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우 Sep 14. 2023

거스르지 말자

글이 좋아 너무 좋아

2023.09.14, 나는 처음으로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몇 자 안 적었지만 너무 초라해서 다음에 공개하는 거로 하자. 1교시 수업 시작 전에 애들 따라 농구장에 갔지만 노트를 들고 있었다. 시인이 된 기분, 오늘따라 감성적인 날씨, 내 가사의 시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듯이 쨍쨍한 햇살.


요즘 국어 수업 시간이 너무 기다려진다. 1학기에는 3 단위였는데, 2학기에는 2 단위로 줄어든 게 너무 서운하지만 받아들였다. 국어 수업 시작 전에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라는 최지인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다른 시집과는 다르게 표현, 비유들의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내 경험에 빗대어 공감하기도 했다. 소장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YES24에서 사버렸다.


<인상적인 시>

나아진다는 게 뭘까
여러 날 동안
여러 달 동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지만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것들

면담이 끝났다
그만둘 날이 정해졌다
사무실 이곳저곳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지진이 났대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곁을 맴도는 바람 잠시 머문 햇살 이사를 앞둔 사람
네가 없는 여기

내가 떠난 건 네가 아니야
아프지 말자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알 수 없는 마음은 그냥 두자

아니야, 그건 내 이기심이야

누군가 말했다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른다고

그런 자유는 없다
우리 시대 지식인 들은 모든 인민에게 빚지고 있다

나는 무엇에 공모하고 있는가
이 구미 자본주의에
이 신자유주의에

바로잡을 기회는
있었다 분명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둔 것이다

꽁꽁 언 고기가 녹고 있다

아름다운 것은 아프고
아픈 것은 아름다워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이 밤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가만히
가만히


1995년 여름

이놈의 집구석
넌더리가 난다고 했던 주말 오후에는
소면 삶고 신 김치 잘게 썰어
양념장에 비벼 먹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끝나기만
기다렸다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귀를 막았다

어머니는 멍든 눈으로 부서진 가구를 밖에 내놓고
금이 간 유리창에 셀로판테이프를 붙였다
출근하지 않고 틀어박혔다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다

 나는 동급생들과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녔다 자전거를 훔쳐
타고 슬프다 슬펐다 언덕을 오르내렸다 가장 먼 곳을 향해
페달을 쉬지 않고 밟았다 옳다고 믿었던 건 옳지 않은 것 뿐이었다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
나는 슬플 때마다 슬프다고 말했다
여성복 점원이 엄마야? 하고 물을 때
누나예요 하고 답하면 어머니가 생긋 웃었다

강 너머에서 어느 일가족이 연탄가스 마시고 세상을 버렸다
세상은 반듯하게 누워 뭉그러졌다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는 어머니도 한때는 무용수였다
나는 종종 무대에서 춤추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팔과 다리를 길게 뻗었고 박수와 함께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시시한 이야기를 지어낸 셈이다

잠든 어머니 가슴에 귀를 대고
가만히 숫자를 셌다

그해 여름
어머니는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해서
이룬 게 거의 없었다

'1995년 여름'의 마지막 연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내가 철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쯤 엄마는 내 눈물 버튼으로 바뀌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고생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엄마의 어린 시절은 얼마나 아팠을까. 엄마한테 짜증 냈던 순간들이 가끔 생각나고 후회된다. 엄마가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잘해주고 있다. 나만한 아들 솔직히 별로 없다. 우리 엄마 같은 엄마는 이 세상에 별로 없진 않다. 절대로 없다.


국어 수업 시작 전부터 붙들고 있던 시집은 7교시 창체 시간까지 내 손에 붙어 있었다. 7교시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교실이 아닌 시집 속에 있었다. 재즈 힙합을 들으며 시집을 읽는 동안 내 행복은 극대점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글이 너무 좋았다. 글 속에 살고 싶다. 오른손의 엄지를 미세하게 옮겨 종이 한 장이 넘어갈 때의 스릴은 축구할 때 찔러주는 킬패스와 비슷했다.


50분 동안 시집에게 잡아먹힌 나는 곧장 국어선생님에게 달려가 나의 감정을 공유했다.


국어 복습을 할 때면 펜도 잘 잡히고 집중도 잘되지만 수학, 과학 공부는 이제 내 손을 떠나갔다. 음악 하려고 자퇴한 고딩 마냥 공부는 놔버렸다. 요즘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몇 가지 없다. 나중에 내가 음악을 할 때, 내 음악을 들어줄 리스너들의 신뢰도를 상향평준화 시켜주는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빈지노가 서울대 조소과라는 것이다. 너무 멋있다.


어젯밤에 빈지노와 송은이가 함께한 유튜브 영상을 봤는데 빈지노의 일상이 너무 부러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대중에게 인정받는다. 어제 일기를 못 적어서 오늘 아침 7시에 "나도 지금은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다. 미친 듯이 시간을 투자해 보자."라고 써놨지만 실행은 못했다. 진짜 어쩌지.


내 학습실 옆자리 구독자님과 내일부터 아침 6시에 같이 일어나기로 약속했다. 설렌다. 1학기의 내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귀여운 구독자분이 자기 구독했는데 왜 글 안 올리냐고 하셔서 오늘도 글을 써본다. 시험기간이라도 글감을 꾸준히 찾고 적어두라고 조언까지 하셨다! 덕분에 최고의 작가가 될 것만 같다.


꿈과 가까워지는 밤이다.


빨주노초 물감을 덜어, 하얀색 종이 위를 총처럼 겨눴던
어린 화가의 경력은 뜬금없게도 힙합에 눈이 멀어
멈춰버렸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어

- 빈지노, If I Die Tomorrow
이전 06화 2023.09.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