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난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이 명제는 너무도 당연해서 증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의사소통이나 언어적으로 이 문장은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수학적으로는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다.
이 명제는 새가 무엇인지 정의가 있어야만 해석이 가능하다. 새를 "날개 달린 조류”라고 정의했을 때, 이것은 다시 “날개”와 “조류”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정의가 또 필요해진다. 날개가 무엇이고, 조류가 무엇이라고 정의했다면, 그 “무엇”이 무엇인지 또 정의가 필요해진다.
한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용어를 설명하고 또 그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게 되는 계속 순환에 빠지게 된다. 증명에 앞서 명제에 대한 해석이 끝말잇기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가지 공리계를 세우고, 이를 기초로 점, 선, 원, 직각에 대한 23가지 정의를 비롯하여, 460여 가지 정리를 증명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5가지 공리가 맞든틀리든 입 닥치고 그냥 믿으라는 것이다. 즉 5가지 공리는 증명할 필요 없이 “무조건 맞다”는 전제하에서 시작된 것이다.
비단 유클리드뿐 아니라 수학 대부분은 많은 공리를 전제로 정의하고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수학의 가장 큰 난제는 이것이다. 공리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논리라기보다 독단에 가까운 것이다. 즉 수학은 “독단”이 논리의 기본전제가 되는, 진실성이 담보되지 않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도 이 문제를 고민한 듯하다. 가장 확실하고 반박할 수 없는 것,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명확한 것, 그것으로부터 출발할 때 철학은 오류가 없는 완벽한 진리로 향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데카르트가 내놓은 것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다. 그렇다면 이 명제가 과연 확실하고 반박할 수 없는 것,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명확한 것일까?
이 명제가 명확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명제 안에 들어있는 용어들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 생각, 존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한 정의 없이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뜬구름 잡는 얘기다.
만일 “나, 생각, 존재”를 정의하게 된다면, 다시 그 정의한 용어에 대한 정의가 또 필요해진다. 이 또한 “새는 난다”의 경우와 같이 용어의 설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한히 이어지는 계속 순환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정의할 필요가 없는 공리는 불가능한 것일까? 즉 “무정의”한 용어로써 정의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만일 “무정의”로부터 명제가 출발한다면, 정의에 대한 정의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계속 순환은 피할 수 있게 된다. 정의가 없는 것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용어를 정의하지 않고 자연수를 정의한 것이 페아노 공리계다. 이것은 그동안 공리를 자명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관행을 탈피해, 수학 역사상 처음으로 순수한 논리체계로 명제(자연수)를 정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페아노 공리는 데카르트가 고민했던 것을 해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가장 확실하고 반박할 수 없는 것,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명확한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데카르트가 원했던 출발점, 페아노 공리계가 바로 그것이다.
페아노 공리계 이후 현대 수학에서는 대상을 정의하지 않는다. 공리적 집합론에서는 집합도 무정의 용어다. 힐베르트 공리계에서는 점, 직선, 평면 등도 무정의 용어다.
가령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점을 “부분으로 분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현대 수학에서는 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지 않는다. 좌표계를 이용해 그것을 표시할 뿐이다. 그것이 부분으로 분해가 되든 안 되든 호박이든 수박이든 아무 상관없다.
“집합”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의 모임”이 집합이다. “어떤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상관없다. 하나가 있든 둘이 있든 심지어 아무것도 없어도 상관없다. 조건식으로 집합특징을 기술할 뿐이다.
“1+1=2”의 증명. 1910년 출판된 “수학원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저술한 이 책은 20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당연하기 짝이 없는 사실을 굳이 증명하려 한 것은, 수학이라는 학문의 논리적인 기초를 확립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책 대부분이 수학기호로만 되어 있어 당시에는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은 공동저자 두 명과 괴델 세 명뿐일 것이다.”라는 논평이 있을 정도다.
3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1+1=2”를 증명하는 내용이다. 페아노 공리계를 사용하여 무결점, 완벽한 논리체계로 증명하는데 300페이지나 필요했다.
그러나 만일 유치원생이 “1+1=2”를 반박하며 “찰흙 한 덩이에 찰흙 한 덩이를 더하면 여전히 한 덩이이므로 1+1=1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이것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300페이지에 가까운 논리적인 수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실상 논리적인 도구로 해부했을 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1+1=2”가 맞는지 검증하는데 300페이지가 필요했던 이유가 그것을 말해준다.
뇌는 캄캄한 두개골 안에 갇혀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시신경이 보내온 것이 무엇인지 뇌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인식”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골방(?)에 처박혀 있는 뇌가 내놓은 결과물이다.
시각뿐 아니라 인간의 감각 정보가 모두 그러한 메커니즘을 통해 이루어진다. 똑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인식이나 판단이 달라지는 것은, 뇌의 연산 능력에 달려 있다. 뉴런 신경회로가 시원찮거나 엉성할 때, 판단에 오류가 생기고 인지능력에 문제가 생긴다.
컴퓨터 CPU에 영양제를 주입한다고 성능이 좋아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뇌”의 연산능력이 높아지지 않는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알고리듬을 업데이트하는 것.
이것은 인식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선입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 이것은 PC 성능을 업데이트하는 것과 같다. 사소한 일 처리에도 버벅거리는 저사양을 탈피해 새로운 세상에 눈뜨는 것, 이 작업에 페아노 공리계가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
페아노 공리계는 백지상태에서 출발한다.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선입관, 고집, 주장을 모두 지우고 순수한 논리의 첫걸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인 것과 사실이 아닌 것,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의심할 수 없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진정성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백지 위에 하나씩 쌓아가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흔들리지 않는 진실의 힘이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그 진실은 백지에서 시작한 순수하고 올바른 토대 위에 구축된 자신의 주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