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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미정 Apr 26. 2024

2024년 4월 25일. 22시에 쓴 일기

목요일 밤 10시에 쓰기 시작했는데.. 벌써 금요일..?


4월 6일 토요일~ 4월 21일 일요일까지 장장 16일간의 봄방학 여정이 끝난 후 며칠이 지난 오늘.


제이도 열흘 만에 회사로 돌아갔고, 월 화 수 그리고 오늘 목요일까지 별 문제 상황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1. 아이 짝 변경


오늘 학교에서 자리 조정이 전체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새로 앉게 된 아이는 어떤 스타일이냐고 물었더니 calme mais brutale이라고 한다. 얌전해 보이지만 한 번씩 소리를 지르면서 억압자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여자아이는 가만히 앉아 있는 듯 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는 따다다다하면서 엄청 쎄게 아이들에게 퍼붓는다고 한다. 어떻게.. 감당이 되겠냐고 하니 그럴 것 같다고 한다. 그것도 맨 뒷줄이라고 한다. 이제 의문을 제기하고 걱정을 하고 하지는 않기로 한다. 내가 나서서 뭘 하면 선생님의 결정과 불확실한 그 모든 상황의 경우의 수들보다 항상 더 나은 방향이 뚫릴까? 이제 나서지 않고 아이를 믿고 지켜보기로 한다. 무엇을 원하든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니, 과연 난 아이가 어떻게 학교 생활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커 나가길 바라는가. 그대로 될 것이다. 어떤 모습을 그리는가.



2. 아이 자존감 상승


그녀의 변화가 눈에 띈다. 개학 후 뭔가 자신감이 가득 찬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움직임 등 모든 면에서 탄력 있는 생동감이 있다고는 느꼈지만, 오늘은 그 상승곡선이 드디어 안정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강하게 느낀다.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이유가 혼합되어 이루어낸 변화일 것이다.


일단, 개학 바로 전 날인 일요일에 파리에 나가서 샤틀레에 있는 인터내셔널 놀이터서 만난 새 친구와 신나게 놀았던 '그 한 시간'이 떠오른다.  마음이 맞는 한 사람, 너의 에너지와 너의 진짜 모습과 꼭 들어맞는 영혼의 단짝과 나눴던 짧지만 꽉 찬 그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오늘 엄청 신났다고 얘기했다. 경쾌하고 통통 튀던 그 행복감 아이의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데 한 몫한 그 시간.


다음으로, 월요일 개학일에 방학 특별숙제를 제출했다. 개학 후 100일째를 기념하는 작품 만들기 숙제였다.

수많은 바캉스의 날들을 제외하고 2023년 9월 1일 첫날부터 계산해서 100일째 날이 지난 화요일이었고, 아이는 1,0,0 이렇게 3개의 숫자를 크게 써서 그 안에 자신의 사진 100장을 붙여서 냈다. 담임이 그 아이디어를 칭찬해 주고, 교실 입구 문 옆 가장 명당자리에 그 작품을 붙여주었다.


아이가, 선생님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단다. 선생님이 자신에게 장난친다고 글씨를 갈겨쓴다고 떠든다고 야단을 치고 싸늘한 눈빛을 보내기에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왜 가장 좋을 자리에 자신의 사진작품을 걸어두고 가장 눈에 띄게 해 주었느냐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 꼬맹이들이 27명이라 정신없으니까 모든 학생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할 수 없다고 이미 몇 번 말했었다. 내 말은 크게 위로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이 건으로 인해 선생님이 자신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받아들이고 아이는 다시 온몸에서 빛을 발산하기 시작한 것 같다.


결국.. '한 사람'이다. 내게 유의미한 그 한 사람이 내게 행사할 수 있는 그 힘이라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3. 기분 좋은 만취상태의 제이


월급날이라서인지 회사에서나 자신의 부모와 큰 문제가 없었는지 술이 분명히 취했는데도 심한 오물을 투척하지 않고 심지어 연신 싱글벙글이다. 월급을 받아도 첫날부터 싹 다 빠져나가고 몇 푼 남지 않는 것은 지난 달이나 작년이나 재작년이나 항상 그러했기에 큰 원인은 안될터이고.. 회사나 그의 부모도 매번 그 자리인데.. 어제 뜬 보름달이 그의 심장을 만져준걸까?


약을 다시 시작했나, 하는 의심도 들지 않는 것이 화학적인 물질이 변화시킨 기분의 상태에 있는 제이를 본 적이 있고, 이를 상기해 보면 오늘과는 많이 다르다. 좀 춥다고도 하고 저녁 9시도 안 되었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다. 오늘 재택근무라 점심때는 스파게티 볼로녜즈를 해먹이고 저녁에는 뿔레 호티, 닭구이를 먹여서 육류중독자에게 충분한 단백질이 들어간 상태에서 술이 들어가니 노곤해진 걸까.


그 무엇이 되었건, 술을 마시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심기를 건드리는 말만 계속 해대지 않으면 내가 한 성인의 선택에 관여할 일은 없다. 물론, 오늘도 이야기를 좀 들어주고 받아주고 하니까 갑자기, 지난 몇 주 간 크리스천 모욕발언까지 하더니, 오늘 저녁에는 아이에게 예수님 얘기를 꺼내며 자신은 네 엄마를 예수보다 더 위대하게 생각하고 많이 존경한다고, 숭배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들이 하나도 안 반갑다. 아이 앞에서 매일 딸아이보다 지 마누라에게 잘 보이려고 칭찬세례를 하는 것이 아이에게 미안하지 않은걸까? 아이와 마누라가 있으면 아이는 투명인간 취급을 하니 아이가 바보도 아니고, 그럼 난 턱 끝으로 혹은 손가락질로 아이를 가르키며 제발 좀 아이 챙기라는 제스처를 해댄다. 매번 눈빛으로 아이의 존재를 알려준다. 제발 아이이름부터 부르고 아이에게 먼저 뽀뽀해주고 아이먼저 안아주라구 도대체 몇 년을 얘기하는것인가. 내가 그에게 보내는 눈빛과 말투와 행동이 차가워질수록 더해지는 듯하다. 자신감이 없어서인지 선뜻 내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거나 요구하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모습이 답답하다. 그의 결핍과 사랑의 갈구가 부담스럽다.


갑자기 아이가, 오늘 저녁시간에는 정치 전쟁 회사스트레스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빠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기독교나 카톨릭같은 종교도 별로 듣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자신은 종교를 굳이 한 가지만 선택하고 헌신하지 않아도 된다면 불교도 좀 알고 싶다는. 나는 다른 종교를 알아가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좋은 태도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예수 부처 모하메드 등 그 어떤 종교지도자와 그 신자들도 폄하되어서는 안되고 순수한 믿음과 그 발걸음도 존중되어야한다고 덧붙였다. 아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땅인데 계속 하늘이야기만 하는 것보다는 그냥 지금을 착하고 행복하게 살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이가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내 아이는 더이상 나만의 아기가 아님을 오늘 새삼 느끼게 되었다.



4. 변기 안으로 정확하게 골인되지 않아도 괜찮아


한참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데 방금 전에 딸아이가 화장실에 간다고 얘길 하고 조금 있다 이어지는 단발음. 또 바로 지아빠에게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얼추 상황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만약 아이가 '아빠 왜 바닥에다 오줌을 다 흘려?'라고 기분 나쁜 만취상태의 그에게 말했다면, 그는 화를 내면서 주방휴지를 확 뜯어서는 화장실 문을 확 열어 재치고 들어가 그 액체를 닦는 것인지 오히려 전체 바닥에 골고루 그것을 다 묻히는지 모를 행동을 하며 오히려 우리를 달달달달 볶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분 좋은 만취상태의 제이는 기분 나쁜 만취상태의 그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딸아이에게 뭐라 뭐라고 조용하게 속삭이듯이 얘기를 하고 있고 또 아이도 그 말을 듣고 알았다고 하고 뭐 그런 부드러운 부녀지간의 모습이다. 뭐.. 우리끼리의 비밀이다.. 이런 류의 얘기였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기분좋은 상태의 제이는 편안해보이고 딸아이의 말을 살갑게 들어주는 그런 아빠구나.. 자주 볼 수 없는, 긴장감을 조금 내려놓은 제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인간적으로 좀 안스럽기도하고 다행스럽기도 하고, 평소에도 좀 편히 살지 싶어 안타깝기도했다. 그러다가 밥 준비에 다시 몰두하면서 이 건을 잊어버렸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 있는데, 아이가 양말을 신고 있지 않았다. 그걸 보면 보통은 양말을 신어라, 덧신은 어디 있느냐 등의 잔소리를 즉각 시전 하는데, 오늘은 아이가 따피(바닥에 깔아 두는) 위에 앉아서 놀고 있고 한 삼십 분이면 씻고 올라갈 텐데 싶어서 그냥 뒀다. 그런데 아직 알딸딸한 제이가 아이에게 양말을 왜 벗었냐고 잔소리를 하네? 평소에 내가 하는 사랑의 잔소리를 자신도 한번 해보고싶었던걸까? 자상한 아빠놀이를 시전하는 제이를 그리고 나를 한번씩 번갈아보더니, 웃음을 참는 듯 고민을 하는 듯, 아 이건 무슨.. 이런 표정으로 아, 이걸 말해 말어.. 하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 한마디한다.


아까, 아빠가 화장실 바닥에 오줌을 다 눠놔서 내가 그거 다 밟아서 벗었는데 기억 안 나?


그랬더니, 제이는 들었는데도 안 들리는 듯, 계속해서 양말을 찾으며 아이에게, 그럼 새 양말을 가지고 와서 신어야지,라고 한다. 오줌 얘기는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양말을 신지 않으면 춥다고 계속 춥다는 얘기만 하고 있다. 아이는 자신이 벗어 놓은 양말을 집어 들고 말한다. 홀랑 뒤집어 벗어놓은 연회색 양말의 바닥 부분이 흥건히 젖어서진회색이 되어있다.


아니.. 이걸 이렇게 딱 잡고 (마치 자신이 그것이 있는 듯 딱 잡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렇게 이렇게(없지만 있다고 가정한 그것을 왼쪽 오른쪽으로 흔들어 보이면서) 막 흔들어재끼면 안돼지.

변기를 향해 정확하게 방향을 잡고 계속 그것을 움직이지 말고, 변기 안에 정확하게 조준한 상태에서 가만히 서서 눠야지..

그래야 변기밖에 오줌을 안 누지.


이렇게 말하며 집어 들었던 양말을 다시 저쪽으로 던져 놓고 덧신을 향해 손을 뻗는다. 제이는 그 덧신을 집어서 아이에게 주며 '우리끼리의 비밀이라고 했잖아'이렇게 다 들리는 귓속말을 하고 있다. 아이는 씽긋 웃으며,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아빠가 계속 양말 얘기를 계속해서 나도 나를 방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러게 왜 양말 얘기를 쉬지 않고 하고 난리냐고 미안한듯 큭하며 웃으며 말한다.


나는 '으이구 인간아 또 얼마나 싸질러놨냐'이러면서 살균청소액과 주방휴지를 가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나마 그냥 둬서 너무 다행이다 싶었다. 기분 좋은 만취상태의 제이는 그 사건현장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딸아이와 비밀약속을 하며 거실에서 그냥 꽁냥 대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 감정도 다치지 않고 사건현장도 청소가 더 용이한 상태였다. 기분좋은 만취상태의 제이는 잔소리를 큰소리로 장전하고 쉴 새 없이 따발총을 쏘는 나를 향한 무한 애정을 아이에게 고백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이제껏 술 먹은 것이 화난 게 아니라, 술먹으면 나타나는 ‘묵혀진, 바닥까지 떨어지는 자존감’과 ‘연약한 인간이 보이는 또다른 형태의 폭력성’ 따위에 지치고 힘들었던 것인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내 잔소리에는 분노와 환멸감이 전혀 녹아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긴장감이 없어서 치우지도 않았던 상태인데, 자긴의 마누라도 자기를 코너로 몰아가지 않는것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끼고, 아이에게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둥의 코미디 장르 멘트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아이도, 오줌은 바닥에 누지만 기분좋은 아빠의 모습에 마냥 행복하다. 뭐..잘쌌다 싶기도 했다. 덕분에 화장실 바닥과 변기 밑부분 전체와 화장실 벽면까지 다 닦고 소독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기분 나쁜 만취상태의 그는 이렇게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화장실이 아닌 곳에 거의 1리터 정도로 그 화장실 아닌 곳에 홍수가 나도록 해 버린다. 혹은 덧문(창문 밖에 하나 덧대는 문, 주로 나무 플라스틱 철 재질)까지 열고 밖으로 분수쇼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건 거의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라 정말 아침에 이런 현장을 발견하면 뭐랄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온다. 당신이 만약 옷장을 열었을 때 아니 열기도 전에 벌써 어 이 물은 뭐지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당신의 책상이 어떤 물 같은 것으로 흥건하게 젖어있다면 책과 서랍장 안 모두가 테러를 당한 그런 상황에 빠졌다면..?


그래서 오늘 나는 기분 좋은 만취상태의 제이가 화장실 바닥 전체적으로 골고루 뿌려놓은 특별한 물들을 이리저리 닦아야했으나 마음은 평온했다.



정확하게 골인되지 않아도 괜찮아 기분 좋게만 눠라. 알딸딸한 상태에서 화장실 찾아간게 어디냐.


저 낮은 변기에 이제껏 많이 흘리지 않은 게 대단한거지. 365일 중에 몇 일만 바닥에 누는 건데 뭐.. 타율 좋은거야


술 깨면 조준 더 잘할 수 있어. 힘내고.


파이팅 하자.



5. 칭찬,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꽃’이 되게 하다


브런치 글을 읽다가 어버이날이 다가와서 한국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엄마에게 그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했을 뿐인데 마치 편지를 받은 양 기뻐하시더라하는 내용을 만났다.


그래서 오늘 아침 아이를 등교시키고 점심 픽업을 가기 전, 점심을 만들기 전에 짬을 내서 어버이날 카드를 만들었다. 중간에 꽃을 붙이고 금박과 진분홍 반짝이의 나비들을 사방에 배치시켜서 표지를 완성했다. 그리고 편지를 쓰고 좀 촌스럽긴 했지만 '2024년 어버이날'이라고 적었다. 부모님의 이름을 각각 새기고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여 써넣었다. 이 카드가 올해 여든몇살이신 아빠에게도 전달될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리고 5만원짜리 한 장을 작은 빨간 봉투에 넣어 준비했다. 혹시라도 분실할 수도 있지만, 한국정서상 돈을 좀 넣어야할 것 같아서였다. 이 한국의 문화는 아주 날 것이며 직관적이며 놀랍기도하다, 놀랍도록 즉각적이고 솔직하기까지하다. 소액의 종이 한장과 함께 기적의 메달도 하나 넣었다. 파리 봉마셰백화점 옆에 있는 기적의 메달 성당에서 산 한국어 버전이다. 이곳은 파리가이드하면서 일정 중에 있어서 잠시 들렀던 곳이다. 파리 작은 골목에 화려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곳에 평일인데도 관광객이 넘쳐났다. 이 메달은 손톱만하고 납작해서 봉투에 함께 넣어도 별 문제 없을 듯 하다.


솔직히 5만원이면 초등학생들한테 용돈하라면서 주는거긴 하지만, 돈을 주는 문화도 좀 그렇고(하지만 선물로는 제일 실용적이긴하다는 걸 주부로써 뼈저리게 느낌. 받았을 때 전제), 한국 원화도 가진게 별로 없고, 한국 계좌 거래도 힘들고, 분실 가능성도 있고해서 그냥 상징적인 의미로 넣었다. 딸리 이 꼬라지로 살아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 정도.


아이 점심메뉴는 간소고기스테이크와 감자튀김과 메추리알이었다. 토마토수프도 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냥 후식으로 사과 바나나 퓨레와 딸기 바닐라 요거트만 준비했다. 감자는 어제 저녁에 썰어서 물에 담궈서 전분을 빼고 받쳐서 물을 좀 빼고 다시 천에 놓고 수분을 좀 흡수시킨 뒤, 더 말려 둔 것이다. 그래서 준비가 쉬웠다. 그냥 튀김기 전원만 켜두었다가 튀겨내면 될 일이다. 색은 노란색이 유지되는 정도로만 가볍게.


혹시라도 또 아이가 감자튀김만 먹고 스테이크를 다 남길까봐, 스테이크를 먼저 먹고 있어라 한 후에 감자를 튀기러 나갔다. 그런데 아이가 스테이크 한 덩어리를 다 먹은 것이다. 150그램 정도라 과하게 단백질 섭취를 한 것은 아니라도 원래 고기를 많이 안 먹는 아이라.. 너무 감사했다. 이 일기의 첫 부분에서 아이의 자존감 회복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아이가 이렇게 식욕이 증가한 것도 다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이어 나온 감자튀김도 다 먹어치웠다. 이는 그녀의 성장곡선을 좀 긍정적으로 그릴 수 있는 거대한 첫발을 내디딘 쾌거로 평가될 수 있겠다. 쭉 이어지길.. 나는 야채를 식단에 좀 더 써야한다는 다짐을 쭉 이어가야겠고.


이렇게 잘 먹고 잘 쉬고 나서 오후 1시 20분에 집을 나서서, 1시 40분에 다시 학교에 아이를 다시 넣어 준 후에 우체국을 들렀다. 2024년 어버이날 카드를 들고 진열되어 있는 예쁜 우표를 훑어보고 있으니 한 직원이 다가와서 도와줄 지 물어본다. 그래서 80대분들은 알록달록한 것을 좋아할텐데 해외에도 이 우표가 가능한 지 물어보았다. 보통은 기계로 직행해서 무게를 재고 우표대신 금액이 찍힌 스티커를 붙여왔지만 혹시나해서 물어본 것이다. 일한 지 얼마되지 않은 분인지 또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더니, 무게를 기계에서 잰 후 그 금액만큼 이 우표를 붙이면 된다고 한다. 속으로 안될텐데,싶었지만 오색빛깔 우표를 사서 붙였다.


우편함에 넣기전에 여기 우체국에서 자주 봤던 직원이 보여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이 우표돼요?가 아니고, 이거 그냥 우편함에 넣어도 될까요?하면서 우표가 보이도록 보여주고 한국,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건 프랑스 내에서만 사용하는 우표라고 한다. 그걸 다 떼더니 나에게 준다. 나는 아까 우표가 들어있던 비닐팩을 다시 꺼내 거기에 뜯겨진 우표를 넣으며, 제가 우표를 이중구매하네요?하니까 웃으며, 평생사용할 수 있어요,하며 웃으며 받아친다. 그 여자 직원은 2024년 어버이날 카드를 저울에 달고 목적지인 한국을 찾아 누르는 중이었다. 나는 벌어진 비닐팩에 우표를 넣기는 했지만 좀 부실해서, 스태플러로 좀 찍어야겠는데,하며 혼잣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단박에 윗 부분에 스태플러를 두 군데 찍어왔다. 그런데 하나는 제대로 박히지 않아서 덜렁덜렁하고 있다. 그래서 웃으면서 아니,평생을 보관해야하는 데 이 쪽이,하면서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뒤에서 남자직원이 자신이 하겠다며 받아가서는 윗 부분을 두어번 말아서 스카치테이프로 길게 아주 깔끔하게 봉해서 딱 대령해주었다.


오, 이거 에르메스급 작업인데,라고 했더니 여직원이 아,세상에 그 브랜드를 저 친구가 완전 애정하는데!하면서 그 남직원을 본다. 환한 미소로 찐행복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명품 구입을 하러 다녀보고 많은 명품 제품을 봤다. 물론 에르메스도 예외가 아니다. 벌킨 켈리 볼리드 콩스땅스 에블린느 에르벡 가든파티 피코땅.. 만져도 보고 들어도 보고 현금결제도 해보고 카드결제도 해보고 하면서 가방하나에 천만원하는 것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확실히 섬세한 바느질, 가죽의 경우 만졌을 때 그 부드러운 느낌 등은 정말 우리가 머릿 속에 그리는 완벽한 제품에 가깝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한 일이나 제공한 서비스가 '에르메스급'이라는 칭찬을 듣는다면?


 직원은 내가 우체국을 나가는 순간까지  뒷통수를 응시하고 있다가, 문을  나서는  순간에 맞춰 Au Revoir! Bonne Journée, Madame! 외쳤다. 물론 의례껏하는 인사지만 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나는 명품서비스를 빗대며 농담조로 말했지만, 그는 스스로가 에르메스에 빙의되어  우아하게  완벽하게  명성  칭찬에 걸맞는 자가 이미 되어 있었다. 우체국 월급만으로는 끼고 걸고 신고 걸치고 바르고   없는  명품을 사지 못해 좌절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애정하는 명품의 정교하고 섬세함을 배우고 애정하는 행복한 에르메스바라기가 되길 바래요 총각.



6. 드디어 내 크림을 하나 사다


우체국을 나와서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20분 거리에 있는 카르푸에 가면 대형약국이 있는데 오늘은 기팔코 수분크림을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벌써 3주정도 크림이 없어서 베이비크림을 조금씩 짜서 바르고 있던 참인데, 신생아부터 사용가능한 이 크림이 몇 년만 지나면 반백인 아줌마와는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동네 약국에도 크림을 팔지만 회전율도 좋지 않고 가격도 몇 유로 더 비싸고.. 까르푸에서 장도 봐야하고..겸사겸사 들러야 할 이유가 꽤 많다. 한 20분 가까이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보니, 오늘 또 무슨 데모가 있나, 노선이 바뀌었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함께 기다리며 유모차에서 혼자 까르르 잘도 노는 새까만 얼굴에 하얀 눈동자에서 웃음 총알을 빵빵 발사하던 사내아이의 젊디젊은 어리디어린 아기엄마도 한 몸인양 뚫어져라 쳐다보고있던 휴대폰을 챙겨 가버리고, 또다른 까만피부의 쌍둥이 엄마 아빠도 가버렸다. 이렇게 버스 두대를 보내고 나니, 내 버스도 도착했다. 올 것은 반드시 오게 되어있다. 좀 많이 늦더라도. 반드시.


까르푸에 도착했다. 작은 장바구니를 선택해서 끌고 다니기로 한다. 조금있다가 역국에서 1리터 샴푸도 사야하니 너무 무거워지지않게 우유나 쥬스류는 집근처 수퍼에서 살 요량이다.


며칠 뒤면 또 주말이기에, 시금치 리코타를 베이스로 한 반조리 삭품인 Cannelloni Ricotta Epinards 하나, 미역국을 하기 위해 등심인지 안심인지 소고기 한덩어리도 바구니에 넣었다.  아보카도와 사과바나나퓨레 그리고 그릭요거트도 4개들이를 골라 넣었다 지난 주에 밤꿀 1킬로를 사두었기에 nature로 골랐다. 뽀얀 무가당 요거트를 그냥 먹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이 꿀을 섞어서 먹인다. 이건 하나의 루틴처럼 자리가 잡힌 것 같다.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까 고민하는데 한마리 통닭 구이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엔 수퍼에서 파는데 좀 그렇지 않을까했는데, 하루종일 빙빙 돌려서 안에 육즙이 다 빠져나갔을 거란 내 맛없는 상상과는 달리, 촉촉하고 짜지도 않고 고기 자체도 부드럽고 뼈도 깨끗했다. 그 이후로 한번씩 사다먹는데, 오늘도 그냥 이것을 픽한다. 금방 해서 진열해두었는지 뜨끈뜨끈하다. 이것과 함께 뭘 먹지.. 또 파스타? 아니면 뇨끼..? 줄기콩버터갈릭? 밥을 할까..? 하다가 어제 사다둔 토마토와 애호박 그리고 양파 베이스로 쿠스쿠스를 곁들이기로 한다. 아이 픽업이 네시다. 일단 빨리 여기를 나가서 약국으로 가자. 아, 하나만 더 담자. 항상 분노의 칫솔질을 하는 제이를 위해 솔이 빽빽해보이는 실한 놈으로 칫솔 3개 한세트도 바구니로 휘익.


까르프가 있는 곳은 작지만 그나마 모던한 작은 쇼핑센터 안에 있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이 북적인다. 그래서 기분이 꿀꿀하지만 파리로 나갈 시간이 없을 때는 동네에서 장을 보지 않고 여기에 오곤 한다. 물론 한국 시골 장터만큼의 활력에너지가 넘치지는 않지만.. 그래 이 곳에 있는 이 약국을 또 나는 애정한다. 가격도 몇 유로 저렴하고 선택의 폭도 넓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샴푸가 여기 있다. 꺄티에라는 중저가 브랜드에서 만드는 샴푸인데 여기서는 1리터 고용량을 11유로에 살 수 있다. 수퍼에서 파는 샴푸보다 어쩌면 더 저렴한 듯한데 품질이 우수하다. 오자마자 수분크림을 추천받아서 언능 사고 무거운 샴푸는 계산하러 갈 때 사야겠다. 왠지 다음번엔 가격이 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4월 30일, 전화해보니 도착했다고 하며 14.99유로라고 한다. 가격이 원래 저랬을 수도 있다는, 내 기억이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내가 확신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온전한 기억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나는 선택장애가 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더욱 선택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오지못하던 내가 오늘은 지체할 수 없다. 애를 데리러가야한디. 몇시지? 오후 세시 반이 넘었다. 아, 오늘은 제이가 재택근무구나. 좀 지체되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최대한 서두른다.


매장직원은 아닌 것이 분명한, 이 약국에서 처음보는 이십대 금발 아가씨가 한 흑인아줌마에게 영혼까지 털어가며 제품설명을 하고 있다. 저러다 쓰러지지는 않기를.. 저 열정, 뭔가 익숙한.. 저번에 아벤느를 팔았던 남자 파견직원’류’인듯.. 5분 정도가 지나고 그 아줌마의 품에는 대여섯가지 제품들이 들려있고, 설명  아가씨는 자신이 샘플을 직접 챙겨줄테니 따라오라며 그 아줌마를 안내하며 사라진다. 계산대에서는 좋은 샘플을 안줄 수 있다며 자신이 직접 챵겨주겠다고 하면서. 나는 조용해진 수분크림 진열대앞에서 또.. 하얀 것은 제품이요, 까만 것은 글씨네..이러고 있다.


이때 그 설명 아가씨가 와서 뭐 찾는 게 있냐고한다. 수분크림이라고 했더니 저쪽으로 가서 뭘 하나 보여준다. 약국 국민 브랜드인 아벤느나 유리아쥬 라호슈 데흐더마가 아니고 꼬달리 달팡 눅스 그 쪽이다. 다행히 랑콤이나 에스티로더 시슬리 라인은  그나마 입점이 안되어있다. 다행이다. 살려면 사겠지만.. 우리 화상 고기와 우리 공주 장난감은 어쩌고. 오늘만해도 점심엔 소고기요 저녁에는 닭고기아닌가.. 진짜 요즘같은 세상에 1일 2고기라니.. 참 한편으로는 부끄럽네 채소위주로 먹는게 대세라은데..ㅎㅎ 여튼, 한국에서 랑콤세럼을 발랐을때의 그 변화가 아직 기억나고 피부과와 마사지샵에서 돈 뿌르고 나서 피부가 어땠는지도 또렷한데.. 이젠 잊어버려야하는 기억 중의 하나일 뿐. 지금으로선.


아까 그 아줌마는 이쪽이더니 난 왜 저쪽이지.. 가격을 보니 58유로. 안티에이징 라인이 아니고 수분라인인데 이 금액을 주고 어찌사나.. 그냥 15유로 안짝에서 사고 싶다고 했다. 다시 아까 흑인아줌마가 있던 그 쪽으로 왔다. 작은 튜브는 30그램 정도되지만 아껴쓰면 한 달은 문제 없다. 제이가 팍팍 다 발라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


에고.. 지난 날 한국에서 씽글로 살면서 나만을 위한 소비를 할 때 백화점에서 한통에 수십만원짜리 SK2세럼 랑콤세럼을 찍어바르기도 했었는데.. 그때 그거 바르고 연애라도 하고 다녔으면 이 고생을 하고 살까 싶기도한데.. 뭐 내 밥그릇이 딱 요만큼인가보다 싶기도하고.. 뭐 나처럼 못사는 사람이 딱 있어줘야 잘 사는 이들도 우쭐하고 좀 그런거지.. 그나저나 나이가 들면 좀 좋은 걸 발라줘야한다는 말도 들은 것 같은데.. 뭐 남의 나라 이야기다, 요렇게 생각하고 말련다. 솔직히 크림하나 사는 것도 몇 달을 주저하다가 코딱지만한 수분크림을 샀다고 좋아서 글로 남기는 것, 이거 뭔가 꿀꿀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지금 나? 전혀 그렇지 않다. 크림은 3주동안 생각만하다가 결국은 소고기를 사고 돼지고기 닭고기를 사고 연어와 채소 야채 유제품을 사는 것에 돈을 안아끼는 것을 선택했다. 고기 한 번 안사면 바로 살 수 있는 ‘내꺼’, 13유로짜리 수분크림을 그래도 샀으니, 이제 되었고. 행복하고. 그렇다.


기분좋게 계산대로 갔다. 아, 샴푸. 깜빡한 내 소중이를 찾는데 어, 안보이네. 너무 깜짝놀랐다. 이게 뭐라고. 계산대 직원에게 물어보니 전산으로 확인한다. 없단다 오늘은. 언제오냐니 일주일이나 몇 주..?라고 한다. 아.. 내 최애아이템.. 쓰악한 마음을 추스리고 계산대 옆의 바세린잴리크림을 대신 바구니에 하나 더 넣었다. 유튜브에 빠져살 때 저 바세린 얘기를 어찌나하던지.. 크기도 딱 담배곽 반도 안되는 앙증맞은 싸이즈다. 그런데 아무리 통이 작다고 해도 2.99유로..? 이거 얼굴에 진짜 발라도 되는 건가? 밀봉 밀폐는 개나 줘버린 듯 뚜껑이 훌러덩 열리고 냄새도 완전 화학 약품 냄새인데.. 내 얼굴에 실험해보고 괜찮으면 식구들에게 권하고 영 아니다 싶으면 발마사지용으로 식구간의 정이나 다지기로 한다.


이렇게 카르푸 약국을 드디어 왔다 가는구나. 최애 샴푸는 집에 데리고 가지 못하게되었지만, 오래된 버킷리스트를 해치운양 뿌듯하기까지하다. 안티에이징 크림도 하나 갖고 싶지만, 수분크림이라도 생겨서 뿌듯하다. 아주.


설명 아가씨에게 과연 내 나이에 수분크림하나로 될까? 아이크림도 없고 이대로 괜찮을까 했더니, 얼굴에 주름도 하나 없는데 '벌써부터 노화 방지 크림?' 안발라도 된다고 하지 않는가. 내 나이를 말하니 oh, non. cest pas vrai. 말도 안됀다고. 농담말라고 한다.


ㅎㅎ

고마우이 설명아가씨.

얼굴도 고운데 마음은 더 비단결이구려.

크게 될 처녀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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