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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잡담 Apr 03. 2023

벚꽃 산책


벚꽃 산책


요즘은 어디 가나 벚꽃이 흔하게 보인다.

그러나 벚꽃 구경하러 서울서 진해까지 1박 2일 여행 일정까지 잡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마이카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때(30년 전?)만 해도 벚꽃 구경할 만한 곳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기후변화 때문인지 꽃도 일찍 핀다. 예전에는 벚꽃 개화 시기를 따로 알아 볼 필요가 없었다. 식목일(4월5일)쯤이 벚꽃 피는 시기였다. 예전보다 개화시기가 10일 정도 앞당겨진 셈이다.

여하튼 이때쯤이면 섬진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진 벚꽃 길을 드라이브했던 기억이 새롭다. 전라도 순천에서 근무했을 때다. 그 지방은 정말로 꽃피는 산골이었다. 고향의 봄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가사 그대로였다.

그 지역은 봄이 되면 구례 산수유를 시작으로 매화, 개나리, 벚꽃이 순차적으로 핀다. 어디를 가나 꽃이 발길에 차였다. 물은 또 얼마나 깨끗한지 강바닥에 자갈이 수채화처럼 투명했다.

그러나 작년에 그 지역을 돌아봤을 때 많이 달라져 아쉬움이 많았다. 수채화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래픽으로 변해 버린 느낌. 시골 시장처럼 다소곳했던 화개장터도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날로그 감성은 사라지고 차가운 디지털 인상만 남았다.     


잃어버린 추억은 순천뿐이 아니다.

대학교 때(80년대) 갔던 정동진은 전형적인 시골 동네였다. 큰 도로를 벗어나면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좁은 길로 택시가 달렸다. 조그만 역사 말고는 주변에 건물이 없었다. 너무도 한적해서 섬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동진은 나에게 여백의 공간으로 기억되는 장소였다.

그러나 몇 년 전에 갔을 때, 정동진은 숨이 막힐 정도로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공원(모래시계)도 생기고, 절벽 위에 세워진 리조트 건물에 위압감마저 느꼈다. 바다는 변함이 없었지만 육지는 그렇지 않았다.

너무도 변해버린 그곳에 나는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멀리서 몇 시간을 운전해 왔지만 잠깐 모래사장만 산책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서는 나에게 정동진은 반문했을지도 모른다. 너도 변하지 않았느냐? 20대였던 네가 60이 다된 몰골은 생각지도 않고 세상 변한 것만 탓한다고.     


지금 사는 집 근처에도 벚꽃길이 있다.

해안도로에 아름드리 벚꽃 나무가 늘어서 있다. 능포 양지암 조각공원에서 장승포까지 약 3km 정도 된다. 중간에 벚꽃 터널 구간도 있다. 드라이브하기에는 짧고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거의 매일같이 산책하는 길이다. 해안가를 끼고 있어 걷는 내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주말에는 조선소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도 보인다.

멀리 타국에서 생활하는 그들도 벚꽃이 활짝 핀 날만큼은 행복해 보인다. 걷다 보면 사진 촬영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벚꽃보다는 웃는 그들의 표정에 포커스를 맞춰 본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번식 때문이다.

사람도 청춘의 시기가 가장 풋풋하고 아름답다. 이유는 너무도 당연하다 사랑스럽지 않으면 번식에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자연이 정한 법칙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방통행이다.

번식은 생물학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융합의 의미를 갖는다. 다른 생명체와 융합, 그것이 심리적인 작용일 때 우리는 사랑이라는 용어로 번식의 의미와 구분한다.

사랑의 의도가 융합이라면 그것은 다른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다른 것을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융합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몸 자체가 융합의 존재가 아닌가? 우리 몸은 미생물에 의해 운영되고, 육체 자체가 미생물의 군락지다.

서로가 다른 생명체에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방식, 이것은 자연이 규정한 “사랑”의 정의인 것 같기도 하다. 생명뿐 아니라 모든 물질은 사랑의 기질(이온화)을 가지고 있다.

    

식물들에게 개화는 사랑의 시기다. 사랑의 시기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벚꽃 길에서 인상 쓰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꽃길에서는 젊은이도 늙은이도 모두 아름답게 보인다.

인도에는 생명체를 극도로 사랑하는 종교(자이나교)가 있다.

자이나교 성직자는 물도 필터로 걸러 먹는다. 물속에 있는 미생물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다. 생명에 대한 관념이 지극하지만,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 그들도 한때는 생명이었던 곡식을 먹을 수밖에 없다. 살생도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존적인 이유와 정서적인 감정이 구별되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자이나교의 생명에 대한 관점은 세상의 그 어떤 이념보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생명존중과 생명에 대한 사랑, 자기 자신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양심의 소리다.

인간이나 박테리아나 생체 매커니즘이 같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생명의 가치는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는 셈이다.    

 

태생 메커니즘이 같으면 종은 달라도 생명체가 느끼는 감정의 수준은 모두 같은 것이다. 자연의 시각에서 봤을 때, 생물 종의 차이는 사람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의 자연에서 나왔기에 도파민도 같을 것이고 행복의 느낌도 같을 것이다. 감각(감정)은 물질 분자의 표현 형식일 뿐이다. 그것은 언어의 문장구조와도 같다. 화학 입자들의 배열!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나중에 죽어 내가 미생물에 흡수되어 박테리아가 된다면, 박테리아가 느끼는 행복감은 어떤 느낌일까? 인간일 때보다 나을까? 그렇지 않을까?     


산책하면서 “별 희한한 생각”도 다한다는 생각이 든다.

산책 중에 박테리아 오르가슴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망령의 전조가 아니길 바라며... 그러나 나이 들면서 생각의 기준점이 변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 기준점은 “인간”이 아니라 “생명”이다.

생각 좌표축의 변화, 이제 막 60을 넘었을 뿐인데, 생각이 생물분류표 맨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인간”의 지위에 점점 자신이 없어져 가는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교류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인간”에 대한 관념이 점점 희박해져 간다.

경제활동도 모니터(주식) 들여다보는 것이 전부이다 보니, 인간보다는 박테리아와 더 많은 친분을 쌓는 기분이다. 하긴 나중에 땅에 묻히게 되면 그들이 작업을 주도할 터이니, 미리미리 친해지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닐 것이다.     


낚시를 자제해야 할까? 고민 중이다. 자이나교 생명관을 찬양하면서 낚시를 즐긴다면, 이중인격 딜레마에 빠진 기분이다. 그냥 썼던 글 없던 것으로 지워버릴까? 하다가 꼼수를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 낚시는 고기의 문제가 아니라 백수의 생존 문제다. 낚싯대의 짜릿한 손맛이 없다면, 백수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과도 같다. 이보다 생존에 더 위협적인 상황이 어디 있을까? "고기가 사느냐? 내가 사느냐?"의 중대기로에서 자이나교를 따질 상황이 아니다.

해서 내일은 어디로 갈지 장소를 몰색해 본다. 며칠 전에 놓쳤던 큰 놈이 꿈속에서도 나타난다. 아슬아슬하게 2인분 횟감을 놓쳤다. 내일 낚시는 그 곳에 가기로 결정한다.     


산책길이 끝나간다.

화창한 날씨, 새파란 바다, 늘어진 벚꽃 가지 아래서 사진 찍는 젊은 커플이 벚꽃보다 아름답다.

화석이 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젊은 커플이 사진을 찍는 이유와 같다. 먼지 속에서 궤적을 남기는 벌레처럼 나 또한 시간의 먼지 속에서 작은 흔적을 남길 뿐이다.

한 컷의 스냅사진, 이 공간에서 숨 쉬면서 느꼈던 생의 입자들, 이 또한 지나고 나면 벚꽃 지듯 사라질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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