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정교하고 복잡한 시스템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그냥 생겨날 수 없다는 학자들이(창조론) 있다. 그들은 소위 지적설계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고전적이고 고정적인 인간의 인식과 선입관, 그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神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자연에는 널려 있다.
고대에는 천둥이나 벼락을 신의 노여움으로 인식했다. 중세에는 천사들이 별을 붙들고 있어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달도 천사가 밀고 있어서 지구 주위를 도는 것으로 생각했다. 지적설계론은 그러한 인간의 고전적인 인식, 선입관이 연장된 것에 불과하다.
상식적으로 복잡할수록 존재할 확률은 낮아진다.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면 그것을 만든 존재의 확률은 더 낮을 수밖에 없다. 전지전능한 존재는 말할 것도 없다. 전지전능한 존재는 복잡도가 무한대다. 그냥 "돌"을 신이라고 하는 것이나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둘 사이에 확률적 차이는 아무것도 없다.
생명이 너무나도 정교하고 복잡해서 그냥 생겨날 수 없다면서, 복잡도가 무한대인 전지전능한 존재는 그냥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당장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개별적인 공기 입자들은 모두 무작위적으로 움직인다. 규칙이 없기 때문에 어느 한쪽으로 공기가 몰리는 일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 가령 방안 전체가 아니라 화장실에만 공기들이 전부 몰려 있을 수도 있다. 그들 움직임이 무작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화장실에서만 생활해야만 한다. 그 외의 공간에서는 공기가 없기 때문에 질식해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볼츠만 방정식이 그 이유를 설명하지만, 지적설계론자들은 볼츠만보다는 신의 섭리를 선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아마도 공기 입자들이 한쪽으로 몰리지 않도록 神이 공기 입자 하나하나를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마치 천사들이 별을 붙들고 있어서 땅에 떨어지지 않듯이.
입자들이 무작위로 운동하기 때문에 거시상태는 언제나 미시상태의 통계적 확률값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확률이기 때문에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보기 드문 현상도 발생한다. 생명이 그런 경우다.
“생명”은 분자배열의 특별한 형태다. 공기가 골고루 퍼지지 않고 안개처럼 한쪽에 조금 더 몰려 있는 상태와 같다. 볼츠만식으로 말하면 보기 드문 확률(우연) 중 하나일 뿐이다. 생명의 보기 드문 현상에 대해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생명은 확률밀도 특정값에 의해 발생된 현상이다. “특정값”은 평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지구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구 질량을 100으로 봤을 때, 지구에 있는 생명체 전체의 질량은 지구의 0.0000001%도 안된다. 비율만 놓고 봐도 지구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는 무생물이다. 생명체는 극히 예외적인 비정상적인 상태다. -엔트로피-』
생명이 발생할 확률을 계산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물리학자 프레드 호일은 가장 간단한 세포가 만들어질 확률을 대략 10의 40000승의 1로 계산했다. 그는 이 확률을 폐차장에 쌓인 고철 덩어리가 토네이도에 의해서 공중에 올라갔다가 떨어질 때 자연적으로 조립될 가능성과 비교했다. 생명은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참으로 이보다 멍청한 생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의미하다.
그가 말하는 확률은 미시상태를 무시한 조건부 확률일 뿐이다. 미시상태에서 확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을 확률로 계산할 수 있을까?
아보가드로 수는 6 곱하기 10의 23승 개다. 입자들이 전부 무작위로 움직인다. 입자 하나하나가 변수다. 이것을 함수로 표시한다면 10의 23승 대수학방정식과 같은 것이다. 폐차장 고철 덩어리 몇 개와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고작 5차 방정식만 넘어가도 수학적인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10의 23승 차원이라면, 여기에 확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보가드로 수가 아니라 우주 전체의 입자들이 모두 무작위로 움직인다. 이런 상태에서 굳이 확률을 따진다면 이 또한 돌덩이를 신이라고 하는 것이나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확률값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은 평범한 삶을 어떤 식으로든 초월적인 속성과 연결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내가 볼 때 우리 자신은 이미 초월적인 존재다. 확률로 따지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각자 개인의 존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른 초월적인 존재를 찾는다. 이것은 마치 북극 끝에서 북극을 찾으려는 것과도 같다. 자연이 그 자체로 초월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가 있다. 바로 오일러 공식이다.
이 항등식이 신의 공식, 수학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무리수(e)와 무리수(π)의 조합이 왜 정수가 될까? 거기에 추상적인 허수(i)까지 지수에 얹혀 있다. 누가 봐도 이 공식이 성립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우연이다.
플랑크상수, 중력상수, 전자질량, 양성자 질량 등 여러 물리 상수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렇게 정해진 값이 아니면 안 되는가? 이 또한 설명할 수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우연 스스로가 그렇게 상수값을 정했다.
물리법칙은 필연적이고 인과론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미시세계의 통계적인 특징일 뿐이다. 나는 그 통계적 특징이 고도화되어 나타난 것이 “생명”이라 생각한다. 수많은 우연이 겹치고 중첩되어 나타난 자연현상이다.
카오스 이론과 비평형 열역학은 무질서한 혼돈에서 질서가 발생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자연의 한자 뜻을 보면,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곧 우연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모든 생명체는 자유의지를 갖는다. 우연에는 강제성이나 규칙이 없다.
규칙이나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우연에는 목표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연의 주체가 스스로가 정하고 규정하기 나름이다.
같은 닭이 낳은 알이라 하더라도 부화한 새끼들은 개체마다 단백질이나 세포 수에서 차이가 난다. 어느 것은 많고 어느 것은 적다. 왜 그런가? 神이 개체마다 단백질이나 세포 수를 지정해 주는 것일까? 그냥 우연일 뿐이다. 태어날 때 몇 개의 세포와 몇 개의 단백질을 가져야 한다는 법칙이나 규칙이 있을 리가 없다. 무작위 한 미시세계에 공권력 같은 강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우연한 존재이기에 자유의지를 가진다. 박테리아가 세포분열하는 이유는 자유의지 때문이며, 태어날 때 개체가 모두 똑같지 않은 것은 그들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박테리아 미시상태의 통계적인 특징은 “세포분열”이다. 곧 이것이 자유의지의 표현이고 박테리아는 세포분열에 삶의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이 얼마나 숭고한 자유의지인지 나는 존경해마지 않는다.
박테리아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닭이 알을 낳듯이 그들이 하루에 하나씩 자손을 번식했다면, 지금의 동식물은 생겨나지도 않았다. 만일 더불어 사는 “인류애”를 기준으로 생물을 분류한다면 박테리아는 가장 높은 고등생물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은 하등생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일 뿐이다. 거기에 신화로 치장하고 환상으로 장식한들 자연법칙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변하는 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연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자연이 인간의 사고방식에 딱 맞도록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마치 물고기가 자신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물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이 다름 아닌 "지성의 부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