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에게 시달리는 것 말고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상담 업무 그 자체였다. 정신분석을 오래 공부하고 학교에서 상담학도 배웠다지만 임상 경험이 일천하니 당연했다. 이런 나를 슈퍼비전해 줄 수 있는 심리학 교수님이라도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찾으려는 노력도 없이 혼자 상담 일을 했다. 이정도 공부했으면 혼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비슷한 교만이 마음 한편에 똬리 틀었고 이것도 분석해 보면 어떤 숨겨진 이유가 있으리라.
일 빼고 섬 생활은 좋았다. 워낙 작은 섬이라 불편한 것이 널렸지만 그러려니 포기하고 나니 즐길 것이 더 많았다. 특히 화려한 사모 취향 덕분에 안 그래도 화려한 카지노는 매 주말이면 사모가 주관하는 파티로 밤을 밝혔다.
카지노는 이 섬에서 가장 큰 사업장으로 해안가 난민 수용소나 해군 기지보다도 컸다. 해군 장교 그리고 본토에서 파견 나온 의사, 간호사, 이민성 직원 등은 정부 돈으로 카지노 호텔에 365일 상주했는데 카지노 호텔 객실 250개 중에 200개는 이런 식으로 1년 내내 호주 정부가 사주었으니 실제로는 50개만 팔면 되는 것이고 그나마도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 섬 신기한 동식물을 찾는 이들로 이 호텔은 물론 주변 싸구려 숙소 등도 1년 내내 풀붘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누군가 크리스마스 섬으로 오고 싶다 해도 숙소를 잡는 일이 힘들고 더구나 근사한 숙소를 원하다면 사모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모는 섬에 상주하는 호주 공무원들을 자주 카지노로 초대해 밤유흥을 즐겼는데 그 결과 이 섬에 모든 권력자는 사모랑 연결되어 있었다. 사모는 한국에서부터도 돈으로 사람을 구워삶는 버릇 있고 여기서도 버리지 못했으니 자연스레 이곳 공무원이나 군인들하고도 청탁을 주고받는 구조를 자진해서 만들고 영향력을 키워갔다.
지금 기억으로 일반실이 하루 300불 기준이었으니 방만 팔아도 1년에 $27m (250억)이고 여기에 카지노에서 나오는 추가 수입은 그보다 몇 배는 커서 호텔 수영장 옆에 코코넛 크랩도 50불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했다. 단순히 매출 규모만 큰 것이 아니고 수익 구조도 좋았다. 이런 럭셔리한 개인 호텔들은 광고비가 많이 나갔지만 피라미드처럼 이미 유명한 이 섬은 대외 광고를 할 필요가 없고 운영도 힐튼같은 전문 기업에 위탁하면 또 그 비용이 엄청났지만 대충 사모가 직원들이랑 엉성하게 꾸려가도 이 섬에 유일한 호텔로 독점이라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나는 이 호텔에서 돈을 받으며 일을 하니 헌터 회계사가 처음 나를 꼬시려고 했던 달콤한 말들은 대부분 맞는 소리였다. 외로운 것만 스스로 잘 위로하면서 다스리면 가히 천국이라고 할 정도인데 은근히 날 흠모하는 여자들이 주변에 있는 상황에서 하는 자위는 비참한 느낌이 없으니 골방에서 몰래 쥐어짜는 거랑 전혀 달랐다.
헌터랑 나는 별일이 없으면 매일 호텔 로비에서 10시쯤 만나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주로 쓸데없는 여자 이야기나 사모 뒷담화였고 카지노 호텔 직원들에 관한 개인 신상 털기 따위였다.
"헌터야, 니가 보기에 객실 청소하는 성희랑 빨래 담당하는 현철이, 얘들은 괜찮지?"
"응, 걔들은 사모 라인을 타고 들어온 직원이 아니라 정상이야. 착해."
"라율이 그 새끼가 아주 이상하지?"
"대근이? 그 새끼야 뭐. 원래 A급은 B급을 고용하고 D급은 막장을 고용한다니.."
"라율이 본명이 대근이야?"
"몰라 뭐가 본명인지도. 서류상에는 Daekun으로 되어 있는데 인생 자체가 사기인 놈이라.."
"걔 사모랑 잤지?"
"본건 아닌데 안 잤겠냐?"
"아.. 그 새끼 진짜 알 수록 별로란 말이야.."
회계사인 헌터가 직원 급여나 행정 처리를 하기에 내가 상담을 통하거나 휴민트로 얻는 정보 이외에도 많은 것을 주었다. 대근이는 시간이 갈수록 사모를 닮아가는지 점점 애가 건방지고 사람을 기분 나쁘게 했다. 지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를 향해서도 이 정도인데 현철이나 성희 같은 어린 직원들에게 어떻게 할까 상상을 하면 끔찍했다.
아무래도 나랑 헌터가 절친이고 이 조직에서 나름 원투 펀치이니 대근이는 대근이대로 우리가 눈 아래 가시로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니 나랑 헌터가 함께 있는 상황이라면 슬며시 피하는 것이 보였고 어쩌다 나랑 직원들만 있으면 좋다고 와서 껄렁대고 주접을 떠는 꼬락서니가 한 대 패주고 싶었다. 특히 여직원들이 있는 앞에서는 폼은 있는 대로 잡으면서 웃기지도 않는 농지거리를 자주 지껄였다.
"현철아, 니 빠구리 아니?"
"아.. 에.. 빠..구리요.."
"뭘 놀래 임마! 우리 동네에서는 학교 땡땡이치는 걸 빠구리라고 하는디! 넌 뭘 생각한겨 이 응큼한 놈아!"
뭐 이딴 개저씨스러운 농담을 좋다고 하는데 앞에 있던 성희나 다른 청소팀 여직원들은 못들은 척 딴짓을 하고 나는 개정색을 하면서 녀석을 흘겨보니 지가 원한 반응이 아니라 머쓱해지면 죄없는 현철이만 괴롭히면서 능글맞게 넘어가는 식이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인 나도 정말 극멸極蔑하는 개그 코드다.
대근이 놈 무식한 것도 그런 저열한 성격에 일조했는데 지도 그게 영 아쉬운지 뭔가 어려운 단어를 되도 않는 때에 꺼내 쓰고 싶어 했다. 가령 '임계점'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는데 상황에 맞지도 않게 시도 때도 없이 쓰곤 했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브랙퍼스트인가 브런친가 하는 곳에서 작가라고도 떠드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니가 작가면 나는 노벨 문학상 신청하겠다 이 자식아.
여하튼 대근이가 사모 살딜도 노릇을 하면서 그 치마 폭에서 다시 Sub 세계관을 만들어 건들거리며 호텔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벨이 꼴려 언젠가 뭐 하나 나한테 걸리기만 걸리면 반 죽여놓겠다 이를 갈던 차, 하루는 놈이 잘 쓰는 그 두 단어 '브런치'랑 '임계점'을 검색기에 돌려 보았는데 뜻밖에 놀라운 수확을 했다.
놈이 예전에 쓴 [임계점]이라는 글을 찾았는데 글 같지도 않은 횡설수설은 둘 째치고 악마랑 자신이 무슨 계약을 했기에 자신은 엄청난 운을 받았고 그 계약 조건에는 30시간에 한 번씩 여자랑 섹스를 해야 한다는 판타지 같은 소리를 써갈겨 놓았다. 이 시키 설마,
이걸 진심으로 믿고 따른다는 소리는 아니지?
카지노는 나를 고용함에 회사 직원들 무료 상담 서비스를 임무로 넣었기에 나는 원하는 직원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대부분 한국 직원들이 신청했고 한 두 번 하다가 마는 식인데 성희는 나에 대한 믿음이랑 호감이 강했는지 꾸준히 내 상담실을 두들겼다.
정신분석 과정에서 자유연상을 주로 쓴다고 하지만 꿈을 해석하는 것 역시 주요한데 기법은 간단하다. 우선 꿈 내용을 듣고 내담자가 설명하는 꿈 이야기 중에 주요한 재료랑 부수 재료를 나눈다. 대부분 꿈 뼈대를 이루고 중요해 보이는 큰 이야깃거리는 보이기에만 주요 재료이지 실제 그 안에 숨겨진 뜻을 내포하는 재료는 아니다. 그래서 자기 꿈을 설명하는 본인도 무엇이 내 무의식을 담고 있는 주요 자료인지를 알 수 없고 옆에서 이를 찾게 도와주는 분석가가 필요한 것이다.
써니, 강형철, 2011 꿈은 무의식을 반영하며 무의식은 언어 구조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언어 구조란 뭘까? 우리 언어를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은유랑 환유 기법이 특히 무의식 구조를 설명하는데 필요하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라는 문장은 비문일 수 있지만 대부분 뭔 말을 하고 싶어서 이걸 꺼내는지 아시리라.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모성애가 생기면서 세상 누구보다 강하게 된다"는 뜻으로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생략 은유 환유 기법이 들어 있고 우리 뇌는 이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원래 표현하려는 뜻보다 더 명확하고 오래 기억하게 된다.
최근에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 살인범이 평소 동네 치킨집을 운영하던 평범한 총각이었다는 뉴스에 치킨 배달 주문이 감소하고 엄마들은 아이들이랑 치킨 먹는 것을 꺼리다 못해 그 프랜차이즈 불매 운동까지 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찌 보면 미련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치킨'이라는 기표가 강력한 이미지를 가진 '연쇄 살인'이라는 기표랑 생각지도 못한 관계가 생기면서 그 둘이 달라붙어 일어난 소동인데, 연쇄 살인범이 치킨 집을 운영했다는 사실이 우리 뇌에서는 끊임없이 환유처리되어 미끄러지며 만들어낸 결론이다.
치킨 → 연쇄 살인 →- 나도 치킨 먹으면 연쇄 살해 당할 수 있음.
이렇게 실제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만든 언어라는 도구가 이제는 반대로 우리 뇌를 조종하면서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인간은 이로써 결국 언어에 지배당한다. 프로이트 정신 분석은 이 부분을 간파했고 특히 언어학을 사용하는 라캉식 정신 분석이 많이 실천되고 있다.
대근이 같은 놈은 이런 오류나 비약이 더 심한 스타일이라서 그놈이 쓴 글을 보고 있으면 얘가 지금 현실하고 환상을 왔다 갔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정식으로 누군가를 분석을 하지 않고서는 그 진의, 무의식은 절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내가 모은 정황으로는 분명히 붉은 깃발이 올라왔다.
"성희, 최근에 기억나는 꿈이 뭐가 있을까? 평소처럼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요^^"
"네.. 얼마 전에 꾼 꿈인데요. 배경은 호텔 수영장 근처예요. 강한 폭우에 큰 야자나무가 쓰러져서 골프장 카트를 덮쳤어요. 다친 사람은 없는데 저는 놀라서 사람들 하고 나가 보았고요. 호주 경찰이 왔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호주 경찰이 우리말도 잘하고 무엇보다 얼굴이 교수님 얼굴 비슷했어요. 왜 그분이 호주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경찰이 목격자를 찾으며 주변을 살피고 묻고 하는 장면을 저는 유심히 보았고요."
"경찰은 정복을 입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호주 경찰 맞나요? 신기하네. 이 섬에 정복 경찰은 거의 없는데.. 등장 인물은 그렇고. 시간이나 공간은 평소랑 다른 것은 없고요?"
"아, 맞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난 후에 사람들이랑 다시 일하러 호텔로 들어가지 않고 혼자 몰래 놀러 갔어요. 나쁜 짓을 한다는 느낌에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는데 그래도 그냥 그렇게 했어요. 막상 호텔 밖으로 나오니까 기쁨보다는 두려움이랑 불안함이 커져서 왜 일을 빼고 도망쳐 나왔을까 후회를 많이 했고요."
상담은 대략 그렇게 마치고 나는 성희가 남겨준 꿈 내용이랑 그 안에 기표들을 계속 곱씹어 보았다. 어떤 것이 중요한 기표이고 어떤 것이 진정으로 성희가 (성희도 모르는 그 무의식이) 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까?
우선 경찰은 복합 인물로 나랑 호주 경찰을 합쳐놓은 듯한 것으로 주요한 내용으로 보인다. 이 기표에서 드러난 의미랑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자.
경찰 = 법 / 정의 구현 / 범죄자 처단
이런 기표가 미끄러져 나오는데 아마 성희도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성희에게 나는 역시 올바름, 진리, 해답 이런 경찰이랑 비슷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 이 둘은 섞여 혼합인물이 된다. 꿈은 소원을 성취하려는 외침이라는 것도 이 해석에 더한다면:
성희는 지금 경찰을 찾고 있는가?
무슨 불법을 보았나?
경찰 혹은 나에게 잘못을 바로 잡아 줄 대타자 역할을 기대하나?
이 이상은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덮고 퇴근했다. 그리고 답답한 기분이 올라오기에 환기시킬 필요가 있겠다 싶어 호텔 내 사무실을 나와 큰길을 따라 산책을 했다. 걸으면서는 그냥 육지에 오르면 먹고 싶은 것 리스트를 보충하거나 예전에 보았던 야동이나 명장면을 복귀하는 것 따위로 일에서는 빠져나오려고 했다.
지금이 12월 말이라 이곳에 진짜 주인인 홍게들이 산란을 위해 대 이동을 시작한 시기였다. 이 섬 주인이라고 자부하는 호주 높은 나으리들이나 실세라고 허연 다리로 날 반겨 유혹하는 사모도 이 진짜 주인 앞에 서는 겸손해져야 한다! 본능을 따르는 미물이라고 욕하겠지만 당신들보다 훨씬 고귀하고 순수한 존재들이다.
성욕은 무섭다. 우리 욕망 중 식욕이나 수면욕 명예욕 따위는 다 나를 보신하고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욕동이지만 성욕만큼은 다르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이 망할 령靈 때문에 우리는 이런 섬까지 유배 오거나 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기꺼이 들어감으로 죽는 경우도 허다여 이것은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클레오파트라가 기막히게 오럴을 잘했기에 한 번 빨리고 싶은 왕들은 줄을 서고 새치기하다 그만 큰 전쟁이 났다고 하는 역사학자 해석도 있으니 말이다.
홍게 대이동
홍게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로나 하수구 같은 구조물에 희생되어 대부분은 섬 반대편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죽어 노랑 미친 개미 밥이된다. 그 원통하고 한 많은 생을 애석하게도 이처럼 마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호주 정부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돈을 들여 공사를 다시 하고 교통을 통제하는 일을 하지만 그런 얄팍한 노력으로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생태계는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떼를 지어 끌어안고 죽어가는 붉은 게들은 이 섬이 흘리는 피눈물이다.
홍계를 위해 만든 이 엉성한 육교 앞에서 잠시 쉬면서 탈락한 녀석이나 차도로 잘못 방향을 잡은 놈들을 손수 꺼내어 육교 위로 올려 주며 잡생각을 잊는다. 잘못하다가는 녀석들 짚게발에 물릴 수도 있으니 자연스럽게 집중이 되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한 참을 그렇게 녀석들을 돕다가 무리랑 떨어져 하수구 아래로 거꾸로 처박힌 녀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쟤만 구해주고 그만 돌아가자 싶어서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가 놈을 꺼내고는 근처 맑은 물에 좀 씻어서 활기를 불어 주고 육교 높은 곳에 놓아두었다. 녀석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는 내게 고맙다며 게눈 감추듯 윙크를 하나 날리고는 서둘러 본능이 이끄는 그곳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놈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건너는 것까지 보고는 호텔로 발검음을 돌리면서 무리에서 나와서 혼자 땡땡이쳐봐야 별 것 없다 이놈아. 무리를 따라가.. 속으로 중얼거리다 풀지 못한 성희 꿈 실마리가 팍 하고 풀렸다.
땡땡이..
호텔 일을 놔두고 놀러 가려고 했어요...
호텔 일을 땡땡이 치고 싶다! "땡땡이"라는 기표는 얼마 전에 대근이가 지껄이던 그 불편했던 기표로 가서 착하고 붙었다. 바로,
"빠구리"
시드니,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