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잡담 Aug 08. 2023

그리움은 먼 곳에 있다


그리움은 먼 곳에 있다


지금의 시대에 편지를 쓴다는 것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진다. 돈 내라는 고지서만 꽂혀있는 우편함에 만일 우표가 붙어있는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면 UFO라도 본 것 마냥 심장이 멎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으로는 학교 다닐 때 말고는 우표를 붙여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편지를 쓰기는 했지만 그때는 e-mail이었다. 우표를 붙이는 대신 마우스 클릭으로 배달되는, 구구절절 문장들을 전선 가닥에 실어 당신에게 보내곤 했다.


그로부터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너무도 오래되고 너무도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기에 당신은 이미 세상을 떠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나이 이제 환갑이 넘었기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할 것이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누구나 다 100세까지 사는 것은 아니다. 죽는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알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나에게 당신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반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한편으로 당신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혹시라도 중환자실에 있거나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는 차라리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가능성이 반반인 경우가 좀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슨 망령인지 불현듯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소도 모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 망령이 아니라 한때 정겨운 감정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었기에 고독이 심술을 부려 그리움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생각에도 각질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죽은 껍질이 떨어져 나가고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새로운 감정이 드러난다. 기억에 남아있는 감정의 파편들, 잊을 수 없는 시간의 조각들이 가끔은 당신을 떠오르게 한다.


죽은 사람도 글을 읽을까? 영혼을 믿지는 않지만, 영혼이 아니더라도 흩어진 감정의 입자들이 바람에 떠돌아다닐 수 있다면, 먼지처럼 글 위에 내려앉을 수는 있겠지. 가지런히 나열된 철자를 더듬을 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언어의 감촉에 그것이 누가 쓴 것인지도 알 수 있으리라.     

빗방울이 떨어질 듯 말 듯 흐린 날, 마음속 슬픔도 떨어질 듯 말 듯하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심장마비 올 것 같은 우울한 저녁, 포구의 불빛만 바람에 아른거린다. 새들은 둥지로 돌아가고 별들도 사라져 버린 심심한 공간, 하늘과 바람과 어둠, 노숙자의 시처럼 쓸쓸한 풍경.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그리움은 먼 곳에 있다. 양로원의 손가락이 고독에 떨면서 카드 조각을 맞추듯, 유리창으로 텅 빈 광장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회상이 가득한 밀림의 숲이 있다. 비가 와도 흐르지 않는 사막의 강에는 메마른 시간알갱이만 쌓인다. 한 잔의 술로서 삶의 건초 더미를 축축하게 적실뿐.     


나 또한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과 기쁨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지만 결국에는 처음의 기차역으로 다시 회귀하는, 이제는 철길에 웅크리고 앉아 달려오는 기차를 기다리는 기분마저 든다.

지나간 일들이 쓸쓸하게 바닥을 뒹군다. 같은 시간의 담요 속에 있었을 때가 행복이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했을까? 행복 위에 다른 행복이 더 있을 것이라는 욕망이 정작 가지고 있던 행복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잃어버리는 것이 많을지도 모른다. 안나 카레니나처럼 기차에 몸을 던지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에 이런 글을 쓰는 나 역시 그와 다를 바가 없다. 잃은 것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알지 못했던 무지에 대한 고백성사.    

 

어느덧 운명이 속삭이는 속임수를 다 알아버린 나이, 이제는 아무런 기대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 희망도 절망도 지푸라기처럼 덧없이 느껴진다. 암자 닮은 고요한 좁은 방, 느릿한 거동에 잠자던 먼지들도 깨어나는 공간.

그러나 모든 것이 생기를 잃을 때 비로소 살아나는 것들도 있다. 지난날의 감수성이 환원되는, 침묵 속에 응결되어 동공에 맺히는 한 줌의 애틋한 감정. 삶 어딘가의 책갈피에서 한 움큼의 향기를 간직한 채 박제가 되어있는 당신의 그림자가 발견되곤 한다.   

  

지난날을 회상할 때면 허물어진 유적지를 둘러보는 기분이다. 축제 뒤에 오는 텅 빈 광장처럼 열정이 지나간 뒤에는 헐벗은 시간만 남는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오직 변화뿐이라는 시간의 법칙, 그리움은 그것을 진실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 생각 없이 여행했던 방랑의 추억이 머릿속에서 생살처럼 솟아난다. 어느 외로운 섬에 갔던 기억도 난다. 변변한 산책길도 없는 길을 들개처럼 돌아다녔던 섬. 몇 가구만 살았던 그곳은 지금 무인도가 되지 않았을까? 그 또한 시간 속에 함몰되어 잡초에 묻혀있을 것만 같다.     


참선하듯 지난날의 궤적을 응시하는 시간이 많아져 간다. 삶의 퇴적층에 고여 있는 오아시스, 낡은 시간의 점묘화 속에서 퇴색되지 않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신과 함께 숨 쉬고 살았던 날들일 것이다.

아보가드로가 말하길, 숨 한 번 들이마실 때마다 소크라테스가 내쉬었던 분자 몇 개 정도는 들어있다는데, 30년 전에 만났던 사람의 입자가 내 글과 부닥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런 기대감으로 글을 쓰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개의치는 않는다. 꽃밭을 거닐면 향기를 맡는 것으로 족하다. 잠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회상은 꽃길을 걷는 것과도 같기에.     


아름다움은 오래된 것일수록 깊은 향기가 난다. 육체는 변해도 각인된 감정은 세월에 산화되지 않는다. 마치 다비식에서 타오르는 불길에도 사라지지 않는 사리와 같은, 당신과의 인연은 나에게 하나의 신화로 남아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서야 그 날개를 편다고 한다. 역사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뜻이다. 감정이 맥박 치던 한때의 삶, 쓸쓸한 노파가 남기는 유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덤 속에서도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소설이라 생각된다. 죽은 뒤에도  그리움은 먼 곳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을 것만 같다. 지나고 나서야 그리움은 부엉이처럼 날개를 펴는 것 같다.    


 - Truly Yours. Aug 08, 2023 -




이전 14화 벚꽃 산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