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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외곽 한국여자 Apr 21. 2024

봄방학 마지막 일기 12.13.14.15.16일차

어려운 문제는 분할하라. R.D


12. 2024년 4월 17일 수요일


그의 바캉스가 일주일인 경우의 패턴은 보통, 아래 중 하나의 양상을 보인다.


'약간 up - 완전 down - 약간 up'

'완전 down - 약간 up - 약간 down'  

‘약간 up - 약간 down - 약간 up’


이번 제이의 바캉스는 두 번째 패턴과 유사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목요일 저녁부터 자서 금요일은 결근까지 하면서 계속 잤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웬일로 이번에는 토요일 오전 아홉 시에 벌떡 일어나 좀 살아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믿었던 동료의 배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점심을 먹은 후 얼마되지 않아 벌써 술냄새를 풍기더니 상태가 꽝이다.


그러다 일요일에 다시 지하실로 기어 내려가서 광란의 굿판을 벌이며 클라이맥스를 찍고 지하바닥에서 밤을 보내고, 월요일 오전 다섯 시 삼십 분부터 포효하기 시작하다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울분과 서러움을 뱉고 토하고 또 울부짖었고. 내가 그럼에도 위로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심정으로 내려가지 않고 있으니, 제이는 그제야 포기하고 여섯 시경에 기어 올라왔지. 부엌으로 직행해서 지 밥그릇에 있는 2인분의 무밥을 양념장에 비벼서 3분도 안되어서다 털어 넣고는. 이층에 기어 올라가서 낮고 깊은 잠에 빠져들며 지난 폭풍은 잠잠해졌지. 또 기적적으로 우리가 점심 먹으려는 그 순간 기어 내려오고.


그렇게 '완전다운'의 적색경보는 이제 꺼진 듯하다.

금, 토, 일 이렇게 사람 피를 말려놓고 월요일 점심시간에 정신을 조금 차린 모양새다.


그렇게 제이는 월요일 오후에 3일 만에 아니 4일 만에 세상에 다시 나왔다.



아이와 함께 최대한 집 밖으로 빨리 나가려고 하던 나는 '그래, 집 안에서 길을 찾자'며 심호흡을 가다듬고, 지난 며칠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동은 일단 자제하고 준비한 점심 3인분을 식탁 위에 차려낸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각자 다른 이유로 마음 고생한 셋의 원기회복을 위한 닭백숙과, 무생채 무침이다.


백숙이나 구이 할 때, 닭 한 마리보다는 닭다리라 닭의 대퇴부가 붙어 있는 부위를 선호하는 데 한국에서는 요리를 해 본 적이 없고 먹기만 해 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모르겠지만, 퀴스 드 뿔레 cuisse de poulet 큰 거 3개를 깨끗이 씻어서 끓는 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해 주고 다시 건져서 깨끗이 씻어 잠시 받쳐둔다.


압력솥에 손질한 무 큰 덩어리 4개, 월계수 서너 장, 마늘 10알 정도, 통후추 한 숟가락 정도, 칼집 낸 양파 큰 거 한 개, 큰 파 흰 부분과 생강 작은 조각 그리고 정수한 물 2리터 정도를 넣는다. 아쉽지만 한약재나 나무뿌리 등은 없다. 조리를 시작한다. 40분 정도 압력추가 돌아가는 소리에 온 집안이 정신없을 즈음 불을 끈다. 10분 뒤에 뚜껑을 열면 미니 버전 닭백숙은 완성이다.


옆에서는 밥솥도 '고화력으로 밥이 완성되었으니 맛있게 드세요 쿠. 쿠.'이러면서 제 사명을 다한 듯 뿌듯해하는 모양새다.


지하 암흑세계에서 살아 나온 인간은 일층 거실에서 청소기를 돌리며 자기 죄를 뉘우치는 듯 알아서 나름대로 기고 있고..


일단 분위기는 뭐.. 집안꼴이 좀 돌아가는 모양새인 듯.. 싶다. 웃프지만 그렇다.


거짓으로 미소를 짓고 있거나, 가식적으로 하하하 웃어도 뇌는 몸주가 기분 좋은 상태로 인식한다고 했던가.. 아이가 저기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학 만들기 숙제를 하고 있구나. 좋은 엄마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연극배우의 자질도 갖추고 있어야 할 듯싶구나..



시간이 흘러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


그런데 애호박과 당근이 없다. 저 인간의 지하실 바닥 노숙자 체험 퍼포먼스로 진이 다 빠져서 슈퍼를 몇 번을 가도 며칠분의 식단을 고려하지 않고.. 틈이 생겼다. 날씨도 그렇고 해서 셋이서 보드게임을 하다가, 슈퍼를 갔다 오겠다고 하니, 자신이 가겠다고 한다. 그럴래?라고 하고 있는데, 아이가 귓속말로 속삭인다.


아빠 슈퍼에 가면 또 술 사 와서 마실 것 같은데.. 그냥 있는 거 먹자. 응?


봐봐 나이 들어서 결혼한다고 다 성숙하게 부모 노릇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 이 부족한 것 들.

끼리끼리 모여서 잘한다 잘해


세상에 잘난 집구석도 많은데 하필 부실한 이곳에 태어나가지고..

엄마가 우리 딸래미한테 많이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다…




13. 2024년 4월 18일 목요일


아이가 첫 번째로 일어나서 일층으로 다다다다 내려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나는 지금..

지하 노숙자 퍼포먼스 간접체험의 여파 + 아이 봄방학 후 열흘 정도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 부질없는 잉태의 신을 맞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철분이 부족해진 것 등등이 짬뽕이 되어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 만큼 많이 지쳐 있다.


방전될 신호가 오고 있다. 9시가 되어 겨우 주방에 내려왔다.


원래 오늘 아침은, 빵집에서 갓 구운 브리오쉬 brioche를 사 와서 준비하려고 했는데..

왔다 갔다 기본 30분에 주스용 오렌지도 있어서 레몬이랑 착즙 해서 준비하려면.. 아침 식사 시간이 너무 늦어진다. 나도 별로 아이도 별로인 세레알과 우유 사과 홍차 등으로 그냥 때워야겠다. 제이는 보통 주는 대로 게걸스럽게 다 먹으니 고려하지 않는다.


부엌에서 나와서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고 만화를 보면서 레고를 만들고 있는 아이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제이가 이층에서 내려와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가서, 그득히 쌓인 설거지를 하는 그를 향해 한 마디 했다.


¨그깟 회사 힘들면 때리치아뿌라¨


¨어..? 무슨 소리야 갑자기¨


무슨 소리는 네가 무슨 소리인지.. 그럼 그 노숙자 퍼포먼스와 지난 삼사 일간 사람을 달달 볶으며 십 년은 더 늙게 만든 감정적 고문의 행태는 도대체 그 어떤 것에서 연유한 것인지? 너.. 뭐 한 거니 그럼? 회사를 그만둘 만큼 힘든 것이 아니었다면, 왜 가족을 그렇게 힘들게 한 건지? 동료가 너를 배신한 것 같다면서..? 회사 사람들이 다 너를 싫어하는 것 같다면서..? 너한테 '오늘 또 나왔어?'라고 했다면서..?


이 짝이 아니면 아.. 또 너의 그 짝 가정사와 관련된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거니? 왜 또 나보다 네 살 많은 네 새엄마가 뭐라고 하든? 항상 사랑을 갈구하게 만들던 네 아빠가 또 소리 지르던? 아님 혼자 살고 있는 네 엄마가 울고불고하면서 힘들다고 하든?


도대체 뭐 때문이었던 건데 그 모든 퍼포먼스는..?


휴우.. 됐다. 오늘은 요까지만. 더 이상 사리 크기를 키우고 싶지 않다.


여하튼 자숙의 시간을 오늘부터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패턴이 그려지고 있는 것 같구나 너는. 그렇게 순방향을 찾아서 흐름을 잡아가는 너와는 반대로, 나의 시계는 역방향으로 도는 듯, 아주 힘겹게 힘이 제대로 딸리는 모양새다.


아직 아이 봄방학이 며칠 더 남았는데..


슈퍼도 가야 하고 밥도 해먹여야하고..


절대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된다.


나는 엄마다.




14. 2024년 4월 19일 금요일


고등학교 중간고사 국어 주관식 문제를 하나 틀린 적이 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기억에 남는다.


'여자 팔자는 OOO팔자'


보통 시험문제는 수능기출이나 모의고사 등에서 나오고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평이한 수준이라, 저 쉬워 보이는 문제를 맞히지 못했다는 것이 상당히 당황스러웠고 정답을 본 후엔 정말 황당했다.


저런 기초적인 지혜를 장착하지 못했던 탓일까, 나는 뭔가.. 불나방이었던 듯.. 그런 느낌이 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위험한 곳으로는 들어가지 않는 것은 상식인데, 왜 난 불길이 치솟는 그곳에 들어가서 굳이 불을 끄려고 생각했을까? 제대로 된 보호복 하나 없이, 장비하나 갖추지 않고, 무슨 의협심을 가지고 불 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일까. 그것도 인화물질이 가득했던 그곳에.


너는 너무 긍정적이야. 너도 곧 바뀌게 될 거야.


십여년 전, 제이가 내게 한 말이다. 이 말을 할 때만 해도, 불우한 어린 시절과 불안한 현실에 부정적이기만 너를 내가 고쳐주리라 생각했다. 저 얘기를 들었을 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긍정'은 나의 또 다른 이름이자 나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아이들이, 넌 약간 연상을 만나면 애교가 많아서 사랑을 엄청 받으면서 살 거야, “우리 반에서 네가 제일 결혼 빨리할 것 같다”는 소리도 많이 들을 정도로 행복바이러스를 뿌리며 걸어 다니는 재기 발랄 소녀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수십 년이 지나고 천지가 격변하면서 그 모든 것이 박제 과정도 없이 사라지고.. ENFP는 개뿔.. 봄바람에 흩어지는 체리블라썸 꽃잎처럼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제는 뭔가 약간 객관적으로 나를 들여다볼 용기가 필요하다.

결혼 후 십 년 만에 이제 약간 철이 드는 건가. 10년간의 혹독한 트레이닝과 심리적 패대기를 지속적으로 당해서 체력과 자존감은 바닥이 되었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철이 조금이라도 들었음에 감사한다.

여기서 조금은 나아갈 수 있음을 바라며, 이 깨달음을 바닥에 또 흘려버리지 말기를.. 제발.


여하튼 저 지독한 저주는 10년 만에 내 무릎을 꿇게 만들었고, 이로 나는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모든 동화에서 저주는 풀리라고 있는 것 같던데.. 아니라 해도 내 저주는 내가 푼다. 그래야 한다. 너 말고 또 누가 있니 니 옆에.


아직 조금 더 살아야 한다.

절대. 이대로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에.


책임져야 할 생명이 있지 아니한가.

사명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15. 2024년 4월 20일 토요일


점심엔 고화력밥과 콩나물 무침, 두부 부침 그리고 김구이다.


탕형제들 중국슈퍼에 숙주는 항상 있었지만 콩나물은 이번에 처음 봤다.

한국슈퍼에 가면 풀무원 콩나물을 팔지만, 수입해 오는 그 길을 상상만 해도 너무 멀어서 한 번도 들어 올린 적은 없다. 떡볶이의 경우에도 수입이 대부분이라 냉동이든 냉장이든 선뜻 바구니에 넣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에이스 한국마트에서 파리근교에서 만들어서 떡볶이와 가래떡을 팔기에 그것은 보일 때 얼른 집어넣는다. 가격은 한국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두 배정도 비싸지만, 내가 내 폰을 바꾸지 않고 내 크림과 옷과 신발 등 일체 나를 위한 것을 사지 않는 연유가 무엇인가. 좋은 음식을 위해 기본인 좋은 식재료구입을 위한 것 때문 아닌가. 여하튼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었던 그 콩나물, 직접 근교에서 기른 콩나물을 보고 어찌나 기쁘던지.


소고기나 양고기 스테이크 구이를 해 먹거나, 삼겹살이나 연어구이를 준비하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훨씬 쉽지만, 먹을 때 그렇게 다채롭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양송이버섯이나 양파를 가로로 굵게 썰고 애호박과 당근도 굵게 썰어 함께 구워내는 정도이지.. 현재 왼쪽 어금니도 하나 없는 상황에서 고기를 씹는 것 자체도 그렇게 즐거운 행위도 아니다. 그래도 한국보다는 이런 고기류의 가격대비 품질이 나쁜 편이 아니니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구워야 하고 제이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고기나 생선이 어떤 형태로든 있어야 하고 없으면 단백질 부족으로 죽는 줄 안다, 약간 과장을 더했지만 정말 내가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점심 저녁으로 고기를 계속 준비해야 할지 상상도 못 했던 바이다.


여하튼 고기보다 몇천 배 소중한 나의 식재료, 콩나물 봉지를 뜯었다. 신선하다. 정말 신선했다. 이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볼 중에서 가장 큰 설거지 통만 한 것에 넣고 찬물에 여러 번 헹궈서 씻어서 체에 밭쳐두었다. 가장 큰 냄비를 내려서 물을 담고 굵은소금 두 숟가락과 식용유 두 숟가락을 넣고 뚜껑을 닫고 불을 붙인다.


그리고 양념장을 준비한다. 콩나물무침의 생사는 여기서 다시 결정된다.

저번에 파리국제음식엑스포에서 받은 깨소금을 찾아보니 없다. 다 먹었나 보다. 통깨통을 보니 그것은 30퍼센트 정도 남아있다. 이것도 그곳에서 받았는데 이 통마저 끝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슈퍼에서 사서 그냥 먹어야 한다. 이러니.. 사람이 괜히 좋은 것에 한 번 노출이 되어버리면.. 입이 고급이 되어버리면, 원래 자신이 영유하던 문화를 갑자기 하대하는 이상증후를 보이게 된다고 하지.. 뭐 여하튼.. 그 통깨를 분쇄기에 넣고 좀 돌리다가 굵은소금을 추가해서 좀 더 갈았더니 고운 깨소금이 되었다.


큰 유리 샐러드볼을 꺼낸다. 거기에 갈아놓은 깨소금을 모두 들이부었다. 양이 꽤 된다. 큰 숟가락으로 열 큰 술은 가뿐히 넘길 만큼 그득하다. 우리 딸내미 지난 8월에 한국에서 외할머니가 무쳐준 콩나물무침을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고 오늘이 두 번 째인데, 제대로 고소하게 하자 싶어서, 덜지 않고 그대로 모두 둔다.


여기에 고운 고춧가루 한 큰 술, 일반고춧가루 한 큰 술을 넣었다. 마늘이 없어서 마늘가루를 넣어야겠다. 아, 마늘가루도 어제 중화풍 면볶음할 때 다 비웠구나... 약간의 생강가루와 후춧가루를 추가한 후 부엌 밖으로 가서 대파를 두 대 가지고 온다. 마늘 양파 풋고추 등 여러 가지 넣는 대신 대파 흰 부분만 듬뿍 넣기로 한다. 얘도 그냥 분쇄기에 휘리릭 휘리릭 갈아서 유리 샐러드볼에 추가한다. 여기에 진간장 두 큰 술과 멸치액적 한 큰 술을 추가한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참기름을 콸콸콸 들이붓는다.


콩나물은 끓는 물에서 4분 정도 지난 듯해서 건져서 먹어본다.  다 된 것 같다. 불을 끈다.

식용유를 넣으면 더 아삭하다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나쁘지 않다.  유튜브에서 소금을 넣으면 질겨진다고 했지만, 뭐가 그렇게 까다롭니 하며 굵은 게흘랑드 소금 한 큰 술 넣었다. 비디오에서는 물에 몇 번을 헹구는데, 난 그렇게는 못하겠다. 샐러드식이 아닌 따뜻한 뭔가 아귀찜스타일로 약간 따뜻한 느낌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고운 고춧가루를 넣은 것도 이 느낌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비디오에서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콩나물을 볼에 넣은 후 각종 양념을 위에 넣고 섞는 순이었지만, 나는 일회용 장갑을 끼고 양념 위에 따뜻한 콩나물을 넣고 잘 섞었다. 무쳤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도 같다. 그렇게 뭔가 아구는 없지만 아귀찜 느낌이 물씬 나고 식감도 그때 내가 먹은 그 아귀찜과 비슷한 콩나물 무침이 완성되었다. 프랑스살이 10년 만에 첫 콩나물 무침이라니..


Merci, Tang Frères!

탕형제들 슈퍼에서 인근 재배 생콩나물을 팔아줘서 진짜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어찌 보면.. 거기 가서 장 보자고 운전해서 간 제이에게도 감사하다고 하면 좋은데.. 6개를 잘하다가 4개를 못해서 잘한 거까지 다 말아먹는 너라는 인간.. 나도 배우자에게 감사하고 감사받고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고 싶은데... 너의 그 잊을만하면 개봉하고 잊을만하면 재개봉하는 그 공연이 난 너무 힘들다.. 10년이 지나도 적응이 너무 안 된다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이 안 나오네. 미안하지만 이게 팩트야. 넌 중국인지 베트남인지 저 슈퍼마켓에도 졌어. 졌다고.


아이가 맛있단다.

스테이크는 맨날 남기면서, 콩나물 무침과 밥을 싹싹 긁어먹는다. 양념이 입맛에 꼭 맞나 보다. 역시 깨소금과 참기름의 위력이 대단한 걸까.


엄마는 어떻게 이렇게 음식을 맛있게 해?


아... 오늘도 천근만근 몸과 마음을 이끌고 이층에서 일층으로 내려가 밥을 한 보람이 있구나.

고맙다. 내 천사. 내 딸. 내 친구. 나의 스승.

지하에서 일층으로 올라온 이도 밥을 싹싹 긁어먹고 까망베르와 브리 그리고 염소치즈까지 알뜰하게 챙겨드신다.


디저트는 무스 오 쇼콜라 mousse au chocolat로 우리들에게 부족한 '달콤함'이란 것을 간신히 충전해 낸다. 단 것을 싫어하는 나는 추가로 발효우유와 다트 dattes를 추가로 더 먹었다. 아무리 쌩으로 단맛을 입 속에 밀어 넣어도 내 삶이 쉽게 ‘달콤한 인생’으로 버전 이동이 잘 되질 않는다는 쓰디쓴 진실은 끝향으로 남아 내 코를 타고 심장으로 들어와 콕 박힌다. 아.. 따가운 현실.


10년 전부터 ‘러브액츄얼리’ 영화는 내 크리스마스 시네마 목록에 오를 수 없었고, 그즈음해서부터 내 인생의 장르가 확 바뀌었다. 드라마 공포 호러 독립영화.. 물론 그전에라고 특별히 별다를 것은 있었나? 물론 애송이 짓만 했었지.. 하지만 이 최근 십 년은 ‘매운맛’ 버전 하드코어물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아주 중요한 배역을 맡고 있는데.. 어쩌면 감독노릇도 할 수 있는 상황이라 머리통을 쎄게 여러번 좀 흔들어대다 보면 현실 자각을 하여 장르를 바꾸거나, 아니면 아예 영화 촬영의 진행자체를 멈출수도 있기는 하다.



단 것 하나 먹을 때조차 내가 들고 있던 그 '잣대'라는 것. 그것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제 좀 내려놓고 힘을 좀 빼고 편히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절제 절제 절제.. 그것이 너에게 가져다 준 것이 과연 무엇인지 시간을 들여 생각이란 것을 좀 해봐야한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고집하는 삶의 방식이 내가 함께 살고 있는 그 어떤 이들에겐 강요하지 않지만 가랑비에 옷 젖든 스며들어가는 것이니..


이 작은 집에서 작은 권력을 지니고 있는 내가 압력을 행사하고 싶지는 않다. 정신적인 압박을 준다면 그것이 작든 크든 폭력은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미 저 불쌍한 놈에게서 겪어봤고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지 않는가

분명 약자인 딸아이가 이중고를 겪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다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남 탓이나 하면서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는지..


이런 빈 틈을 찾아 슬며시 기어 들어 오는 것은 쌍방향 폭력 밖에 없지 않았던가

벌써 잊은 거야?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러니..’라는 소리 듣고 싶진 않을 테고

당연히 그런 줄 알면 정신을 차려야겠고.



이제 그에게 '완전 down - 약간 up - 약간 down' 패턴에서 약간 다운의 파도가 몰려올 차례야.


아이와 함께 안전띠 단단히 하고,

겁먹지 말고

파도에 그냥 몸을 맡겨.


오늘 저녁부터 내일 저녁까지로 예상하니까..

딱 하루야.

정신줄 하루만 더

단단히 잡고 있어.


손에 힘이 풀릴 것 같으면

눈을 감지 말고

오히려 더 크게 뜨고.

두 눈에 힘을 딱 주고

온몸의 긴장은 풀고.


자.. 가자!

와라, 파도야!



홀로 우뚝 서야 한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를 다시 만나야 한다.

다시 나를 찾아야 한다.


가능하다.

가능할 것이다.

가능해야 한다.



이 와중에..


아이가 엄마 웃는 거 잊어버렸냐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고 하네요..


애 잘 키우고 싶다더니..

잘하고 있네요 진짜.


진짜 다시 한번 말하게 되네요

죽을 때 입만 동동 뜨지 않도록


정신 단디 챙겨야겠습니다.




16. 2024년 4월 21일 일요일 11시 20분


일단 아이랑 밖으로 나가야겠습니다.

제이랑은 같이 못 가겠네요.

아직 자고 있거든요


11시까지만 일어났어도 데리고 갈텐데..

어제 새벽2시가 되어도 2층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없기에

느낌이 왔었죠..


이 일기 초반에 언급한 바캉스 패턴

약간다운,

이게 어제 저녁부터 온거죠.


그냥.. 자게 둘려구요.

깨운다,라는 개념이 그에겐 폭력이라네요.


그래서..

우리끼리,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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