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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잡담 Sep 09. 2023

영원으로의 여행

- 칸토어 연속체 가설 -

영원으로의 여행  - 칸토어 연속체 가설 -          


“영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말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내용은 별로 없다. 직관이나 상상으로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전에는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그냥 동어 반복이다. 끝없다(무한)는 것이나 영원이나 같은 말이다.

철수 집이 어디인지 물었는데 영희 집 옆에 있단다. 그럼 영희 집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철수 집 옆에 있단다. 영원이 “끝없는 것”이라는 말은 이와 같은 식이다.

    

그러나 영원이라고 다 같은 영원이 아니다. 수학에서는 “큰 영원”이 있고 “작은 영원”이 있다. 즉 영원에도 크기가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실제 수학에서는 영원(무한)의 크기를 다룬다. 그런 일을 한 인물이 칸토어다.

당시 수학자들에게도 무한은 그냥 무한일 뿐이었다. 무한이 무슨 찐빵도 아니고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을까? 당시 내로라하는 수학자들에게 “귀신씨나락까먹는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아무리 대학교수라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칸토어는 정신병원 입원하기 딱 좋은 환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칸토어는 진짜로 말년에 정신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역사학에서 역사를 빼놓고 학문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수학에서 “집합론”은 역사학의 역사에 해당한다. 집합론은 수학의 기초언어이자 수학을 수학답게 만드는 핵심 이론이다.

그 수학의 기초를 만든 인물이 칸토어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수학을 통해서 “영원(무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속살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연속체 가설은 1900년 파리 국제수학자대회에서 수학에서 해결되지 않은 23가지 문제 중 첫 번째로 꼽히기도 했다. 당시에는 무한이 생소한 개념이었고 난제 중의 난제였다.


무한에 관한 지식, 특히 “연속체 가설”은 정신적인 혼란이 오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수학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느낌은 공상과학 분위기다. 깊게 들어가면 수학인지 판타지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연속체 가설 증명을 시도했던 괴델도 말년에는 신경 쇠약과 편집 증세로 죽었다. 그의 사망원인도 혹시 무한 독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무한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던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칸토어는 “나는 신을 보았다”고 고백하며 말년에 신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괴델은 아예 “신 존재 증명” 논문을 쓰기도 했다.   

  

칸토어는 자연수와 무리수의 원소 개수가 다르다는 것을 “대각선논법”을 통해 증명했다. 무한이라고 다 같은 무한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정말로 무한은 찐빵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었다.  

연속체 가설은 “유리수집합과 무리수집합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집합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1과 2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수는 없다”는 말과 비슷하다.

유리수는 무한집합 중에서 제일 작은 무한집합이다. 그다음으로 큰 무한집합이 실수집합이다. 그 중간에 무한집합은 없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즉 1과 2 사이에 자연수가 없듯이 무합집합도 그럴 것이라는 얘기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무한수도 자연수처럼 연속적으로 나열되는 수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수가 1,2,3,4,5,... 나열되듯, 무한수도 무한1, 무한2, 무한3, 무한4, 무한5.... 수열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수 끝이 무한이듯, 무한수 끝은 무한의 무한이 된다.     


연속체 가설과 관련하여, 칸토어는 “어떤 집합이든 멱집합이 항상 원래의 집합보다 더 크다. -칸토어정리-”는 것을 증명했다. 자연수도 무한이지만, 그것의 멱집합은 자연수보다 더 큰 무한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무리수의 멱집합은 무리수보다 크다. 멱집합이 자연수처럼 나열되면 하나씩 나아갈 때마다 원소 개수는 “지수탑” 형식으로 표시된다. 지수가 “탑”처럼 쌓아진다.    

지수 맨 끝에 무한을 나타내는 기호(∞)가 있다. 칸토어가 “나는 신을 보았다”고 말한 부분이 바로 그곳이다. 칸토어는 그것을 보는 순간 연속체 가설이 “신의 계시”로 나타난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봐도 과연 그곳이 신이 있을 만한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칸토어는 연속체 가설을 증명하려고 오랫동안 씨름했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신경 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연속체 가설은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즉 참이라고 해도 상관없고 거짓이라고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수학적인 논리체계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증명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거시기한 느낌이 든다. “무한”은 아직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 무거웠던 것일까?     


칸토어는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과연 그 말이 옳다는 것을 나는 연속체 가설에서 확인하게 된다.

영원은 영원일 뿐이라는 것은 인류의 변함없는 인식이었다. 인식의 자유가 없었다면 그 불변은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영원은 그냥 영원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영원 뒤에 다른 영원이 있다는 것, 영원의 영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자신의 세상 너머에도 우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과도 같다. 영원 안에 갇혀 있던 인간이 영원 너머의 세계를 발견했다는 사실, 얼마나 떨리고 감격스러웠으면 칸토어가 “나는 신을 보았다”고 말했을까?     


책갈피에 끼워둔 낙엽처럼, 잊고 있었던 지식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무심하게 팽개쳤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볼 때면, 죽었던 지식의 영혼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일상의 루틴 속에서 잊고 있던 감각을 일깨우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다. 문학과 시에서 하나였던 영원은 수학에서 많은 영원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복제된 것이 아니라 지문이 서로 다른 영원들이 모여있는 영원의 마을이다.

유럽의 어느 뒷골목을 쏘다니듯, 한 번쯤 영원의 골목에서 길을 잃는 것도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무한에 대한 상상은 세상 너머에 있는 존재의 끝, 시간의 끝을 향해 떠나는 가슴 설레는 여행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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