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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건의검 22화

「그는 다시 천비문에 섰다」

by 대건

위청은 전투 태세를 강화하라 명했다. 상대는 단 한 명. 그러나 그 이름이 등장한 순간, 천비문 전체에 검은 기운이 퍼졌다. 제국군에서조차 손꼽히는 고수라는 소문. 오랜 세월 그 이름은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다.


문파의 정예 파원들이 광장으로 소집되었다. 무예당에는 금빛 도포를 걸친 장로들이 서 있었고, 사방의 망루에는 활을 든 경계병들이 배치되었다. 매서운 바람이 돌계단 사이를 휘돌고, 산중의 공기는 이미 전장처럼 차가웠다. 단 한 사람의 방문자를 위해 문파 전체가 전시 태세로 돌입한 것이다.


천비문은 중원에서도 북측 고산 지대에 뿌리 내린 오래된 문파였다. 기운이 모이는 혈맥 위에 세워져, 운기공과 유운류검법(流雲流劍法)으로 강호에 이름을 남겼다. 그 중심에는 '흐름을 읽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무경의 경지가 존재했다. 이곳은 부드럽되 꺾이지 않는 자들의 도장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요한 발소리 하나가 천비문의 돌계단을 울렸다. 한 사내가 검은 장삼을 걸친 채, 대문 앞에 조용히 섰다. 기척 없이 다가온 발걸음이었으나, 그를 보는 순간 모두의 심장이 뚫린 듯 쿵 내려앉았다. 피로 얼룩진 전장의 냄새가 아니고서야, 저런 기세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매서웠고,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허리춤에 찬 검은 일체의 장식 없이 검신 하나로 위엄을 발산했다. 그 기세는 중원의 칼잡이들이 말하던 ‘성전(聖戰)’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검의 살기는 곧 그 사람의 혼이었다. 제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멈춰라! 이름을 밝혀라!” 대문을 지키던 문지기 두 명이 동시에 외쳤다. 검을 뽑는 속도는 늦지 않았고, 무릎의 각도는 틀림이 없었다. 수십 명의 무사들이 사내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진형을 짰다. 이윽고 검 끝이 일제히 그를 겨눴다.


건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고개를 약간 들어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한때 이 문파의 내실에서 부엌을 오가던 얼굴들이, 지금은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미세하게 눈이 흔들렸다. 그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는 나조차 이방인이 되었구나.’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간은 얼굴을 바꾸고, 기억은 입구부터 닫아버린다.

그래도 그는 돌아왔다. 천비문, 그가 자라난 곳으로.


그가 입을 떼기도 전, 한 제자가 외쳤다. “제국군의 첩자다! 포위하라!” 순간 경계선이 타오르듯 수축됐다. 무사들은 일제히 검을 들고 접근했고, 흙바닥 위로 발놀림 소리가 퍼졌다. 검 끝이 찢는 바람 소리는 천비문 계곡의 찬 기운과 얽혔다.


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검집은 고요히 허리에 걸린 채, 손조차 검 위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자세는 헛점 하나 없었고, 기세는 거대한 회오리처럼 주변을 잠식했다. 그가 숨만 내쉬었을 뿐인데, 제자들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러나 선두의 제자가 먼저 움직였다. 기합을 내지르며 정면으로 검을 내리쳤다. 동작은 정석에 가까웠고, 유운류의 기본기를 충실히 담은 품새였다. 검은 수직으로 떨어지며 건의 어깨를 노렸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였다. 방심했다간 그대로 골절이 날 만큼의 기세.


그 순간, 건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는 발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오른손 검지를 펼쳐 허공을 스쳤을 뿐이다.

그 짧은 동작은 흐름을 찢는 파문이 되어, 곧바로 상대의 검을 엇나가게 했다.


손끝이 그은 궤적에는 바람의 결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검이 그의 몸을 스치기도 전에, 건의 몸은 왼쪽으로 유연하게 틀어졌다. 등줄기를 따라 흐르던 기운이 다리까지 연결되며 무게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이동했다. 그는 마치 허공에 실려 떠다니는 구름처럼 움직였다.


그리고—반격.

검을 뽑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검신은 흐릿한 잔상만 남겼다.

적의 검선을 흘려 넘긴 채, 그의 검이 허공을 타고 아래에서 위로 떠올랐다.

검끝은 무사의 팔꿈치 안쪽 맥을 정교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유운진강(流雲鎭江)...!”

뒤쪽에서 지켜보던 제자가 목소리를 삼키며 외쳤다.

천비문 최상위 무공, 흐름을 읽고 힘의 정점을 흘려 넘긴 뒤, 그 반동으로 적의 허를 찌르는 기술.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방어와 반격이 동시에 완성되는 검술이었다.


건의 유운진강은 완벽했다.

그의 동작은 무공을 시전했다기보다, ‘검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 것처럼 보였다.

무기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의 숨결, 의식, 근육, 바닥을 딛는 발끝 하나까지 모두 검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은, 천비문이 잊고 있던 본래의 무학이었다.


쓰러진 무사는 검을 놓친 채 뒤로 물러났다. 팔 안쪽에 남은 검기의 흔들림은 뼈를 타고 전해졌고, 손가락 마디가 떨렸다. 그 기술을 당한 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건 단순한 일격이 아니었다. 흐름을 읽고, 흐름을 잠재운 일격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천비문의 기술을 쓸 수 있다고 해서, 우리 편일 순 없다!”

어느새 둘째 줄의 무사들이 검을 가로세우며 달려들었다.

그들 모두 유운류의 중급 기술까지는 숙련한 실력자들이었다.


검의 끝이 하늘을 가르고, 번뜩이는 광채가 세 방향에서 건을 노렸다.

그 움직임은 일치감 있게 이어졌고, 방어를 허용하지 않는 찌르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건은 앞선 움직임보다 더 느리게 몸을 돌렸다.

오히려 일부러 늦춘 듯, 검을 천천히 쥐었다.


세 명이 동시에 공격한 찰나,

건은 검을 허공에 눕히듯 꺼내들었다.

그 움직임이 물결처럼 흘렀고, 공간이 그에 맞춰 구부러지는 듯했다.

바람이 한순간 멈췄다.


그리고—

건의 발이 지면을 가르며 옆으로 돌았다.

동시에 그의 검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공중에 선을 새겼다.

‘태극연무(太極連舞)’.


태극연무는 천비문의 대표적인 유연검술이었다.

하나의 찌르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며 적의 공격을 중첩시켜 흘려내는 무공.

연속되는 궤적은 흡사 춤처럼 유려했지만, 그 안에는 완벽한 방어의 연산이 숨어 있었다.

건은 그 기술을 단 한 합에 완성해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건은 낮게,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그의 검이 다시 흐르듯 움직였다.

방금 전의 품새를 반대로 돌리며, 상대의 흐름을 뒤엎었다.


검끝이 무사의 옆구리를 스쳤고, 두 번째 무사의 정강이를 치고 지나가며, 세 번째의 손목 위를 가르며 멈췄다. 누구 하나 제대로 쓰러지지 않았으나, 모두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무너뜨렸다. 몸은 반응했지만, 정신은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저건… 우리가 아는 태극연무가 아니야…”

한 제자가 중얼거렸다.

건이 보여준 태극연무는 무공이 아니라, ‘흐름’ 그 자체였다.

힘이 아니라 방향, 속도가 아니라 타이밍을 중시하는 기술의 정수가 거기 있었다.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뒤늦게 뛰어든 또 다른 제자가 날렵하게 몸을 낮췄다.

검이 허공에서 사라졌고, 다음 순간—그의 그림자가 건의 뒤편에 나타났다.

“운무섬(雲霧閃)!”


운무섬은 천비문의 기습 검술 중 하나였다.

빠르게 움직이며 기운을 응축한 뒤, 적의 배후를 찔러들어가는 찌르기 계열 기술.

그 검은 마치 안개처럼 모습을 숨기고, 갑자기 터지듯 나타나야 완성되는 기예였다.

사용자는 순간적으로 기척을 지우는 내공 조절 능력이 요구되었다.


허리를 틀며 몸을 숨긴 그 제자의 기술은 뛰어났다.

검끝이 그대로 건의 심장 뒤편을 노렸다.

그러나 건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손등을 들어올렸다.

그 손이 검끝을 받아냈다.


순간, 검과 손 사이에서 파문이 일었다.

기세가 죽었다. 안개처럼 스며들던 살기는, 바위처럼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건의 검이 반 바퀴 회전하며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운무섬이 완벽하게 되돌아왔다.


건의 발끝이 지면을 스치며 반원으로 움직였다.

검은 회오리처럼 부드럽게 휘돌아, 상대의 흐름을 흡수한 뒤,

정확히 중심을 찔러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속도가 중요하지만… 흐름을 잊어선 안 된다.”


제자는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검을 든 채 엎어진 그의 눈엔 충격과 경외가 뒤섞여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자신이 평생 갈고닦은 무공을 더 완벽하게 시전했다.

게다가, 더 부드럽고 정확하게.


전장의 긴장이 깨지기 시작했다.

남은 제자들의 검이 떨리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검끝을 내리깔았다.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사내는… 우리보다 천비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있다.’


숨막히던 긴장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제자들의 발끝이 떨렸고, 손끝은 힘을 잃어갔다. 바닥에 떨어진 검들이 미세한 소리를 냈고, 싸움의 열기는 검게 식어갔다. 그때였다. 천비문 중심부에서 무거운 발걸음이 들려왔다.


위청이었다. 천비문의 현 문주이자, '청풍의 검'이라 불리던 인물. 그는 사십 년간 이 산을 지켰고, 천비문의 흐름을 온몸에 새긴 자였다. 백발이 되어도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그 눈빛만큼은 강철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그 눈이 지금, 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어 나왔다. 멈추지 않고 돌바닥 위로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를 마주한 제자들의 눈빛엔 놀람이 담겼고, 검을 내려놓는 손길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위청은 검을 뽑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 전장을 멈췄다.


“모두 무기를 거둬라. 전투 태세를 해제하라.” 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강단 있었다. 바람이 그 말을 타고 광장을 가로질렀고, 제자들의 손에서 하나둘 검이 내려졌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손끝에는 아직도 경계가 남아 있었다.


천비문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건은 검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낡은 검집이 미세하게 갈리는 소리, 그것조차 귀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위청과 마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바라보았다.


잠시의 침묵. 둘 사이엔 오랜 세월이 흘렀고, 말보다 많은 것들이 오고 갔다. 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위청 형님… 오랜만이군요.” 그 말 한마디에, 위청의 눈가가 천천히 떨렸다. 차가운 눈빛 속에 감정이 일렁였다.


위청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쳤고, 그 뒤편에서 제자들이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건… 돌아왔구나, 내 동생아.” 그 말에 건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건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복귀이자, 사죄였다.


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신에 찼다. 위청은 잠시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천비문은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자리는, 아직 이 안에 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말 뒤에는 단단한 현실이 숨어 있었다. 위청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니다. 천비문은 지금, 거대한 위협 앞에 서 있다.” 건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형님.”


위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광장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조용히 뒷걸음질쳤고, 싸움의 흔적이 남은 돌바닥만 두 사람을 감쌌다. 그는 건을 이끌고 정원 안쪽으로 걸었다. 붉게 물든 노송의 그림자가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렸다.


“제국군의 최강자, 성전(聖戰)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위청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무거웠다. “그는 드래곤과 관련된 정보를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천비문이 그것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한다.” 건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 자가… 움직였습니까?”


“그래. 이미 탐색은 시작되었다.” 위청은 낙엽을 밟으며 말했다. “그는 교섭이란 말은 믿지 않는다.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자다. 난 지금까지 맞서지 않고 시간을 벌어왔지만…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건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오랜 세월 떠나있던 문파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자신이 지켜야 했던 것들이 남아 있었다. 그는 위청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형님은… 저에게 그를 막아달라고 부탁하시는 겁니까?”


위청은 말없이 건의 시선을 받아냈다.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고, 말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래, 건. 너였다면… 내가 부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천비문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너뿐이다.”


건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등 뒤의 칼자루가 무겁게 느껴졌다. 떠나온 세월이 길었고, 자신이 무엇을 놓고 떠났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다시,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왔다.


잠시 후, 건은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검을 가볍게 한 번 쥐었다 놓고, 조용히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천비문이 어떤 곳인지—그놈에게 똑똑히 새겨주고 오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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