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전자의 존재는 확률적인가 확정적인가?” 이 논쟁의 결과로 양자역학은 완전히 정리되어 오늘날 학문으로서 공고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논쟁이 생물학에도 있다. 생명체의 주도권이 “DNA인가 시스템인가?”의 논쟁이다.
전자의 대표 주자는 “이기적인 유전자”로 유명한 도킨스이고, 후자는 “시스템생물학” 석학 데니스노블 옥스퍼드대 교수다. 이것은 마치 “빛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물리학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논쟁의 초점은, 유기체가 변하는 원인이 “DNA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외부 환경에 의한 것인가?”이다. 전자는 DNA가 전적으로 유기체를 변화시키는 주체적인 요인이라고 하고, 후자는 유기체 시스템이 DNA를 통제함으로써 유기체 특징이 형성된다는 의견이다.
유전자 주체설, 도킨스의 주장은 이렇다.
교회 종과 수탉이 있다고 했을 때, 종이 아무 때나 랜덤하게 울리는 데도 수탉이 운다면, 교회 종이 수탉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곧 유기체가 DNA를 지배한다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둘 사이에 인과관계는 아무것도 없다.
수탉은 자신의 의지 때문에 우는 것이지 종이 울린다고 우는 것은 아니다. 몇 번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수탉 DNA가 후세로 전해졌을 때 후손들이 교회 종을 칠 때마다 울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팔이 절단되었다고 해서 후손이 팔이 절단 채로 태어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에 반해 시스템생물학을 대변하는 데니스노블의 의견은 이렇다.
HCN 유전자가 심장작동을 상당 부분 제어하고 있지만 이 유전자를 차단해도 심장박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DNA가 유기체를 지배한다면, 굳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 필요가 없다. 유기체에 공급되는 영양분이 같다면 환경이 어떻든 유기체는 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근육 운동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DNA가 유기체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유기체가 움직인다고 근육을 더 많이 생성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기체 변화에 따라 유전자도 바뀐다. 근육운동은 유기체가 유전자에게 근육세포를 더 많이 만들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유기체 시스템이 외부 환경에 따라 DNA를 변형시키고 통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킨스는 자연선택설을 주장하는 것이고 데니스노블은 용불용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연선택은 자연환경에 맞추어 DNA가 진화되어 유기체 특징이 나타난다는 것이고, 용불용설은 유기체의 필요성에 의해 DNA가 변하면서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인과론적인 차이가 있다. 이 논쟁은 두부 자르듯이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각자의 주장에 그럴만한 근거와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 주장에 따른 근거는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대표적으로 GMO 식품을 들 수 있다. “포메이토”는 자연에 없는 식물이지만 유전자 조작으로 얼마든지 유기체 형질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데니스노블 주장에 따른 근거는 의학계에서 확인이 된다. 이론적으로 유전자 서열교정으로 성공이 예견되었던 의약품 상당수가 실패했다. 즉 유전자를 정상의 것과 똑같이 만들었음에도 환자(동물)에게 투여했을 때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 이것은 유전자 이외의 무엇인가 있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된다.
만일 DNA 코드를 텍스트로 옮겨서 보관한 다음, 1천 년 후에 그 정보를 읽고 유기체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가? 문제에도 두 학자의 의견은 엇갈린다.
도킨스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하고 데니스노블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도킨스는 DNA는 유기체 설계도이기 때문에 복원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고 한 반면, 데니스노블은 복원을 지시할 시스템(유기체)이 없기 때문에 복원은 불가능할 것이라 한다.
이 논쟁은 마치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싸움 같아 보인다.
내 생각에 이것은 요리사와 레시피의 문제로 보인다. 유기체는 요리사고 DNA는 레시피가 아닐까?
먼저 유기체가 어떤 음식(단백질)이 필요한지 파악하여 DNA에 주문하면, DNA는 필요한 음식을 만들어 내는 식이다. 즉 유기체가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DNA가 단백질 만들 이유도 없고, 레시피 없이 유기체가 단백질을 만들 수 없는 상황과도 같다. 이런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적지 않다.
나 또한 이 견해에 동의하지만 아직 정확한 메커니즘은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촉”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과학역사에서 “촉”으로 짐작한 것이 나중에 사실로 밝혀진 사례가 종종 있다.
논쟁을 벌인 두 분 교수는 모두 나이가 80이 넘으신 노학자들이다. 논쟁의 주제보다도 논쟁을 벌이는 세련된 모습에 큰 감명을 받는다.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반격과 확실한 근거. 국내의 정치사회 토론을 본 적이 있지만 토론의 품격 차이가 느껴진다.
사회는 점점 토론이 생략되는 집단으로 변해간다. 총기 사고가 끊이지 않는 미국을 보면, 그쪽은 말 대신 총으로 대화하는 사회다. 총질하는 이유도 동기도 없다.
폭력이 대화의 부재에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토론은 지식탐구를 넘어 대화 훈련이라는 교육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미디어 만능시대에 토론은 없어지고 대화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가끔 모니터 앞에 소주잔을 놓고 대화를 나눌 때가 있다. 한 줄 쓰고, 한 잔 먹고... 하루 삶의 이야기를 하거나 영원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도 있다. 그러나 자신과 대화하면서도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잔 더 마실 것인가? 말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