에는 목사 아들로서 이래야 한다는 철가면이 억지로 씌워졌다. 나는 그 가면에서 나오고 싶어 종종 반대로 갔는데 간이 요만한 체질이라 대형 사고는 아니고 친구들하고 숨어서 담배 정도 피우는 일탈 정도였다.
우리 교회는 천안에 있는 지방 교회로 서울에 있는 대형 교회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그래도 신도 수가 오백 명은 족히 넘는 곳으로 선거철이면 정치인들도 아버지를 종종 찾곤 했다. 아버지는 사치하거나 JMS처럼 욕망에 솔직한 분은 아니어서 나름 주변에서 평판도 좋은 유지였다.
2015, 멜번 근사한 진상품으로 하늘에 드려지기 위해 아버지는 나를 교수로 키우기로 내가 두 살 때 또 상의도 없이 정하신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내 사교육에 아낌없이 투자를 했으나 정작 공부에 관심이라곤 없는 어린양에게는 밑 빠진 독에 돈 붓기였다.
내가 아버지였다면, 아니 우리 아버지가 심리학을 조금만 공부했다면 이런 내 성향을 이용해서 혹독하게 운동을 시킴으로 오히려 공부 욕망을 자극시켰을 것이다. 결국 내 유년기는 돈, 시간 낭비만 하면 보낸 기억밖에 없다.
교수는커녕 대학 입시에도 떨어지고는 재수를 한다며 친구들이랑 돌아다니며 술이나 마시고 방 바닥에 자빠져 있던 내 몰골을 보신 아버지는 어느 날 심하게 현타를 느끼시고 나를 해병대에 징벌 입대 시킨다. 겨우 제대했지만 이번에는 호주로 팔려간다. 강제 도피 유학 길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 지인이 시드니에 소재한 신학 대학에 학장님으로 계셨는데 이것저것 알아본 결과 공부가 어렵지 않으면서 외국 대학에서 영어로 발행한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이 아버지 욕망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여하튼 나는 평생을 그렇게 아버지 탁구공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까이다 이곳 호주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비극도 희극도 아닌 그냥 인간 장난감 인생으로서 누구나 알만한 스토리이다. 그럼 지금부터 진짜 내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가면 속 내 진짜 얼굴 말이다.
영어 학교를 마치고 아버지 친구가 계시는 신학 대학에 무리 없이 입학을 했다. 말이 대학이지 캠퍼스도 없고 사무실 몇 개 있는 학원 비슷한 곳이었다. 그래도 학교라고 호주 학생 몇 명에 총장님 학장님 교수님 행정직원 사서 등 갖출 것은 다 갖춘 정부 승인된 교육 기관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신학으로 학사-석사-박사까지 일사천리로 마친다. 거기에 학업 성적도 좋았다. 갑자기 무슨 일로 각성했냐고? 그럴 리가... 영어로 공부해야 했지만 여타 메이저 호주 대학들처럼 학업 난이도가 높은 곳이 아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일어났다. 신학에 관심이 전혀 없던 나였지만 학과 일정이 헐렁헐렁하자 남는 시간에 잠깐씩 도서관에서 심리학 등 다양한 책을 우연히 접하면서 책 읽는 것에 재미가 생겨 버렸다. 아마 학사 일정이 빡셌으면 또 반골 기질이 작동해서 때려치웠을 텐데, 반대로 노는 분위기인 학교 상황을 마주하자 이번에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리액션이 나온 것이다. 난 이렇게 늘 반대로 산다.
여하튼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자 나는 내친김에 조금 더 규모가 있는 호주 신학 대학에 다시 Ph.d과정에 들어갔다. 다행히 새로운 학교에서 내 지난 학위를 인정해주는 덕에 추가로 신분 세탁할 필요 없이 시작했고 지금껏 공부했던 수준보다는 확실히 높았지만 이번에는 자진해서 하는 상황이라 무리 없이 과정을 마쳤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남들에게 인정받을 기특한 일을 해낸 것이다. 진정한 황금 트로피였다.
호주에 날 보낼 때까지만 해도 우리 아버지 눈빛에는 날 향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점차 이런 소식이 고국에 전해지자 우리 가족은 물론 우리 小石교회 (지금은 '작은 돌 교회'로 개명)까지도 잔치가 연일 일어났다. 담임 목사님 아픈 손가락인 꼴통 아들이 철이 들어서 훌륭한 신학자가 된, 나도 모르는 내 영웅 설화가 인기리에 매주 주일 예배 시간에 아버지를 통해 연재되고 있었다.
이 당시는 영주권도 쉽게 나올 때라서 첫 박사 학위를 받는 시점에서 나는 이미 국적을 바꿨다. 군필자였기에 별다를 변화는 없었지만 내 의지로 호주에 산다는 것은 아버지 의지로 한국에 살 때 보다 큰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졸업이랑 동시에 취업은 자연스럽게 우리 모교에서, 아버지 찬스랑 졸업생 특채로, 해결했다.
우리 학교는 주로 우리 학교 출신 목사님들이 교편을 잡으셨는데 나는 다른 호주 학교에서 추가로 박사 학위가 있어서 누가 보아도 오버 스펙으로 시비걸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것 말고도 특이한 지점이 있어서 나름 위치가 확고했다. 또 다른 경쟁력이란 바로 나는 목사가 아니었다.
주변에서는 안수를 주시겠다는 선배님이나 은사님이 계셨지만 굳이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막았고 또한 아버지 직업으로 목사라는 것을 평생 불편하게 보았던 나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나처럼 목사가 아니면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뭔가 섹시해 보였던 것도 같다. 내가 채용되던 그때 신학교마다 목사가 아닌 학자를 모시는 유행도 살짝 일조했다.
꼭 그런 것이 아니라도, 김포 공항에서 호주로 출국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아버지 찬스로 그 학교에 교수가 되기로 어느 정도 정해진 터라 이것은 모두 예견된 일이었다. 그리고 작던 우리 학교는 청소 사업으로 돈 좀 번 이민자 할배 하나가 감투를 노리고 이사장으로 오면서 크게 확장하게 된다. 작은 캠퍼스도 딸린 정식 대학이 된 것이다.
물론 그 할배 돈으로 다 된 것은 아니고 그가 투자한 것이 마중물이 되어서 호주 교육부 예산을 왕창 받을 조건을 충족시킨 것이다. 한 번 돈이 돌기 시작하니 우리 학교 사업은 갑자기 일어났고 학생들도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막혔지만 이때만 해도 우리 학교에서 학위를 받으면 바로 영주권이 나올 시절이라서 제사보다 젯밥 때문에 들어온 학생도 많았다. 서로 이해관계가 잘 맞은 것이다.
신학이라는 특성상 아무래도 여학생들이 많았다. 대충 학생 구성을 보면 남자들은 장로님이나 안수 집사님으로 재직하는 교회에서 담임 목사랑 대판 싸우고 홧김에 나도 목사 하겠다고 오신 분들이고, 여성들은 늘그막에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고 소일거리로 신학을 배우러 오신 할머니들이 많았다. 여기에 방금 이야기한 비자 해결 목적으로 온 학생들이 대다수 였고 소수만이 진심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우리 학교를 찾았다.
나는 삼위일체론을 담당했는데 내가 호주 대학에서 두 번째 박사학위를 그것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칼 융 [분석 심리학]에 관심이 있어 연구를 하던 차에 날 지도하시던 존 프랭클 주니어 박사님이 융 분석 심리학자여서 무난하게 논문 통과를 받았다.
내용은 별거 없다. 누구나 아는 프로이트 성격 구조론 [이드-자아-초자아] 썰을 좀 풀다가 슬쩍 비판을 하면서 융 분석 심리학을 대안으로 제시해 [개인 무의식-자아-페르소나]를 설명하고 여기에 삼위일체를 가져다 넣는 식으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것인데 하여간 그때는 진지하게 써 논문 심사까지 통과했다.
교수 생활은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교수 업무란 것이 연구, 행정 그리고 강의로 되어 있는데 나는 특히 강의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렇게 남들 앞에서 입 털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뜨거운 신앙심이랑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온 사람이라도 막상 제도권에서 공부를 시작하면 집에서 혼자 성경을 읽는 것이랑은 완전 다른 실망을 받는다. 정말 좋아하는 취미는 그래서 일로 하는 것이 아니다.
2015, 멜번 헌데 내 강의는 달랐다. 원래 사람들 앞에서 웃기는 재주가 조금 있고 나서길 좋아하는 나에게 교수라는 완장을 채워주고 멍석을 깔아주니 나는 신들린 무당 그 자체였다. 더구나 근엄함이나 꼰대들 위엄을 극혐 하는 성격까지 더해 강의 중에 비속어 시쳇말은 기본이고 분위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이 새끼, 저 새끼'도 상황 봐서 떠드니 가뜩이나 실망에 가득 차고 졸린 강의 시간에 다들 배꼽을 잡고 웃느라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은 정신을 못 차렸고 이렇게 신학대학이라는 제약 안에서 살짝 오바를 해도 다 용서를 받는 슈퍼스타 강사였다.
학장님도 학생들도 모두 날 사랑했고 나는 정말로 학교에서 명물이었다.
그렇게 강의 시간에 펄펄 나는 내 모습은 고스란히 동영상 강의 모음이라는 학교 정책 아래 모두 녹화가 되어서 나 역시도 내 강의를 매번 살펴보았다. 영상 속에 자기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곤혹이라는 교수님들도 계셨지만 자기애 성격장애도 조금 있던 나는 달랐다.
내 강의를 나만큼 재미있게 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시험을 앞둔 학생들보다도 더 내 강의를 집중해서 보았다. 단순히 미친놈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그 영상을 보면서 나는 계속 칼을 갈았다. 어떤 개그에서 사람들이 터지는지, 어떤 목소리가 섹시하게 나오는지, 어떤 앵글에서 내 얼굴이 가장 화면을 잘 받는지 등등 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마케팅하고 브랜딩 하면서 점점 최고가 되어갔다. 작은 학교였지만 내 강의를 듣는 사람은 모두 내 팬이 되었고 TV에 출연하면 대박일 거라고 칭찬들이 마르지 않았다.
인기 좋은 미혼 교수이다보니 나를 남자로 보는 여학생도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는 곳이 여초가 심한 장소라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이렇다보니 내 수업 시간에는 늘 극성팬 여학생들이 맨 앞자리에 깔렸다. 누가 보아도 하트가 뿅뿅 나오는 눈으로, 수업을 듣는다기 보단 아이돌 콘서트를 관람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내가 떠드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왜냐면 가끔 지루한 소리를 해도 웃음이 가득했고, 심지어 남들은 깔깔대는 농담을 해도 차분한 레이져가 계속 흘러 나왔다. 즉 내가 뭔 소리를 해도 의미나 논리를 쫓지 않고 그저 내 입이라는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무의식에 그대로 흡수하는 듯했다.
그들에게 내가 설파하는 수업은 아름다운 詩이며 내 모습은 완벽한 다비드 조각이었고 교수라는 직위는 엄청난 아우라를 만들어 주었다. 상황이 이쯤되자 도를 넘는 극성팬도 생겼다. 우리 집 앞에까지 날 따라오는 여학생들 말이다.
수업 시간에는 늘 맨 앞에 앉아 짧은 치마로 속이 훤히 보이는 각도를 조준해서 내 시선을 끌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우리 집에 와야 할 이유를 만들어 냈고 나중에는 현관문 비번도 알게 되어서 퇴근하고 나면 내 침대에 이미 알몸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2015, 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