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땐 그러고 놀았어요
아이들은 실컷 뛰어놀아야 한다. 동네엔 애들이 많아서 현관을 나가기만 하면 뭐가 됐든 놀이는 시작된다. 어떤 날은 정말 하루 종일 비석 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놀 때 아이들의 집중력은 무시할 게 못된다. 그렇게 재미가 있었을까. 골목 안에 있던 공장 근처에서였는지, 판판한 돌을 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종일 비석 치기를 해 댄다면 깨지는 돌도 많았을 텐데 돌이 부족해서 못한 적은 없었다. 늘 그냥 지나다니다가도 고놈 잘 세워지겠다, 튼튼해 보이는구만- 싶으면 마당 한쪽 구석에 다람쥐처럼 쓸만한 돌을 수집했더랬다.
아빠 차 트렁크나, 아빠 작업복 주머니에선 분필보다 훨씬 바닥에 그림 그리기 좋은 하얗고 길쭉한 석재가 나오곤 한다. 아마 아빠가 현장에서 일할 때 바닥이나 벽에 표시하는 데 쓰곤 하던 돌이었을 텐데, 분필보다 덜 닳고 일반 돌보단 여러 번 긋지 않아도 잘 써졌기 때문에 땅따먹기 할 땐 꼭 필요한 것이었다. 내 뜀뛰기 실력을 올려줄 건 아니라도, 좀 괜찮은 템을 획득한 것 같은 나는 별 것 아닌 으쓱함에 가뿐히 뛰며 내 지분을 넓혀갔다.
아이들의 놀이엔 모종의 말 못 할 규칙이 있어서, 누군가 한 사람만 계속 신나고 한 사람은 계속 실패를 맛본다면 놀이를 지속할 수 없었다. 너무 들뜨기만 하면 안 되었고, 동생들을 데리고 팀으로 놀고자 한다면 더 쉽게 토라지고 말 아기들의 마음도 헤아려줘야 했다. 막 몸이 풀려 훨훨 날 수 있을 것 같을 때 조금 진정해야 오래 놀 수 있었지만, 왠지 반대의 경우에는 그 선의의 양보란 나만 억울한 것 같은 때도 적잖이 있었다. 그런 말을 입 밖에는 꺼내지 못할 나지만.
몇 살 더 먹은 오빠들이랑 하는 깡통차기는 그다지 재밌지 않았다. 오빠들은 너무 빠르고, 거칠고, 도전적인 데다, 날래게도 우릴 잘 잡아내어서 놀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창 맘 졸일 때 동네 가득 깽깽 하고 울려 퍼지던 깡통 나뒹구는 소리. 그런 종류의 놀이는 그다지 스릴은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아이의 심장엔 그리 좋지 않아서, 겨우 몇 번 같이 하다가 여자애들끼리는 고무줄을 하러, 맨발로도 기동성 좋은 오빠들은 우르르 몰려 옆동네로 놀러 가버리곤 했다. 그렇게 함께, 또 따로도 놀 것은 많았다.
고무줄놀이도 시작되면 종일이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나의 유연성은 거기서 온 것일지도 몰랐다. 고무줄은 몇 분이고 쉼없이 폴짝대야 하는, 나름 고강도의 폐활량을 요구하는 놀이다. 미션 하나를 성공적으로 마친 아이에게 휴식은 고무줄을 "올려주세요~" 하는 단 몇 초 뿐이라도 견딜만한 것이다. 줄을 잡고 내내 서 있어야 할 때, 숨은 그 때 몰아쉬면 된다.
엄마들도 그런 고무줄놀이를 했다고 하는 걸 보면, 어떻게 그런 많은 노래와 그에 맞춘 뛰기 규칙이 있는 건지 새삼 이해가 간다. 조금씩 높아지는 고무줄에 끝내 다리를 뻗어 걸고 밟았을 때 느껴지던 쾌감은 마침내 머리 위 만세까지 정복을 해야 만족될 수 있었다. 가끔은 그전에 어떤 까불이에 의해 끊어져 결국 한 개 늘고 말- 밟으면 안 되는 오징어(매듭)를 걱정하며 강제 종료 당할 때도 있었지만.
그 많았을 놀이 시간 중 묘하게도 가장 눈앞에 선한 것은 엄마가 여름밤 시원하게 씻겨 예쁜 토끼 그림의 나시 잠옷을 입혀주고 난 뒤, 아쉬움에 바깥을 한 번 내다보다가 누군가 우리 집 앞 가로등 밑에서 살살 불러대면 잽싸게 나가 또 머리카락이 얼굴에 다 붙도록 땀을 흘리고 놀던 기억이다. 가로등 아래서 아이들의 주황색 밤은 길었다. 아직 코발트 빛이던 하늘이 깊은 먹색이 되도록 밝은 가로등 불빛 아래선 그것을 알아챌 길이 없었으므로.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얼마나 화딱지가 났을까 싶다.
가끔은 그냥 그렇게 땀 흘린 채로 잠들어 모기의 희생양이 되고, 또 가끔은 다시 씻다가 밤이 늦어 수박 간식까지 먹고선 이불에 쉬 한다는 협박에 화장실을 두세 번이나 더 들락거린 뒤에야 겨우 노느라 노곤했던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