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을 사람은 괜찮지만 무서운 아빠, 그리고 7년을 노력하는 괜찮은 아빠, 10년을 한없이 실망스러운 아빠와 함께 살았다. 더 실망할 것도 없겠지 하다가는 뒷통수를 맞는다. 내가 아빠를 인정하는 건 그 책임감 하나다. 노력은 까먹는게 워낙 컸어서 마이너스다. 자식이 부모를 점수매기듯 평가하고 있으니 입에 쓴 맛이 돈다. 돈 얘기를 할 때도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나도 내 마음이 오락가락 하는 게 웃기다.
몇 번의 변곡점을 겪고 보니 엄마가 이 결혼을 유지하는 한 과거의 수많은 일은 모른 체 해주고, 이 이상의 엄마를 무시하고 막 대하는 일만 없다면 특별한 날에나 한 번씩 만나 손주도 보여주고 원래 늘 좋았던 가족인 양 대하고 웃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쇠 귀에 경 읽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아빠를 포기했다. 그러니 그렇게 만나기만 하면 터져나오고 마는 울분을 토해내고도 지금 이렇게 지낼 수 있는거다. 다 처리되지는 못한 감정이지만 적어도 알리기는 했다. 그런다고 마음이 다 편해진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저 얼굴보고 사는 한 그 마음고생도 우리 몫이구나 라고 어느정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당신은 개선의 여지가 없다.
그저 은퇴 후 붙어 살면서 끝 없이 싸울 두 분의 삶이 걱정일 뿐. 여전히 돈 걱정은 있겠지만 이제야 좀 속 끓이던 고민들 내려두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야 할 때일텐데,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자식들이 부모가 노후에 싸울까봐 타지에서 걱정하는 상황이 맞는걸까.
세상엔 대단한 가장이, 대단한 가정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사실 나 정도의 사연은 명함을 내밀 축에도 못 낄지 모른다.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 당장 집을 뛰쳐나가야 할 정도, 혼자서 가계와 빚을 다 책임져야 할 정도도 아니건만, 나름대로의 풍요 속에서도 마음만은 왜 이다지도 힘들었을까.
부모조차 혼자 알아서 컸다고 할 정도로 순하고 시키는대로 부모가 원했던 공부만, 그것도 딱 부모가 아이의 재능에 버거워하지 않을 정도만 하고 자란 나는 깊고 깊은 마음 속 울분을 성인이 다 되어서야 표출하지만 가장 중요했던, 평생을 꺼내봐야 할 그 어린 날에 실컷 떼 쓰고 울어보지 못한 죄로 지금껏 이렇게 살고 있는거다. 참고 또 참고, 남을 찌를 순 없어서 나를 멍들게 하는 방법만 알았지, 혼자서는 약 한 번 바를 생각도 않고 살았더니 기어이 새 살은 못채우고 감정마저 도려내어 간다.
이런 이야기를 떳떳하게, 아무렇지 않게 쓰고 또 남에게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너무나 사소하고 추접하고 바닥까지 다 보여주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나는 이 상처들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내 부모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치료해야만 하고, 그래서 여러 글을 쓰고 있지만 이 마음 속 유래가 깊은 얘기를 풀어내지 않고는 단 한 자도 다른 글을 쓸 수가 없어 이렇게 나를 다 발가벗기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됐든,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 정의부터 내려야 방향이 서는거고, 이 글이 내 방향키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다 털어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