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살다 보면 누구나 안개속을 걸을 때가 있다. 사실 사는 것 자체가 안개속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사 주사위 던지듯 카지노 게임처럼 돌아간다.
며칠 전 음주 차량에 치여 9살 어린이(배승아)가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배양은 학교 근처에서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음주 차량이 인도를 덮쳐 사고가 났다. 그녀의 삶이 9살에 끝나리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작년 말에는 이태원에서 1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 압사하려고 그곳에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잠자던 중에 지진으로 생매장되는 일도 허다하다. 미국에서는 총기 사고로 한 해에 4만 명 이상이 숨진다. 난치병이나 사고를 당해 삶다운 생을 살지 못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심리적인 고통으로 자살하거나, 쓸쓸한 방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다.
재밌는 유튜브를 본 적이 있다.
무당이 무당집에 가서 점을 보면 어떻게 될까? 물론 신분을 속이고 하는 몰래카메라 비슷한 설정이다. 전국에서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당치고 무당을 무당이라고 맞춘 점쟁이는 하나도 없었다. 죽은 사람의 생년월일을 제시하고 사주팔자를 봤는데 조만간 혼사가 오가고 재물이 모일 운이란다.
운명을 맞출 정도의 예지력이 있다면 주식이나 로또로 진작 부자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사람 앞 일은 알면서 주식이나 로또는 맞추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러나 안개속에서 “지푸라기” 잡고 싶은 인간의 심리로 인해 그들 직업이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안개속”을 읽으면 양자역학이 떠오른다.
양자역학은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안개속” 그 자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상식도 그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나무와 덩굴과 돌들 서로가 떨어져 있듯, 그 세계에서는 원인도 결과도 서로 떨어져 있는 남남이다.
아인슈타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헤르만 헤세는 양자역학을 알았을까? 이름은 들어 봤을지 몰라도 그것에 대한 지식은 없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 생전에는 의문과 논쟁으로 양자역학이 완전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양자역학이었다.
그럼에도 헤세는 양자역학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시를 썼다. 점쟁이나 무당이 아님에도 그는 양자역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듯한 느낌을 준다. 시로 세상의 본질을 꿰뚫은 그의 감성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예사롭지 않다.
양자역학의 눈으로 본 세상은 “안개속” 그 자체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이 있지만 양자역학이 정말로 그렇다. 양자역학은 한순간에 그 이전의 물리학을 “고물”로 탈바꿈시켰다. 고전적으로 질서있는 것으로 보였던 세상은 실상 무질서가 만든 실재였다. 질서를 무질서가 만든 것이라면, 어느 쪽이 진실일까?
아인슈타인은 질서 정연한 우주의 모습처럼 원자의 세계도 그러길 바랐다. 질서 속에 규칙 정연한 세계가 있으리라 죽을 때까지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질서 속에 질서가 있으리라는 그의 신념은 빗나갔다.
역사적으로 신학과 철학이 학문의 정점으로 모든 학문을 이끄는 형태로 발전되어 왔지만, 오늘날에는 그 위치가 바뀌었다. 이제 물리학은 철학의 영역, 형이상학적인 문제까지 야기시킨다.
신학은 신화로 바뀌고 철학은 물리학의 시녀로 바뀌었다. 물리학이 던져 준 숙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철학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양자역학을 모르고 철학을 한다는 것은 알파벳을 모르고 문학을 논하는 것과도 같다. 양자역학은 수학적으로, 실험적으로 증명된 실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세계를 제쳐두고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양자역학에 기초하지 않는 해석학이나 현상학은 무의미한 작업이 된다. 점쟁이나 무당이 하는 일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양자역학에 기반하지 않은 생물학도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양자 터널링은 이미 화학반응에서 관찰되었고, 광합성 작용은 양자역학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기술임이 밝혀졌다.
촉매, 효소 등이 개입하는 물질작용에 에너지효율이 높은 이유를 고전역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유전자 차원에서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양자역학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분야(양자생물학)도 있다.
말하자면 생명현상은 안개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무질서한 입자들이 만들어 낸 양자역학의 예술작품이다. 마치 해변에 무작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이 모래사장에 “생명”이라는 발자국을 새긴 것과도 같다.
진화든 창조든 왜 생명이 필요했을까? 애당초 지구가 화성이나 금성처럼 무생물이어도 상관이 없지 않았을까? 우주의 입장에서는 그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생명을 만드는 일은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나무와 덩굴과 돌들, 우연이든 필연이든 존재하는 것은 무슨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균이 존재하는 이유도 세포분열 그 이상의 무엇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같지는 않다. 생명의 바코드(유전자)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 개체에 고유성을 부여한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고, 그냥 무생물처럼 자연 일부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죽어보지 않은 이상 죽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누가 알겠는가? 무생물 세계에서도 행복이나 고통이 따라다니고 있을지. 자연의 본성을 저버린 것들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연은 먹고 먹히는 세계지만 생물들의 취미생활은 아니다. 먹고 먹히는 일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각자의 본능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사고·사건일 뿐이다. 사람도 자연재해나 전쟁, 살인강도나 갖가지 사고로 죽어 나간다. 죽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생명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일은 다반사다.
그러나 자연에는 방향성이 있다. 자연의 모든 변화는 “확률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진행된다. 확률이 높은 곳으로 향하는 것이 곧 자연의 본성이다. 방향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든 “의미”을 내포한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모든 생물은 확률이 가장 높은 방향으로 행동한다. 배가 부른데도 사냥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상대를 공격하는 경우는 없다. 인간으로 치면 그것은 양심과도 같은 것이다. 확률이 낮을 때 "보기 드문"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생물계에서는 보기 드문, 인간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자연은 서로 먹히고 먹히는 세계지만, 무질서 속에서 진화를 통해 질서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양자역학과 닮아있다. 무질서의 확률적 통계가 진화를 통해 질서로 향한다는 것은 생명현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삶과 죽음이 겹쳐진 기묘한 안개속의 세계, 소리도 없이 모든 것을 갈라놓는 어둠의 실체, 입자는 갈라질 때 파동의 성질을 갖는다. 자신의 흔적을 무언의 메시지로 남긴다.
입자는 삶이고 파동은 그 입자의 메시지인 셈이다. 실제로 물리학자는 입자가 사라지면서 남기는 흔적을 가지고 연구한다. 사라지되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안개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으려는 것과도 같다. 안개속에서는 안개 입자를 느끼는 것이 길이다. 술 마실 때 취한 기분이면 족하고, 커피 마실 때 커피 향으로 만족하면 그만이다. 그것을 위해 커피나무 잎의 광합성 연구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지금의 순간을 느끼는 것이 생이 남기는 유일한 메시지일 것이다.
생명이 원하는 욕망은 평화로움 단 하나뿐이다. 이것은 생물 빅뱅이 터졌을 때 각인된 것이기 때문에 속일 방법은 없다. 퍼즐 조각에 제대로 된 것을 끼워 맞춰야만 한다. 생물은 서로가 속이고 속이지만 생존 본능을 유지하기 위한 진실한 수단일 때만 그렇다.
그것을 넘어서면 오작동이 생긴다. 생명의 욕구본능이 좌절된다.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공허함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왜 사는 것인지 질문이 던져질 때가 그 순간이다. 부자가 자살하는 것이나 가난뱅이가 자살하는 것이나 떨어지는 장소는 다르지만 이유는 같다. 의미를 잃어버렸다.
커피 한 잔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커피나무까지 바랄 때, 그냥 사는 것 이상의 것을 바랄 때 오작동이 생긴다. 그러나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지 않으면 의미를 잃어버릴 일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