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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ry J Feb 25. 2024

작고 반짝이는 것

잃어버린 결혼반지

며칠 전 생일이었다.

남편은 생일선물로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했다.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는 주문은 보편적으로 정말 설레는 말이다. 갖고 싶은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그렇다.  

친구 몇 명이 그랬다. "원하는 게 생각나지 않을 때는 무조건 작고 반짝이는 것을 사달라고 해."

주얼리박스를 본다. 아마 잔뜩 있는 편은 아닐 것이다.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다. 그 비율이 적당하다. 진짜던 가짜던, 모두 작고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다.



결혼을 두 번 한건 아닌데, 나는 한 때 결혼반지가 두 개였다.

결혼을 하면서 처음 가져본 다이아몬드.

항상 악기를 다루고 있으니 반지를 노상 낄 수도 없는 데다가, 무엇보다 그 아름다운 것을 쓰기가 아까워 처음 몇 년 동안은 거의 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딘가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중요한 날에만 잠깐씩 등장시키곤 하던 그 귀한 것이 어느 날 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며칠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착용한 것이 언제 어디서 인지 기억을 쥐어짜 보았지만, 기억이 닿는 곳을 몽땅 뒤져도 없는 것을 보니 내가 없는 기억을 만들고 있나 싶었다.


속상해서 드러누운 나를 보고, 남편은 통 크게도 반지를 하나 더 맞추자고 했다. 결혼을 했는데 결혼반지가 없는 것도 이상하고, 내 상태를 보니 오래 드러누울 것 같은데, 그러느니 큰맘 먹고 생일선물하는 셈 치겠다고 한다. 결혼할 때처럼 이것저것 컬러와 순도를 고르고 보증서 있는 최상급의 다이아몬드를 사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오랫동안 거래해 온 샵에서 그래도 위로가 될 만한 것으로 다시 반지를 맞추었다.



두 번째 반지가 생기고 나니 그걸 보는 마음이 달랐다.

첫 번째 반지를 잃어버리고 가장 후회한 것은 "왜 그걸 아꼈던가"이다. 실컷 써보고 잃어버렸으면 그렇게까지 속상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몇 년 동안 몇 번 해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일부러라도 열심히 착용했다. 그러면서 내가 소유한 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조금 바뀌어 갔다. 좋은 것을 옆에 두고 아까워서 못쓰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달았다.

중요한 날 입으려고 한 쪽에 걸어두었던 옷들을 별 일이 없어도 입었고, 손님이 오면 꺼내려고 했던 그릇들을 나의 혼밥을 위해 꺼냈다.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하자. 어떤 물건이 일단 나에게 왔을 때 그 쓰임을 다해 수명을 다하는 것과, 곱게 쓰임을 기다리기만 하다가 하릴없이 없어지거나 망가지는 것, 물건 입장에서도  당연히 첫 번째 삶을 택할 것이다.


2년 뒤 반지는 엉뚱하게도 남의 집에서 나왔다. 친척집에 케이스째 두고 왔었나 보다. 그분들은 해외 이삿짐을 싸면서 집을 정리하다가 낯선 케이스를 열어보고 기함을 했다. 그 당시 나의 동선 상 그 집에 들르는 일이 꽤 빈번했기 때문에, 반지가 거기 있었어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깡그리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안 나면 어떤가, 중요한 건 반지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제 결혼반지가 두 개가 되었다.

그 누구도 한번 결혼한 상태에서 반지가 두 개일 필요는 없다. 웬 떡이냐는 뿌듯한 마음으로 나머지 하나를 목걸이로 다시 세팅을 했다.

얼마 후 오랜만에 아버님 댁에 간 날, 돌아가신 지 몇 년 된 어머님의 물건들을 정리하시던 아버님이 어머님의 작은 결혼반지를 내게 주셨다. 옆에서 자기 물건을 정리하던 남편이, 예전 여자친구와의 서사를 담고 있는 작은 다이아반지 하나를 조심스레 얹어준다. "혹시 이것도 괜찮아?" 하며 약간의 망설임과 함께 물어오는데 아무 주저 없이 덥석 받아 드는 나를 보며 남편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남편의 결혼 전 여자친구에게 갔었던 다이아몬드를 쓰고 싶냐고? 물론 너무 쓰고 싶다.  


그 두 개의 반지로 작고 앙증맞은 귀걸이 세트를 만들었다.

나는 이 목걸이 귀걸이 세트를 꽤 자주 한다.

좋은 날에도, 보통날에도 자주 한다. 소중하게 보관하지만 아끼지 않는다.  

내 목과 귀에서 반짝이는 이 작은 것들은 모두 주인이 다른 반지에서부터 만들어졌다.

이 세트에 깃든 각각의 작은 사연이 이것들을 더 나만의 것으로 느끼게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나의 다이아몬드 세트처럼 쓰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가진 사람들, 나를 가진 세상, 그들에게 내 존재도 이처럼 작고 반짝이는 것이고 싶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나를 아낌 없이 써주기를 바란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도, 나에게 섭섭하다는 말도 이유없이 참지 말고 때마다 해주었으면 한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가 성공이든 실패든 어떤 식으로든 다하는 날에 서로에게 미련이 없으면 좋을 것이다.




생일선물은 끝내 생각나지 않았다. 억지로 갖고 싶지 않은 걸 사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7학년 이후로 꺼내보지 않았다던 남편의 클라리넷 케이스를 열었다. 한 시간 연습시킨 후 생일축하 노래를 연주하게 했다. 결국 해낸 남편은 산소부족 증세를 호소했다.

나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작고 반짝이는 것은 충분하다. 아끼지 않고 쓸 만큼 가지고 있으니 더 이상 필요하지는 않다.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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