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모두에게 찾아온다. 갓 태어난 아기나 백 살 먹은 늙은이나 모두 죽을 수 있다. 공평하다. 소름 끼치도록 공평하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젊음과 늙음만 이야기하겠다.
젊은이에게 남은 일은 늙는 것뿐이다. 안타깝지만 사실이 그렇다. 평범한 젊은이는 자기가 어떻게 늙을지를 반드시 생각해 보기 마련이다. 만약에 회사에 들어간다면,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누군가를 자신이라고 상상하곤 한다. 상상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퇴사를 결심할지도 모른다. 실은 대부분 그렇게 퇴사하지 않을까 싶다.
회사란 곳에서 늙은이와 젊은이는 함께 일한다. 직급이 높은 사람이 대개 나이도 더 많다. 상사는 곧 늙은이를 뜻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늙음과 젊음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상사는 늙고, 신입사원은 젊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회사에서 면접을 볼 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상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보다 직급이 높다면 일을 더 잘할 테니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따를 것이다”라고 답했더니 그에 대해 더 묻진 않았다. 나 또한 그에 대해 더 묻고 싶지 않다. 젊거나 늙거나 그것이 뭐가 중요할까. 다만 우리나라는 그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특히 어떤 조직 안에서 그것을 거의 인격처럼 다룬다.
그것이 몹시 유감이다.
늙든 젊든 누구든지 삶이라는 가능성, 살아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 않은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가 말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긴 너무 아깝다.” 버나드 쇼는 묘비명으로 유명한 작가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버나드 쇼는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고, 그 작가가 남긴 말들이 진짜인지도 모른다. 그저 여운이 가시지 않을 따름이다.
젊은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군가는 젊을 때 열심히 일해야 늘그막이 편하다고 말한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실제로 오지랖 넓은 어른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한다. 그에 반해 내가 좋아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다르게 말한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에 얻을 애매한 자유를 위해 좋은 날을 노동으로 보낸다.” 누가 하는 말이 맞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
놀아야 할까, 일해야 할까. 놀면서 일할 순 없을까. 적당하게 할 만큼만 일을 주는 곳은 없다. 아무리 자애로운 상사일지라도 회사 바깥에서는 “놀면서 일해도 된다”라고 말할 순 있어도, 회사 안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젊으니까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여러 회사를 다니며 느낀 바, 회사는 이상주의자보단 현실주의자가 많았다. 다만 몇몇 사람들은 아직까지 이상을 되뇌곤 했으나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은 더 젊을수록 이상적인 듯하고, 늙을수록 현실적인 듯하다.
어느 곳에 들어가 일한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적인 일은 아닌 듯하다. 젊은이들은 그렇게 이상을 잃어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많은 이상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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