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도
뜬금없이 연필에 대한 사랑고백은 아니고..글을 쓰다가 왜 굳이 흐릿하고 지워지고 깎아야 하는 연필을 좋아하는지에 생각이 이르렀다. 조금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연필을 참 좋아했다. 유난히 연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친구들, 어딘지 모르게 자기 세계가 따로 있는 친구들이 그랬다. 그런 친구들하곤 의도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친해지게 되더라.
가장 살면서 필기를 많이 했을 것 같은 중고등학생 때에는 좋은 펜과 샤프, 색깔에 유난히 집착하는 친구가 많았지만 나는 연필 깎는 데 집착했다. 칼로.
연필 깎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또 있어서 친해졌다. 짝이 됐다. 고3 여학생 둘이 나란히 앉아 칼로 연필을 깎는 모습은 칼 가는 듯 자못 비장하고 섬뜩해서 선생님조차 건드릴 것이 못되었다. 잘은 모르지만 총을 닦는 감정과 비슷하려나.
그 땐 그 소리에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 같다. 사각, 사각, 사각. 조각도 아니건만 잘 깎이면 기분좋고, 손에 연필심 가루가 다 묻어도 나무와 심의 무르고 부드러운 느낌이 좋았다. (부러지지 않고 으깨지려면 B여야만 한다.)
심란하고 공부에 집중이 안 되면 몇 자루고 깎고, 그 소리에 집중한 뒤엔 공부가 잘 되었다. 공부도 손맛인 모양이었다. 진짜공부는 손으로 써야한다. 난 적어야만 외워지는 편이고, 공부하려면 쓰는 요약정리가 첫번째고, 일기까진 못써도 필기가 꽤 습관화 되어있다.
많이 쓰다보니 더 펜이 아닌 연필을 선호했고, 샤프조차 연필모양을 사서 썼나보다. 그리고 어떤 연필의 나무향과 가장 닮은 오래된 종이냄새를 좋아한다. 요즘종이에는 잘 없는 갱지의 건조하고, 오래된 책의 달달한 종이냄새. 세월을 먹은듯한 냄새.
어릴 때부터 신문지 여백에 끄적이던 경험, 미농지와 서예와 경필부가 재밌었던 경험, 옛날엔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글씨검사를 많이해서 더 잘 쓰려고 했던 노력, (그렇지만 어느샌가 귀여운 글씨체, 예쁘게 꾸미기 위한 목공풀과 반짝이들로 망가져버린 서체,) 연필로 썼던 수 많은 기억과 감정과 지식,
이런 것이 다 쌓여 만들어진 '선호'이겠지.
연필이 좋은 다른 이유는 질감 자체에서 오는 것보다, 지울 수 있고 아마도 흐릿해서이다. 나는 어쩌면 좀 흐릿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나는 꽤나 무던한 사람이다. 대체로 뭔가 고르라면 고르는 게 어렵진 않지만, 주변의 의견이 있으면 크게 반하지 않는 한 따르고, 때로 눈치보고, 가끔 충동적이고 내 생각과 의견에 확신이 없기도 한 어리숙한 인간이다.
사물이나 상황 그 자체보다 '장단점이 다 있는데..'하며 선택 시엔 후의 일을 더 따지는 편이고, 그렇게 해도 때로 일어나고 마는 실패와 후회를 줄여가는 삶을 산다. 많이 적는 나지만, 가끔 연필로 구현된 과거의 생각을 지우고 싶을 때도 있다.
부끄러운 생각, 편협한 생각, 뭣 모르고 끄적여논 생각..그러면서도 연필심이 번지듯 남에게 부드러운 영향을 미치고 싶어한다. 연필처럼 은은한 향이 나고 기분좋은, 심지는 굳은 듯하지만 가끔 으깨지기도, 스쳤을 뿐인데도 손 날에 묻어나버리는 싫지 않은 얼룩이어도 좋겠다.
나는 오늘도 연필로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