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은 출발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에 이루어졌다. 둘은 기적같이 맞춰둔 알람을 모두 무시했고 잠결에 확인한 시간을 믿지 못한 채 부랴부랴 퇴실을 준비했다. 다행히도 나는 알람을 듣고 여유롭게, 하지만 내가 씻은 후 G가 씻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시간을 알차게 사용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나와 대기하는 것이 투어객의 올바른 자세라면, 우리는 그것만큼은 지킬 수 없었다. 카밀라가 객실 문을 두드려 지금은 일어난거냐며 물었다. G군은 없는 시간을 쪼개 씻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녀에게 대신 대답했다. 출발 예정 시간을 3분 남겨둔 채 겨우 나올 수 있었다. G는 차에 타는 동안 아침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투어 이틀차는 하루종일 앤텔로프 캐니언과 브라이스 캐니언을 갔다와야 하는 일정이었는데 어딜 들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침에 앤텔로프 캐니언을 보고 바로 점심을 먹는다면 그때까지 쫄쫄 굶어야 했다. G군은 호텔의 조식 부스를 떠올리고선 나에게 빵과 잼을 가져다 달라 했다. 아직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남은 것 같아 재빨리 호텔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빵은 있었지만 버터는 딸기잼은 없었다. 빵에 바를 수 있는 끈적한 액체 중 가장 싫어하는 땅콩버터만 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옆에 놓여진 여러 디저트 중 황도 통조림 두 개를 같이 챙겨나왔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뜨기 전 상큼한 오렌지까지 양 주머니에 하나씩 집어넣고서야 직성이 풀려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G는 가져온 음식을 보고 땅콩버터는 제외하고 크게 만족했다. 빵을 가르고 땅콩버터를 바를 나이프도 챙겨와 그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먼저 빵에 땅콩버터를 듬뿍 발라 먹었다. 뒤에 G가 오렌지를 집어들었는데 우연찮게 버스가 흔들려 과일을 놓치고 말았다. 오렌지는 알다시피 둥글기 때문에 바닥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떨어진 오렌지가 퍽 소리를 내고 떨어진 채로 앞 좌석으로 굴러가 더이상 찾을 수 없었다. G가 참으로 아쉬워 하며 입맛이 싹 달아나버려 먹는 일을 그만두어버렸다. 나는 옆에서 황도 통조림을 조심스레 열었다. 뚜껑을 스푼 모양으로 섬세하게 접어 나름 우아하게 디저트를 먹을 수 있었다. 버스는 얼마 달리지 않고 멈췄다. 전날 앤텔로프 캐니언 근처에 숙소를 잡아 아침 동선을 효율적으로 구성해두었던 덕분이었다. 잠깐 내려 맥스와 카밀라가 투어 일행을 여기 전용 가이드에게 인계했다. 아침이라 사막치고 뜨거운 햇빛을 견딜 수 있었다. 미국의 햇빛은 한국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주위 모래가 열을 나에게 모아 보내는 것 같았다. 습도가 낮아 땀은 나듯 안나듯 금세 날라가 버려 불쾌함은 없었다. 근야 뜨겁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앤텔로프 캐니언은 사막에 가끔 내리는 비가 모여 흘러가는 거대한 수류에 의해 생겨났다. 전날 보았던 그랜드 캐니언은 콜로라도 강이 수 억년 동안 꾸준히 깎아왔던 것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규모는 크지 않더라도 사람 하나의 스케일에서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지형이라는 점은 인간 친화적 자연환경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윈도우 배경화면으로 유명하다는데 직접 보니 알아볼 수 있었다. 사암 지층이 물의 흐름을 따라 유연히 깎아내린 모습은 가끔씩 찾아오는 비가 어떤 흐름으로 사막을 빠져나가는지 떠올리도록 만든다. 좁고 깊으며 단단한 바위를 뚫고 지나간 길은 커봤자 사람 둘이나 지나갈 수 있는 폭밖에 안된다. 얇은 실이 좁은 폭과 높은 압력으로 물체를 잘라낼 수 있듯이 이 물이 가진 날카로움과 집약된 세기가 오롯이 느껴진다.
안으로 들어가면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1시간 정도 돌아볼 수 있다. 사실 가이드가 왜 필요한 건지 의문이 들정도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않는다. 가이드는 인솔하는 그룹의 한 명씩 포토 스팟에 세워 각자 핸드폰을 건네받아 사진을 찍어주는 일밖에 하지 않는다. 사진의 퀄리티는 남다르다 할 수 있었지만 여기가 무슨 어떤 장소인지 전혀 맥락은 알지 못한채 열심히 사진을 찍는 일에만 치중하도록 분위기를 형성한다. 어찌보면 노리공원에서 운영하는 체험부스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나와 G또한 앞 뒤 무리 흐름에 떠밀려갔다. 그나마 사진 찍고 지층을 만져보며 캐니언을 실컷 누릴 수는 있었다. 지구과학을 배울 때 본 부정합 - 두 지층이 오랜 시간 간격을 두고 쌓인 경우 불연속된 지층을 형성하는 경우 - 이라던가 하는 지질구조를 만져대며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드디어 쓰일 날이 오는구나 싶었다.
정신없는 지질 테마 부스를 빠져나와 땅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지나온 길이 땅 아래로 얇은 틈처럼 비춰보였다. 햇빛이 닿지 않아 안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 깊이는 기껏해야 시냇물 정도 흐를 것 처럼 보였다. 나는 뒤에 뒤따라나온 싱가포르의 젊은 커플의 사진을 찍어주며 의아했다. 이들은 무엇을 기록하고 싶은 건지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더니 다 빠져나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틈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무얼 하던 무엇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간에 즐겁게 다니는 모습이 오랜만에 사랑에 대한 질투가 아닌 동경을 유발했다.
G와 나는 낙오된 인원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던 가이드에게 가 20달러의 팁을 지불했다. 모든 서비스에 팁을 따로 내야 하는 일이 아직 적응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던 모습에 팁이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했을까 싶어 기꺼이 팁을 지불했다. 곧바로 이어진 기념품점은 핸드폰에 담긴 사진보다 고급스럽고 커다란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놈의 인생샷을 건지겠다고 셔터나 누르던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가이드가 보여준 스팟에서 높은 화소로 촬연된 그림들을 보자니 괜히 팁을 준 것 같았다. 아무런 간섭없이 카메라는 내려놓은 채 다시 볼 수 있길 바라며 앤텔로프 캐니언을 마무리했다.
앞으로 브라이스 캐니언을 향해 갈 일만 남았다.사이에 점심을 먹거나 몇 경유지가 있겠지만 ’캐니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에 비하면 곁다리에 불과했다. 점심은 선택지가 빈약한 뷔페에서 값비싸게 해결했고, 가는 길 후버 댐 구조와 동일하게 지어진 댐 하나를 잠시 들렀다. 만약 투어가 아니라 G와 단 둘이 왔더라면 후버 댐에 가장 먼저 들렀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가장 거대한 인공물이라는 칭호를 가진 곳을 가진 못했지만 댐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충 감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우버 댐은 이것보다 크고 웅장하면서 댐 위에 직접 서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좋은 기회를 놓친게 아닐까 싶었다.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겠지하고 브라이스 캐니언을 향해 한참을 다시 달렸다. 가는 길에 오늘 밤 묵게 될 곳 근처를 지나쳐 쭉 달렸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캐니언 관련 국립공원 중 가장 북쪽에 있어 접근성이 좋지 않다. 큰 강이 만들어낸 지형이 아니기에 여태 보았던 지형과 다른 매력을 갖추고 있다. G군은 과거 어린이 시절 가족 여행으로 캐니언을 둘러본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직접 차를 몰고 아이들을 데려갔다는데 이 길을 직접 운전했다 생각하니 부모의 위대함을 시즌 n번째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보았던 캐니언 중 G가 최고로 치는 것이 브라이스 캐니언이었다. 여행 전 직접 운전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던 것이 브라이스 캐니언을 꼭 가야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꼭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입 밖으로 ‘최고’라는 말을 내뱉었기에 주워담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브라이스 캐니언을 포기할 수 없었고 결국 모든 캐니언을 들를 수 있는 투어를 선택하게 되었다.
산이 깎여 만들어진 지형이라 점차 암석 위에 나무가 빽빽한 풍경이 펼쳐졌다. 버스는 똑같이 생긴 길을 달리면서도 꾸준히 오르막을 올라 깎여나간 지형을 내려다볼 위치로 나아갔다. 경사가 크지 않아 다와가는 줄도 모르고 G와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앉아있었다. 맥스는 30분 자유시간을 선언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라 했다. 빗물과 눈이 부드러운 암석 사이를 파고들며 단단한 기둥만 남겨둔 것을 ‘후두’라 한다. 거대한 암석 기둥이 산비탈길 아래로 요철마냥 빼곡히 박혀 형성하는 수직적 분위기는 이국적이다못해 외계행성을 보는듯 하다. 너머로 보이는 평원에 드문드문 솟아있는 푸른 산들과 버무려보니 도저히 한 눈에 보인다고 믿을 수 없는 광겨잉었다. G가 왜그리 극찬했는지 충분히 깨달을 수 있던 풍경이었다. 그랜드 캐니언은 너무 웅장해 크기에 압도되지 않는다. 우리가 지구를 항상 밟고 내려다보면서 지구라는 거대한 질량의 물체를 두려워하지 않듯 그랜드 캐니언은 비현실적이고 와닿지 않는다. 반대로 앤텔로프 캐니언은 사람 스케일에 근접했지만 명성에 비해 좁은 통로와 길이가 아쉽다. 그 사이에서 사람이 직접 안길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브라이스 캐니언이었다.
울타리가 쳐진 스팟에서 간단한 인증샷을 남기고 왼쪽으로 더 들어가보니 울타리도 없이 절벽에 불쑥 튀어나온 바위가 있었다. 사람 한둘 만 가서 사진을 찍고 있었고 나는 갈 생각이 없었다. G는 높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아 거침없이 그곳으로 나아갔다. 가까이 가지 못한 채 근처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와 찍는 김에 살짝 뛰어보라고 주문했다. 그는 살짝 튀는 행세를 하면서 한 발을 떼었다. 그러자 옆에서 화들짝 놀라 꺅 소리를 냈다. 같이 다니던 싱가포르 커플의 여자가 높은 곳을 무서워하고 있던 도중 G가 뛰려 하는 못브을 보자 겁에 질렸던 것이다. 남자 쪽은 여자를 잘 달래 G가 사진을 찍던 위치로 데려갔다. 그 사이 G는 위험한 곳에서 빠져나와 내 옆으로 왔다. 절벽 위로 나 있는 길로 더 가보니 방금 전 바위 위에서 커플이 단란히 셀카를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진을 다 찍고 다시 조심스레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서 G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서는 포즈를 취하게 하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남자는 흔쾌히 승낙하여 여자를 안정적으로 붙잡았다. 남자는 신나는 표정으로, 여자는 다소 겁을 먹고 남자에게 의지하면서 촬영에 임했다. 동양인끼리 선의를 나누고 나니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빠르게 돌아가봤더니 살짝 시간을 넘겨 카밀라가 근처에서 우리가 오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뛰어라 학생들아!“라 하며 마치 철부지 학생을 다루는 선생님의 자세로 우리를 인솔했다. 급하게 차에 타서 브라이스 캐니언의 다음 지점으로 이동했다.
선셋, 선라이즈 포인트에서는 직접 후두 틈 사이로 내려가볼 수 있는 트래킹 코스가 있었다. 그 주변을 맥스의 안내를 따라 관광객이 우르르 따라갔다. 우리는 그 뒤에서 여유롭게 내려갔다. 사실 나는 맥스를 놓칠까봐 불안했다. 전날 점심에 가이드의 안내를 소홀히 했다가 점심과 영화를 모두 놓칠뻔한 경험때문에 맥스를 따라가고 싶었다. 반면 G군은 어차피 길이 한정되어 있으니 천천히 가더라도 깅르 잃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것보다 가이드가 말한 시간을 넘길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어차피 길이 어렵지않아 정 모르겠다면 왔던 길로 가면 된다. 그러나 가이드가 예상한 복귀 시간에 맞출 수 없으면 민폐인 건 틀림없었다. 그래서 G에게 서둘러 가자고 괜히 재촉했고 감정을 건드려버렸다.
가다 보니 익숙한 일행이 보여 그들을 따라가면 된다 하여 걱정을 덜었다. G에게 괜히 걱정하고 짜증을 냈던 일을 사과했다. 그 와중에 G는 새로운 고난을 겪고 있었다. 여태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지만 이제 다시 올라가야 했다. 점차 오르막이 시작되자 G가 숨이 가빠지고 걸음이 묵직해졌다. 반대로 나는 걱정했던 일이 해결되었으니 신난 마음에 노래를 흥얼거렸다. 상반된 자세로 걷고 있는 둘은 좋은 경치를 볼 때마다 감탄하며 카메라를 집어드는 일은 빼놓지 않고 행했다. 틈틈이 압도되는 경치 앞에 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앞의 일행을 앞지르자는 유치한 발상에 힘입어 금세 제 높이로 올라올 수 있었다. 중간마다 맥스가 멈춰서서 우리보다 뒤쳐진 일행이 있는지 확인했다. 부지런히 올라온 것 치고 우리 뒤에 아무도 없었다. 맥스는 우리가 바지막 인 것을 확인하고는 우리의 뒤를 받혀주며 올라왔다. 다시 올라와 우리가 걸었던 길을 바라보니 다시 실감나지 않았다. 후두가 수없이 몰려 있는 모습을 보면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 사이에 내가 어떻게 놓여있었나 떠올려보면 풍경의 실제 축척을 계산할 수 있었다.
한 차례 고된 트래킹을 끝으로 투어 이틀차가 마무리되었다. 브라이스 캐니언을 오는 길에 지나쳤던 숙소를 향해 다시 달렸다.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서 더 지루하게 느껴졌다. 왔던 길을 다시 곱씹어보니 조용한 강이 흐르고 암벽 아래에 지어진 작은 집이 슥슥 지나갔다. 가끔씩 보이는 사슴은 여기가 자연이긴 하구나 하고 실감나게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 해가 다 지고 식당 대부분이 주문을 받지 않는 시간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방에 대충 던져넣고서 근처 햄버거집으로 갔다. 숙소 근처 연 곳 중 가장 까까운 곳이라 사람이 꽤 붐볐다. 안에 앉을 곳이 없어 주문을 하고 밖으로 나와 자리를 잡았다. 사막이라 해가 지고 나니 꽤 쌀쌀한 날씨였다. 음식은 훌륭했다. 햄버거를 싫어하는 필자도 괜찮게 먹었을 정도의 퀄리티였다. 햄버거는 맛이 없지 않아도 먹는 방식의 불편이 커서 선호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편을 상쇄할 만한 적당한 맛만 있다면 만족할 수 있다. 프랜차이즈에서 먹던 햄버거에 비해 훨씬 두껍고 기름진 햄버거였다. 같이 나온 감자튀김도 두껍고 길쭉해 만족스럽게 먹어 치웠다.
저녁을 먹고 숙소 앞 마트에서 맥주와 감자칩을 구입해 들고 갔다. 맥주를 까서 먹으며 편히 쉬었다. 나는 맥주를 다 먹고 핸드폰을 보다가 잠들었고 G군은 맥주를 미처 다 비우지 못하고 쓰러졌다. 계획없이 누워버린 대가로 다음 날도 늦은 기상이 예정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